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21화
가장 먼저 머리가 돌아간 사람은 공조판서 김류였다.
‘전하께서 사신을 마주할 때부터 이미 안배를 해놓았구나. 자연스러워서 의도가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준천사업의 성공으로 열의와 기세가 오른 김류다. 왕의 저의를 알아채기 무섭게 어좌를 향해서 아뢨다.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경이라면 믿을 만하지요.”
왕은 무심하게 응했으나, 김류는 무심함 너머로 자신을 향한 기대를 읽어냈다.
김류의 생각처럼 개인을 향한 신뢰는 아니었다.
어전에서 이귀가 꽉 막한 꼰대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김류는 소인배를 대표했다.
이익에 관해서라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추구하는 인간성을 가졌다. 그래서 조명연합군을 진지하게 구상하는 명나라의 사신을 압박해 이익을 받아내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왕이 김류에게 기대하는 바였다.
“공조판서가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제조를 맡아주세요. 그대라면, 나의 의향을 실현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전하께서 이토록 과분한 신뢰를 보여주시는데 어떻게 부응하지 않겠사옵니까. 진력하여 받잡겠사옵니다.”
김류가 자신감을 비치는 와중에도, 어전의 몇몇 사람은 돌아가는 의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낯을 지었다.
회의가 파하는대로 김류를 찾아와 왕의 의중을 물어볼 게 뻔한 모습들이었다.
김류는 그런 광경에 진한 우월감을 느꼈다.
자신과 비하면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을 제신이 사소한 직무에 목을 매는 동안, 가장 고난한 임무를 맡았다.
무려 대명을 기만하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은자를 갈취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흔치 않게 기쁜 판단력의 부재였다.
* * *
회의가 파한 뒤.
김류는 과연 몰려드는 중신들에게 ‘매우 중차대한 일이다’ 하고서 유난만 떤 뒤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괄목할 성과를 냈을 때 제신들이 놀라기를 바라서였다.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이 개요를 알게 되어 사신의 귀에까지 전해지는 것을 방지할 목적도 있었다.
“김 대인…….”
사신 숙소에 이르러 방문 소식을 알리자 풍가회가 곧장 나와 맞아주었다.
바깥은 여전히 눈발이 휘날리는 중이었다. 그 아래에서 퇴궁 이래 사신 숙소로 전용 중인 남별궁南別宮까지 걸어온 김류의 모습은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대면해 온 사이라면 모를까, 거의 초대면인 풍가회는 사모 정수리와 양 어깨에 눈송이 조금 받아서 온 김류의 모습을 실체로 받아들이고도 남았다.
“풍 대인.”
김류는 코끝이 들썩일 정도로 좋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위로도 한 점 떨어진 눈송이가 녹아내리자, 풍가회는 중요한 손님을 밖에 세워둔 것을 자각하고서 물러났다.
“안으로 듭시지요.”
김류는 여전한 미소로 안내를 받았다. 사신 숙소라지만 조선의 관리가 조선의 별궁을 방문했는데 외국인에게 안내를 받으려니 묘한 기분이기는 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붕 아래 대청으로 들어온 김류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하나를 꿰어찼다.
그 모습에 풍가회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피차 녹을 받아먹은 지 오래된 입장이라, 불필요한 절차는 기껍게 생략됐다.
김류가 말했다.
“망령한 발언이지만, 사신께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양해를 구하는 말에 망령이 전제되는 건 감히 신하된 신분으로 ‘전하를 대신하여’ 사과했기 때문이다.
직접 거론되지 않고 생략된 건 입에 담을만한 발언이 아닌 탓이다. 다만 문맥에만 어렴풋하게 녹여두었다.
풍가회는 곧장 의미를 읽어내고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아닙니다. 망령되기로는 이 사람이 더하였지요. 불호령이 떨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신께서는 중임을 많아 먼 폐방까지 직접 행차해 주셨는데…….”
김류는 다 이해하고 다 공감한다는 듯이 풍가회를 위로했다.
풍가회가 미심쩍어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김류는 이게 다 진심이라는 듯,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사신께서 근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소관 역시 사신과 같은 근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사소한 의견 차이로, 자칫 대적을 마주한 채로 양방의 의리가 손상된다면 저 사특한 노아합적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전하께서도 이를 모르지 않으십니다. 단지 폐방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거병의 부담이 클 뿐입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미 어전에서 들었던 풍가회다.
김류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건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풍가회는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대인께서는 방법이 있으십니까? 사소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이어도 좋으니 기탄없이 가르쳐주시지요.”
풍가회 본인이 조명연합군을 황망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조정 백관의 기대를 받으며 파견된 몸이었다. 어떻게든 성과를 가져가야 했다.
김류는 그것을 살살 긁어대다가도, 때로는 직설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다 풍가회가 부담스러워할 때면 도리어 짜증을 냈다.
양국 우호를 위해 방문한 순진한 식자의 연기를 위해서였다. 김류는 이게 생각보다 재밌다고 느꼈다.
김류가 남별관에서 풍가회를 구워삶는 모습은, 만약 왕이 보았다면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비에게 찾아가 김류가 ‘멍에駕를 머리首에 씌움拏으로써以 훔친다偸’는 의미로 가수라이투駕首拏以偸를 보았다고 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왕은 다른 용무로 바빴다.
* * *
“세자도 사신이 방문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예, 아바마마.”
