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19화 (119/380)

인조, 명군이 되다 119화

합리적인 의심으로 세자의 능청스러운 계획을 짐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과도한 상상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세자를 금쪽같이 여기는 아비로서 현실을 회피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검증할 방법은 하나뿐.

중전은 용상 옆 자리에서, 누구도 속지 않을 거짓말을 한 뒤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붙잡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궁은 예상치 못했는지 몸을 화들짝 떨고는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전하?”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하, 하문하시지요.”

“세자가 세자빈 간택을 원하던가요?”

중전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숨기는 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세자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진의를 고민하는 듯했다.

어머니라고 어떻게 자식의 마음을 다 알겠느냐마는, 쉬이 부정하지 못하는 게 곧 대답이었다.

“아무래도 세자가 이 사람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양입니다.”

멋쩍게 웃었다.

중전도 공감하는지 씨익 웃었다. 미소가 조금 어색한 게, 민망한 기색이 여전했다.

막상 세자빈을 간택하려니 조금 난처했다.

정명공주는 직접 부마를 찾게 했다만, 세자에게도 똑같이 직접 간택하게 하려니 아비로서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공주야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인 신세이나 세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자는 장차 나라를 이끌어 이천만 백성과 한반도의 역사를 책임지게 될 몸이다. 현모양처를 구하지 못한다면 힘들어지는 건 세자만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 있긴 한데…….’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

원 역사에서 세자와 맺어졌던 인연으로, 민회빈이란 후대가 올린 시호로 가엾게愍 여긴다懷는 의미였다.

과연 세자빈 강씨의 삶이 그러했다.

시아버지가 무능한 인간쓰레기였기 때문이다.

세자빈 강씨는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한 뒤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9년이나 볼모로 지내야 했다.

그리고 냉대와 함께 귀국한 지 고작 3달도 안 되어 지아비를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잃었다.

그해부터 인조는 즉각 세자빈과 손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궁녀들을 고문하여 명분을 날조하려 들었다.

그 충격으로 세자빈은 품고 있던 유복자마저 유산하게 되었으나 궁녀들이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와중에도 허위자백에 응하지 않자, 인조는 이듬해 정월부터 세자빈이 독살을 기도했다며 다시 그녀를 유폐하고 휘하의 궁녀들을 고문했다.

신하들은 왕의 친족 살해 시도에 놀라 제대로 된 조사를 요구했으나 인조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대신 훗날 효종을 배신하게 될 김자점과 결탁하여 손자들까지 죽일 계획을 세운 뒤, 직접 세자빈 강씨에게 누명을 씌웠다. 고문을 거듭하여도 허위증언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 결과로 폐서인된 강씨는 그날 사약이 내려져 죽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강씨가 자신 대신 환관에게 맡겨 강화도로 탈출시킨 원손, 경선군慶善君을 포함해 다른 두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 보내졌다. 경선군과 차남은 병을 얻어 13살, 9살에 죽었고 막내는 22살에 요절했다.

‘누가 보더라도 가엾게 여길 수밖에 없지…….’

그런 민회빈 강씨를 다시 세자와 맺어주려는 건 단순히 불쌍해서나 원래 역사가 그랬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강씨를 세자빈으로 적합하다 여기는 건 그녀가 세자와 금슬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청나라 땅에서 세자가 볼모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서로 크게 의지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강씨가 궁궐에서 마땅히 누렸어야 할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인조에게 복수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쓰레기는, 단지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받는다. 나는 오리지널 인조가 정확히 그런 부류의 인간쓰레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음.”

마음을 굳혔다.

역시, 세자에게는 강씨가 어울린다.

반대로 강씨에게 민회빈이란 시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기로 작정한 만큼, 강씨가 세자와 맺어진다면 ******왕후라는 이름을 가질 테지. 강씨에게는 그편이 훨씬 어울릴 거다.

“세자빈 간택은 이 사람에게 맡겨주세요.”

중전에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끝났으나 물러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방해가 될까 걱정되었는지, 조심스러운 낯빛으로 이어질 말만을 기다렸다.

원래 역사에서 중전은 병자호란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세자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것도, 9년만에 다시 얼굴을 보았으나 아들과 며느리가 줄줄이 죽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보지 못했다.

과연 중전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미친 짓을 자행하는 인조를 수십, 수백 번이고 말렸을 터다.

본디 중전으로서 인조와 연을 맺게 된 사람이 아니었다. 사가에서부터 맺어진 인연이다. 세자를 다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핏덩이 때부터 품에서 길렀을 거다. 인조의 만행을 용납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말리지 못하고, 저승에서 세자와 세자 가족이 차례대로 따라오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겠지.’

불쌍한 사람이라면 강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중전을 끌어안았다. 중전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나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끌어안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 * *

세자빈 간택에 대해서는 마음을 굳혔지만, 곧장 시행하지는 않았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강씨의 부친 강석기姜碩期에게 밀서는 보내두었다.

원래 역사에서 세자와 강씨가 가례를 올리는 건 현 시점보다 몇 년 뒤지만, 흐름이 달라진 만큼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충분했다.

