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22화
콧대가 잔뜩 올라간 김류는 어울리지 않는 유려한 손짓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평소 그의 인물상을 잘 아는 제신 다수가 눈꼴시리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건 그 같은 표정을 자주 마주하는 초피갖옷의 우의정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은자 1만 냥을 털어먹었으면 좀 건방져져도 되지.’
왕민정과 호양보를 최소한의 예법으로 대접했음에도 오천 냥의 은자가 소모됐다.
그 비용의 두 배를 벌었다고 생각하면, 꼴사나운 교만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신하들이야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아니니까 정색하는 거고.
김류가 자신있게 말했다.
“사신이 가져온 여비는, 제공도 액수를 들어 짐작했겠으나 아조의 관리들을 매수하여 거짓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뇌물입니다.”
탄식이 곳곳에서 퍼졌다.
어전에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그저 의례적인 표현이 아닌, 진심으로 부자父子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명나라가 조선의 여론을 호도하고자 했다는 말은, 충격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사람은 사신에게 직설하였소. 조선의 신하들 중 함부로 기군망상欺君罔上을 범할 자는 없으니, 어설픈 수작으로 화근만 만들 바에야 차라리 쾌척하여 환심을 사는 게 낫다고 말이외다!”
자존심 강한 신하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했다. 김류와 묘한 관계에 있는 병조참판 이귀의 반응은 유난했다.
“사신의 간사한 잔꾀를 파훼하고 한낱 뇌물로 무산한 거금을 공금에 보탰으니, 공판 대감의 공이 크외다.”
“하하.”
김류는 굳이 겸양할 생각은 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내가 일렀다.
“공판의 설명은 단순했지만, 지난 며칠 공판이 남별궁을 자주 드나든 걸 보아 실제로 들인 공력은 남달랐을 것입니다.”
과연 풍가회가 공작금의 존재를 무턱대고 이실직고했을까.
“공판은 사신의 떳떳하지 못한 구석을 밝혀내었고, 나아가 병조참판의 말처럼 뇌물로 무산할 은자를 국고에 보태는 데 설득했으니 공로가 절대로 작지 않습니다.”
김류는 망극하다는 듯 어좌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나마 얌전해진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 보여준 기고만장한 모습은 과시보다 보상심리에 가까웠다고.
자신이 한 고생을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면서도, 자존심 탓에 아쉬운 소리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교만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유치하다면 유치한 셈이다만.’
판서가 되어서 내가 고생 많았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유치한 행동이겠지.
하지만 고생을 인정받고 싶은 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뭐라고 할만한 건 아니다.
“사신의 요구는 없었습니까?”
“그러하옵니다. 순전히 아조가 거병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판단해주기를 바라고서 쾌척한 것이옵니다.”
김류의 대답에 영의정 이원익이 대신 입을 열어주었다.
“만약 사신이 거금을 바치고도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귀국한다면 본국에서 책망받을뿐더러, 명나라에서도 아조에 대한 인상이 나빠지지 않겠는가?”
덕분에 질문의 의도를 설명하는 일은 덜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이원익의 발언을 긍정한 뒤, 짧게 덧붙였다.
“사신이 귀국하는 길에 근심이 없어야 합니다.”
짧은 성과라도 들려주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번에도 기약할 수 있다.
‘모문룡이 명나라에서 해마다 받은 지원금이 얼마인데…….’
기실 은화 일만 냥은 그리 대단한 액수도 아니었다. 탐욕스러운 관리 몇 놈을 헤벌쭉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국가적인 단위에서는 그리 결정적인 거금이 아니다.
만약 조선이 원 역사의 동강진 이상으로 명나라에게 지원받을 명분과 필요성을 갖춘다면 심심치 않게 예산을 벌충할 수 있을 터였다.
셈이 빠른 좌의정 박홍구가 건의했다.
“대방이 바라는 건 후금과 맞설 한 수이옵니다. 그러나 거병을 약속하게 되면 도리어 본말전도인 셈인데, 소망과 무관하여서는 의미가 없으니 절충하여 베품이 지당합니다.”
“염두에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북방군의 무장으로 사용하는 장창을 몇 벌 딸려보냄이 어떻겠사옵니까.”
이에 전 병조판서를 지냈던 호조판서 김신국이 치고나섰다.
