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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0화 (120/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0화

내게도 소싯적이라고 부를만한 좋은 시절이 있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로 인해 이제는 과거다 되어버린 시기다.

그때 세뇌 수준으로 들었던 한 진통제 광고는 효험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통증으로 두통과 치통, 생리통을 꼽았다.

지금 나는 그 약을 한 통 다 털어넣어도 두통이 가시지 않을 듯했다.

“전하께서 응해주신다면, 대방大防에서도 군사를 내어 함께 노추를 정벌하고자 하옵니다.”

풍가회가 말했다.

과연 조칙 없이 빈손으로 떨레떨레 찾아올 만했다.

섣불리 황명으로 나의 충성심을 시험했다간 불충할 정도로 실리적인 내가 응하지 않을 가능성을 점쳤겠지.

그것이 실현된다면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고 양국의 관계는 매우 껄그러워지며, 명나라는 후금을 견제할 강력한 수단을 잃게 된다.

‘딱히 특별한 조심성은 아니지. 광해군 때도 연합군은 조칙이 아니라 지방 관리가 보낸 자문에서 시작했으니까.’

미리 의향을 떠볼 수밖에 없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표면적인 충성을 견지하려는 나라도, 황명을 빙자해 귀중한 군사들을 차출하려 들었다간 ‘외람되오나, 奀이나 까시길 바라옵니다’라는 대답만을 돌려줄 수밖에 없으니까.

후금이라는 호랑이가 잠시 얌전한 것은 그새 세월을 잔뜩 맞고 이빨이 빠져서가 아니다.

단지 몸을 추스르기 위해 단잠에 빠졌을 뿐이지.

그런데 연합군을 일으켜 정면으로 후금을 치자는 건 수염을 뽑는 정도가 아니라, 아구창을 갈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구창 때리는 것 자체는 가능하겠지. 내치에 집중한 와중에 양면 전선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하긴 힘들 테니까. 하지만 대응이 시작되면 호랑이 아구창을 날린 손에다가, 팔까지 사라질 거다.’

어쩌면 조선 정도는 몸뚱어리까지 으적으적 씹어먹힐지도 모른다.

양람기가 박살나가도 누르하치가 금괴, 포로까지 얹어 소동을 무마한 이유는 보복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나라를 앞두고 장창방진을 무리해서 파훼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조선이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면, 누르하치도 그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명나라는 금성탕지에 난공불락인 영원성, 산해관 뒤에 숨어 있잖아? 다시 전쟁이 터지면 누르하치가 어디부터 정리하려 들지 너부 뻔한데 또 연합군을 일으키자?’

조선의 명운을 판돈 삼아 도박 한 번 해보자는 소리였다.

그러니 만약 조칙이 내려왔다면, 감수성 풍부한 천계제는 정말로 奀이나 까시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독사 같은 제안을 천계제가 직접 고안한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누구 빡대가리에서 뇌수와 함께 흘러나온 발상인지 떠볼까?’

풍가회도 염치가 없지는 않은지,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내가 그의 전언을 듣자마자 든 생각이라면 풍가회 역시 사행을 오는 동안 몇 번이고 검토했을 테니, 참전 요청이 망발과 마찬가지라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영은문에 이르렀을 때도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렸겠지.

“사신께서는 조칙을 가져오지 아니하고 단지 전언으로서 대방의 뜻을 밝혔는데, 그렇다면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대방의 신하 중 누군가가 제의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지요.”

단언했다.

“어느 분의 의견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풍가회는 전언의 출처를 추궁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연합군 결성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는데 이쪽에서는 출처를 모른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황명도 아니었거니와, 광해군 때처럼 특정한 관부에서 발송한 조문조차 없이 몸만 딸랑 와서는 너무 큰 사안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풍가회가 철판을 깔기는 힘들었는지, 난처한 얼굴 그대로 조심스럽게 고했다.

“병부상서 왕재진王在晉입니다.”

“……음.”

요동을 잃은 뒤 명나라의 대후금 책략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원숭환과 손승종孫承宗으로 대표되는 접경지 개척 및 강화를 통한 능동적인 방어다. 영원성 수축이 그 일환이었다.

다른 쪽은 왕재진과 고제高第 등이 대표하는 수동적인 방어 전략이다.

요동에 잔존 및 진출한 거점과 병력을 전부 난공불락인 산해관까지 물려 방어력을 압축,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어느 쪽이 명백하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어쨌거나 원숭환은 자신의 능력을 근거로 증명했고, 산해관 역시 오삼계吳三桂가 성문을 열고 청나라에 투항하기 전까지는 난공불락이 맞았으니까.’

다만 풍가회의 발언에서 의외인 것은, 구실만 좋은 2차 대후금 조명연합군의 발의자가 소극적인 방어를 주장했던 왕재진이라는 점이었다.

‘학사 출신이라 병법에는 거의 자질이 없었다지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는 소극적인 주장을 했지만, 이번에는 뭐가 풀리는 것처럼 보이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건가?’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원 역사에서는 가만히 처박혀 있었던 왕재진이 갑자기 미친소리를 자랑스럽게 할 이유가 없었다.

안목이 없으니 망국의 기로를 각오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요동 땅에 미련을 둔다.

희대의 명장인 원숭환이 발의했어도 따르지 못할 계획이거늘, 사태 파악조차 안 되는 학사 나부랭이가 눈이 돌아가서 내놓은 계획이라면 더더욱 따를 수 없었다.

“왕 대인이라면 평소 산해관 밖에 대해 주장하던 바를 알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이한 대계를 주장하시니 많이 놀랍습니다.”

풍가회도 내심 동감했는지, 내색은 않고 침묵으로 긍정했다.