‘깜짝 놀랐겠지.’

왕이 언제 자신의 딸을 알아보고서 세자빈으로 점지했나 싶을 테니까.

‘그리고 서궐로 출근하는 발걸음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겠지.’

세자시강원의 강관講官을 겸하고 있는 강석기다. 장차 자신의 딸과 맺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세자를 대할 기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신이 돌아가는 대로 빠르게 매듭을 지어야겠어.’

세자의 의향이 어떨지 아직 모른다. 짐작이야 한다마는, 본인이 직접 말해주지 않았으니 미지수는 미지수다.

그리고 만에 하나겠으나, 세자에게 강빈이 썩 차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상정해야 할 가능성이다. 정녕 그렇다면 장차 잘 풀릴 것만 확신하고서 억지로 맺어주는 것도 독선인지라, 강빈이 사가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도록 빠르게 놓아주는 게 옳았다. 강석기에게도 그 점은 분명히 해두었다.

“전하…….”

옆에서 영의정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상념을 정리하고 고개를 드니, 영은문 너머에서 원접사로 파견된 윤방과 사신으로 방문한 병부좌시랑 풍가회馮嘉會가 다가오고 있었다.

풍가회는 시선이 마주친 것을 의식하고서 곧장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멈춰서 윤방과 몇 마디를 나눈 뒤,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린 뒤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흔한 광경입니까?”

이원익에게 물었다. 노신으로서 몇 번이고 영은문 아래에 섰을 그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저처럼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번 사신이 특별하게 예법을 잘 배워서 극진한 모습을 보인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 역시 그러하옵니다.”

한참을 걸어온 풍가회가 소매를 모았다.

“소관 풍가회가 조선 국왕 전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풍가회는 은빛 새치가 많은 사람이었다. 일단 명나라의 사신인 만큼, 황제의 대리인을 예우하는 의미로 함께 허리 숙였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중원의 사신들은 대개 조선에 도움은커녕 해악만 끼쳐왔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풍가회가 유난한 모습을 보인들 색안경부터 낄 수밖에 없었다.

“객년客年 가을에 두 태감이 방문했는데, 이렇게 명년 정월에 사신이 재차 방문하니 놀랍고 당혹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사정을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양국의 우애가 나날이 돈독해지고 의리는 지극해지니, 가까운 이웃이 자주 내왕하는 것처럼 방문하였을 뿐인데 특별한 연유야 있겠습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지당한 말입니다.”

모화관과 함께 이광정을 소개했다.

그간 병조판서를 지냈던 김신국과 관직이 바뀐 이광정이다. 군축의 일관성은 여전해서 부임과 함께 훈련도감 감원에 착수했다. 북방군이 존재하므로 무방한 일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짧은 마중에 이어 이광정이 접반사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나서자, 풍가회는 작별하고서 선선히 안내를 쫓았다.

멀어지는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말했다.

“아조와 명나라가 긴말한 관계를 맺은 건 맞지만, 사신의 말처럼 이웃집 내왕하듯 시유조차 없이 사람이 오갈 사이는 절대로 아니지요. 정반대로 해석하는 게 옳겠습니다.”

이원익이 지당하다는 듯 끄덕였다.

“과연 얼마나 막중한 요구를 하러 왔을지 우려스러울 따름이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우려는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풍가회는 하마연마저 사양하고서, 사모 위에 눈송이 몇 점 얹은 채로 시립한 신하들 사이에 섰다.

딴에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는지 그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입이 열렸다.

“예로부터 대명과 조선은 부자父子 같은 나라인데, 노아합적이 발호한 지 오래인데 토멸하지 못하여 요동은 적의 소굴로 전락하고 백성들은 무산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뻔한 역사를 새삼스럽게 상기시켰다. 이어질 말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근자에 귀국이 분전하여서 적의 정예한 병사들을 쓸어 없애니, 환란을 앞두고 한밤중 같았던 천하에 여명이 비치는 듯하였습니다.”

과장이 심했다.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지는 징조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명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산해관 너머에서 영원성을 수축하였으며 일대인 금주, 송산, 행산, 소릉하에도 성보를 신설했습니다. 이에 적들은 소관이 귀국에 당도하는 순간까지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종합하자면 세력의 우열이 반전되었다는 소리였다. 이게 다 후금의 기세가 꺾인 증거가 아니겠냐는 의미였으니까.

사실과는 크게 다른 자신감이었다.

당장 후금이 영원성 수축 등에도 대대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 건 내부 수습으로 바쁘기 때문이다.

요동의 한족들을 지배하고 흡수하기 위해 수도를 옮기고, 변발과 호복의 문화를 강요했다.

더욱 비대해진 세력으로 위태로워진 기존의 제도를 정비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자신 사후 후금의 후계 체제도 마련했다.

그렇게 내부를 추스른 누르하치는 산해관을 넘고자 군사를 모으게 된다. 해당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원은 끝내 후금의 손에 떨어진다.

당장 적이 주춤한다고 저들의 몰락을 예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풍가회는 자신했다.

“이번에 다시금 병마를 정비하여 함께 강 너머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노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친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