“아니될 말입니다. 살수들을 장창으로 무장하는 건 후금의 철기들을 대항하기 위한 비책인데, 고작 일만 냥의 은자와 교환하는 건 수혜가 너무 큽니다.”
“그러나, 아조의 군사가 장창으로 무장하였다는 건 후금도 알고 명나라도 짐작은 하지 않겠는가?”
북방군이 긴장 상황에서 임시로 주둔하였던 의주부는 물론, 현재 주둔한 안주부에서도 십중팔구는 알고 있을 소식이었다.
그러니 사행이 오가는 동안 사신이 수행원을 시켜 수소문한다면 신병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북방군의 장창은 왜창이 원형이지.’
그리고 명나라는 임진년에 대규모로 참전했다. 회수한 전리품에 왜창이 다수 있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복제는 식은죽 먹기였다.
박홍구도 마침 그 점을 지적했다.
“의주에서 대첩을 거둔 비결이 장창이라고는 하지만, 장창 자체는 특별하지 않소이다.”
“으음.”
“그러니 일전의 사신에게 내어준 아민과 자송합의 무구처럼 밑지지는 않고 내색하기에는 좋으니 이보다 좋은 성의가 어디 있겠소이까?”
중신들이 긍정했다.
장창 한 줌 쥐어주어 은자 일만 냥의 셈을 치르고 더 많은 지원금까지 노릴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거래였다.
그러한 점을, 김신국은 재정을 책임지는 판서의 본분으로 간과할 수 없었는지 더 반대하지 않았다.
다른 이견은 없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의정의 방법이 좋겠습니다. 공조판서?”
“예, 전하.”
“경이 사신의 마음을 얻은 듯하니, 그대가 조정의 결정을 잘 전해주세요.”
장창의 공여가 얼마나 대단한 호의인지 사신에게 잘 새겨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명나라의 중신들을 상대로 똑같이 하지.
“받들겠사옵니다.”
* * *
며칠 뒤.
풍가회는 귀로를 앞두고 북방군에서 급하게 공수한 장창 한아름을 떠안았다.
그동안 김류가 사신을 얼마나 잘 구슬려놓았는지, 풍가회는 공작금을 모두 토해내고도 연신 희희낙락했다.
장창을 진심으로 조선군의 대후금 최종병기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전하께서 소관의 편의를 봐주신 덕에 편한 마음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사신께서 이미 조선을 위해 사행의 여비를 내어주셨는데 이 정도도 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오히려 미리 챙겨드리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부끄럽다니요. 과한 말씀이십니다.”
“사신께서 폐방을 위하여 먼저 대국 대신의 용모를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나는 옹졸한 마음에 먼저 도움 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풍가회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여비를 넉넉하게 가져오고도 먼저 베풀지 못한 소관 역시 부끄러운 지경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거두어주십시오.”
서로 금칠하고 추켜세워주는 시간을 잠시 가진 뒤 풍가회는 나와 신하들의 배웅을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사신단의 규모가 작았고 따로 예물을 챙겨주지 않았으므로 사행은 금세 인파 너머로 사라졌다.
“……갔네.”
“예. 갔사옵니다.”
이원익이 짧게 답했다.
“명나라가 장창의 효용만 믿고 단독 원정을 일으키지는 않겠지요?”
“아직은 명나라가 거북이처럼 수비의 형세를 취하고 있으니, 장창을 얻었다고 하여 아조의 거병조차 없이 단독으로 후금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병부상서의 판단력이 조금 걱정되는군요.”
뭔놈의 조명연합군 시즌 2란 말이냐.
“무턱대고 군사를 일으켰다간 낭패를 면치 못할 터인데…….”
병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교범이다.
척계광의 절강병법에도 장창은 존재한다. 양식은 다소 상이할지 몰라도 장창 그 자체라는 점은 같을 텐데, 교범이 크게 다르다.
척계광은 장창을 대기병 병기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원거리에서 적의 보병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기병 상대로는 휘둘렀다가 맥없이 부러지고 말 뿐이라며 대기병 용도로는 오히려 저평가했다.
‘그런 교범으로는 말이지, 전 군대를 장창으로 무장해도 후금군 철기를 상대할 수 없다고.’