“조선은 이미 폐조 때 재조지은을 위하여 망국마저 각오하고서 군사를 내어 전쟁에 보냈으나, 조금의 공효도 거두지 못하고 귀한 인명만 모조리 잃어버려 변방을 사수하는 데만 급급한 사정입니다.”

이어진 말에 풍가회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왕재진이 갑자기 돌아서 미친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미약한 조선군이 무적으로 여겨지던 후금의 정예를 몰살했다.

“나의 말이 엄살처럼 들린다는 건 압니다.”

“오해이옵니다!”

풍가회가 급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시립한 신하들 역시 알 터였다.

“현재 조선의 실질적인 방위를 전담한 정예한 병사는 정원이 고작 2만 명을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나 재원이 한계인 탓입니다.”

대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해졌는데 무능한 군주가 연이어 재위했다.

선조는 백성들이 신음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싸지른 똥을 대신 치워준 세자에게 열등감 드러내기 급급했으며, 그렇게 마음에 병을 얻은 광해군은 궁궐 단위의 강박장애를 보이며 민간을 수탈하고 국고를 허비했다.

두 사람이 국가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동안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때 왕위를 찬탈한 놈이 인조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역사는 반어적인 의미로 정점을 찍었지만, 대신 내가 수습을 떠안게 되어서 지금까지 왔다.

즉위와 함께 분호조를 혁파하고, 조도사를 해체하며, 세법과 병역법을 개정해 범람하던 잡세와 뇌물을 단속했으며, 서궐을 존치하여 불필요한 역사를 생략하고 사신들의 접대비용을 절약했다.

그러나 그만큼 국가의 치유와 유지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해야 했다.

북방군을 먹이고 무장시킬 비용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선혜법 시행을 앞두고서 육로는 저절로 닦이지 않았으며 부두는 스스로 설치되지 못했다.

분명 허리띠를 졸라매고 분별없이 절약했는데도 예산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수사의 사재를 들였고 종친까지 털어 보탰다.

‘그래도 예산은 여전히 먹고 죽을래도 없는 상황이다…….’

돈만 썩어났어도 북방군 정원 숫자에 0 하나 더 붙이고 세계정복 시작했지.

“고작 2만의 군사로 의주부터 경흥까지 삼천 리에 달하는 변방을 수비하는 지경이니 어찌 급급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을 험난한 호지胡地로 내몬다면 무엇으로 변방을 지키겠습니까.”

“…….”

“가볍게 논할 일이 아닙니다. 중신들과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니, 사신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못 다 푼 여독을 다스리길 바랍니다.”

이미 대답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조명연합군이라는 막대한 의제를 들은 자리에서 곧바로 확답할 수는 없었다.

형식적으로라도 고민하는 척은 해야지.

풍가회는 딱 그 정도의 성의에 착잡한 얼굴로 읍했다.

“조선 국왕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

풍가회가 어전을 떠나고, 신하들은 뒤늦게 무의미한 찬반을 펼쳤다.

놀라운 점은 그 자체였다.

북방군의 전공에 고무된 건 바다 건너의 몇몇 멍청이들만은 아니라는 듯, 여기에도 멍청이가 있다며 힘써 증명하는 자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어전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 귀로 흘렸다. 경청할 필요가 없는 논의였다.

그리고 제신이 눈치보기 시작했을 즈음.

입을 열었다.

“풍가회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였지만, 실무를 맡은 병조좌시랑을 사신으로 파견한 점을 보아 명나라에서는 이 같잖은 발상을 제법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

의견을 재차 확고하게 표명함으로써 무의미한 찬반 토론을 일축했다.

“그렇다면 나와 경들이 논의해야 할 것은 명나라의 과욕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 입니다.”

졸지에, 진지하게 하던 말이 같잖은 소리로 전락한 병조참판 이귀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섰다.

“대명과 후금의 기세가 예전과 다르고, 아조의 군사 역시 기개가 예년과 다른데 어째서 함께 군사를 내어 몰아치자는 것을 하찮은 소리로 치부하십니까?”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일축에 기분이 상해 대드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홍태주에게 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종묘를 구원한 대명과의 은의는 저버리시면서, 오랑캐 추장의 일개 자식과는 신의를 지키고자 하시옵니까?”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 은의나 신의가 거론되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망국으로 치달을 가장 빠른 지름길이요.”

“문명을 표방하는 국가가 되어 도리에 힘쓰지 않는다면 짐승의 나라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옵니까?!”

“망하지 않아서 무고한 백성들을 오랑캐의 노예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것.”

“…….”

이귀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나의 말에 반박할 고루한 소리들이 턱끝까지 차올랐겠지만, 여론이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왕과 끝장을 보겠다는 건 무식한 처사다.

더군다나 백성들 역시 전쟁이라면 학을 뗀다.

임란 때 고생한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 그들의 증언이 갓 성인이 된 후세에도 생생하게 전해진 마당이다.

그런데 인간의 도리가 어떻니,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금수나 마찬가지니 하는 고루한 소리를 백날 지껄인들 백성들이 호응할 리 없었다.

‘자꾸 개전 타령하면 밤길에 누가 대가리 깨버릴 수도 있다니까?’

아무리 이귀가 망신을 당하면서도 제 할 말 하는 사람이라지만 요즘에는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막상 망신만 당하고서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화제를 다시 본론으로 전환했다.

“경들 중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볼 사람이 없습니까? 내가 이미 밑밥까지 깔아두었는데 말입니다.”

풍가회에게 연합군 거절의 사유로 재원의 부족을 들었다.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명나라가 황당무계한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만큼 지원금을 타낼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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