미래로 치자면 이제 중학생 1학년으로 올라가는 세자다. 나는 여전히 왜 열네 살짜리가 두 발로 뺀질나게 돌아다닐 수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두 팔로 땅을 짚고서 꾸꾸까까 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데…….
벌써 인연을 원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래, 이제는 무릎에 올려놓기도 무겁다.’
나는 한쪽 무릎을 떨쳐 자연스럽게 세자를 용상의 옆자리로 밀어냈다.
“세자야.”
“……예.”
분위기의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걸까.
“혹시 세자빈이 있었으면 하느냐?”
세자는 헉, 숨을 삼키더니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영락없이 속마음을 간파당한 사람의 모습이다.
“…….”
분명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심이 막상 현실이 되자 착잡했다.
그러나 놀란 아들의 앞에서 자칫 실망감으로 비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지라 서둘러 마음을 추슬렀다.
그게 생각만큼 잘 안 되고 있다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자가 보는 앞에서 못난 이들이 늙은 아비 버리고 처지 찾아 떠나간다며 통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은 있느냐?”
“……없사옵니다.”
세자는 여전히 민망한지 우물쭈물 답했다.
그동안 공부와 후계자 교육으로 바빴던 세자다. 더군다나 구중궁궐에서 살아가는 만큼, 애틋한 인연이 생기기란 쉽지 않겠지.
그래도 혹 서궐에서 일하는 궁녀 중에라도 마음에 든 사람이 있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일일이 편집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되겠지만…….’
팔자와 인연이 꼬이면 사람이 얼마나 곤란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산 증인이 바로 나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세자에게는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꼰대같은 당부도 생략할 수가 없었다.
“세자빈은 작게는 너와 일평생을 함께 할 인연이고, 크게는 왕실의 맏며느리로 너의 가정을 다스려주며, 장차는 만백성의 어머니이자 모친 세파와 맞설 너를 뒤에서 받쳐줄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될 사람이다.”
세자가 명심했다는 듯 끄덕였다. 낯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 아비는 세자가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만약 하나의 소원만을 고를 수 있다면 그렇게 빌 것이야.”
“……망극하옵니다. 아바마마.”
“음. 아비가 정명공주의 전례를 만들었으니 세자 역시 직접 배필을 찾고자 한다면 만류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전에 아비가 알아봐 둔 규슈를 만나주었으면 좋겠구나.”
세자는 다시금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동안 지켜봐 온 모습 중, 가장 경악스러운 표정이었다.
“……싫으냐?”
“아, 아니옵니다! 다만 아바마마께서 미리 세자빈이 될 사람을 염두에 두셨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세자의 일이면서도 나라의 일이기도 하니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지. 그래, 세자의 의향은 어떻느냐?”
세자는 가장 놀란 표정을 보여준 데 이어서, 가장 붉게 물든 뺨을 보여주었다.
“아바마마께서 세자빈이 될 사람을 이미 알아봐 주셨는데, 응당 만나보아야지 않겠사옵니까.”
“눈치 보여서 하는 말은 아니고?”
“아니옵니다!”
“정말?”
“정말이옵니다!”
“……진짜로?”
“진심이옵니다!”
“그래, 세자가 응하겠다니 자리를 마련해 보마.”
“……예.”
세자는 이 모든 게 낯부끄러웠던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답했다.
매일 하는 행사도 아니고 평생에 한 번 있는 일인데 민망해하기는.
머리 조금 굵어졌다고 아비의 품을 벗어나는 모습에 꽤 괘씸하였다마는, 이제 보니 애가 여전히 애인가보다 싶었다.
* * *
세자와 약속을 잡아두긴 했지만 곧바로 자리를 만들지는 못했다.
아직 명나라의 사신이 경중京中에 있었다. 흉흉하게 조명연합군 따위가 거론되는 와중에 세자빈 후보가 입궐하였다는 소식이 사신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되지도 않을 거, 그냥 은자나 토해내고 빨리 가지…….’
아무튼 사신이란 것들은 사람 귀찮게 만드는 데 조예가 있었다.
명나라고 후금이고 사신을 반대로 난사해 버려야 정신을 차리려는 건지.
“전하.”
김류였다.
“말씀하세요.”
“지난 며칠간 남별궁을 오가며 사신과 심도 높은 논의를 거친 결과, 사신이 아조의 군사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사행의 여비를 쾌척하겠다는 뜻을 밝혔사옵니다.”
김류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좌우로 시립한 신하들에 최근 세자에게서 자주 보았던 표정을 지었다.
“경이 자신있게 발언하는 걸 보아, 사신이 가져온 여비가 작지 않은 모양입니다.”
“예. 은자 일만 냥. 전부 아조에 쾌척하였사옵니다.”
제신들 사이로 허억, 하고 숨을 삼키는 사람이 있었다.
김류는 더욱 기고만장해져 턱이 올라갔다.
은 1냥이면, 시대와 시세에 따라 달라지지만 보통 쌀 두 섬과 교환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한 가정이 충분히 한 해를 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러니 사신이 소위 ‘여비’랍시고 가져온 은자 일만 냥이란 정확히는 조명연합군의 실현을 위해 명나라 조정에서 챙겨준 공작금이라 봐야 했다.
그런데 김류는 어떠한 기예를 선보인 것인지, 사신에게서 공작금을 모조리 빼내어 국고에 충당한 것이다.
‘뭐지? 가스라이팅이라도 했나?’
추궁에 가까운 신하들의 의문에 김류가 기꺼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