그리고 설령 교범까지 알려주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후금의 철기가 장창에 들이박을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장창으로 굳건하게 대기병 방진을 취하더라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북방군이 과반의 병력을 사수와 포수로 편제하고서 소홍이포까지 갖춘 게 아니다.
‘게다가 후금군은 이미 장창방진을 상대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후금군이 바보와 머저리들의 떼거리가 아닌 이상 방진의 파훼법을 연구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명나라 조정도 마찬가지……, 겠지?
* * *
명나라의 무운을 적당히 빌어주고서 해산한 다음.
나는 곧바로 한 사람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내가 있는 경운궁에는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석어당을 방문했다.
세자빈 간택의 내막을 전해들은 대비는 놀라워하다가, 금세 주상이라면 그래 그러고도 남지, 하는 느낌으로 반응했다.
“이유가 있다지만, 궁궐에 적을 두지 않은 여인을 불러들인 건 주상이 최초일 거요.”
“다 세자를 위해서입니다.”
“……하기야, 세자를 위해서 신궁新宮을 그대로 들어다 내어준 전하이니 무슨 짓인들 못 하겠소?”
“간만에 옳은 말씀 해주십니다.”
“…….”
대비는 질린 얼굴을 하다가, 금세 쯧 하고 혀를 찼다.
“대비께서도 피차일반 아니십니까? 저번에 종친들이 거느리는 궁방토 빼앗았을 때 대가리 후려치고픈 생각 많이 하셨을 텐데요.”
정명공주가 받아간 궁방토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지.
“흥, 잘 아시는구려.”
“제가 또 대비마마 전문가 아닙니까?”
“그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아신다는 주상께서 이러니 더욱 밉상이구려.”
“제가 또 원래 한 밉상 하지요.”
“……쯧.”
대비는 어울려주는 것도 지친다는 듯, 무릎에 얹어두었던 꼬까옷에 다시 집중했다.
“비단이 두꺼운 걸 보니 겨울옷인가 봅니다.”
“그렇소.”
“벌써 한 바퀴 도셨습니까?”
“한 바퀴라니.”
대비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답했다.
“여름에는 겨울옷을 짓고 계셨잖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똑같이 겨울용 옷을 짓고 계시니, 그새 한 해를 돈 게 아닙니까?”
그제야 대비는 마주보고는 훗, 코웃음을 쳤다.
“틀렸소.”
“……설마.”
“두 바퀴 째요.”
어쩐지 옷이 많이 크더라.
“두 해나 미리 앞서서 옷을 지었다간, 막상 그때가 되었을 때 안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상관없소.”
“……그래도 대비마마께서 친히 지어주시는 옷인데 상관없다니요.”
많이 아깝지.
“공주가 둘째를 회임했다고 하오.”
아.
“옷이 조금 작거나 크더라도 다른 손주가 입을 수 있으니 염려치 않소. 그리고 지금 미리 옷을 더 지어두어야, 둘째 손주를 위한 옷도 짓지 않겠소?”
지극한 손주 사랑이었다.
“대비마마의 모습을 보니 저도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지네요.”
“그 정도요?”
대비가 제법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세자나 왕자들이 제가 직접 지은 옷을 입는다면, 제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항상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요.”
“흐음. 주상께서 이 마음을 이해한다니 의외요. 말로만 전문가 타령하는 줄 알았더니.”
“저는, 뭐. 애들 사랑 안 한답니까.”
“사내들은 보통 이런 걸 잘 모르지 싶어서.”
“남녀차별입니다.”
“차별이 아니라 유별하다는 거요. 아무튼, 주상의 마음이 나와 같다니 공감은 하지만, 공무 다망하신 분께서 바늘을 든다면 백관이 다 들고일어날게요. 황상이 안 좋은 전례를 만들었다니까.”
천계제가 목공에 심취해 정무를 도외시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대비가 웃으며 말했다.
“대신 주상 말마따나 후대의 사가들은 유복하게 먹고살 수 있겠구려. 주상의 제사상도 잘 차려주고.”
……후대의 사가들 먹여살리자고 내가 잔소리 들을 수는 없지.
아쉽지만 세자와 왕자들, 나아가 손주들에게 직접 옷을 지어주는 야망은 포기했다.
그리고 대비와 함께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나가며, 두 해 앞선 겨울옷이 차차 완성되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상선이 석어당을 방문했다.
“전하…….”
……올 게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