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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3화 (123/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3화

인조반정과 함께 시작된 두 번째 삶에서 세자와의 관계는, 따지자면 부자父子의 인연에서 앞부분을 가지치기용 대가위로 뭉텅 잘라낸 것이었다.

세자를 비록 심정적으로는 핏덩이처럼 여기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까지 어리지는 않았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다.

미래로 치자면 여전히 어린 나이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일가를 이룰 나이가 맞았다.

그래서 세자를 더욱 어리게만 보는지도 몰랐다.

내게는 세자와 부자의 유대를 형성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갑자기 생긴 아들이다. 그래도 어느샌가 진짜 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지지 못한 순간에 미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전하…….”

최 상선이 들어오는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세자와의 호시절이 다 지나갔다는 아쉬움 때문이리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 상선은 대답과 함께 씨익 웃어 보였다. 그것이 이어질 말을 뻔하게 만들었다.

“처음 대면했을 때는 많이 서먹해하였으나, 조금씩 대화를 나눠보더니 서로 마음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서 금세 화기애애해졌사옵니다.”

그렇겠지.

상선이 들어올 때부터 등줄기가 싸늘해지더니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예지력이다.

세자와 강빈이 이 생에서는 맺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세자가 독립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어휴.”

막상 상선에게서 선고처럼 결과를 언도받으니, 죽음의 5단계에서 마지막에 이른 것처럼 금세 무덤덤해졌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란 게 무섭긴 무섭구나 싶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처진 모습을 보이자, 맞은편에서 대비가 짖궂은 미소를 보였다.

“결과가 나오니 도리어 마음이 놓인 모양이요?”

“……잘 아십니다.”

“자식 떠나보낸 사람이 주상만은 아이니 그렇소. 그래도 주상은 복 받은 편이지. 사내는 혼인한다고 출가외인이 아니잖소?”

“피차일반입니다. 세자야 어차피 서궐에서 동떨어져 사는데.”

이제는 뒷방 늙은이들의 모임, 같은 느낌으로 개명해도 될 경운궁과 서궐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왕이 세자를 보겠다고 매번 거동할 수는 없으니 반대로 세자가 찾아와야 하는데 그것도 일이다.

“세자보다 출가외인인 정명공주가 더 자주 입궐하지 않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구려. 미안하게 되었소.”

“아예 기름을 끼얹고 불까지 지르지 그러십니까.”

“세자가 가정이 생기면 부왕께서 세자 보기가 더욱 힘들어지실 듯하오.”

“와, 진짜로 불을 지르시네…….”

“많이 배운 덕이요.”

대비는 때릴 만큼 때렸고 즐길 만큼 즐겼다는 듯 금세 시선을 바느질로 옮겼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아주.

업보다.

“서궐까지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상선. 이제 나는 여기서 더 상심하지 않게 서둘러 탈출해야겠어요.”

“모시겠사옵니다.”

* * *

세자가 이번에도 하늘이 점지한 운명을 받아들였으므로, 곧장 간택을 시행했다.

형식에 불과하다마는, 이마저도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들이 들고일어날 게 뻔했다. 이래서야 왕가의 혼인이 여염과 무슨 분별이 되겠냐고 말이지.

형식이라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 뭐어.”

직접 마주한 예비 세자빈은, 비운의 여인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하교하시옵소서.”

얌전하게 엎드리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다.

오늘날 보통의 혼인과 달리, 문중의 이해나 딱딱한 절차에 매이지 않고 예비 신랑이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만은 아니겠지.

민간의 혼인이라면 모를까, 왕 앞에서도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정말로 사람이 밝은 게 맞다.

“세자와 잘 어울리겠구나.”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예비 며느리라서 으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예비 세자빈은 세자보다 한 살 많았지만, 이런 자리에서도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숨겨지지 않는다.

반대로 세자는 나이에 비해 내면이 성숙하다.

‘아비에게 인연 찾아달라고 채근도 하고 말이야, 응? 아직도 콩만 한 녀석이 머리 조금 굵어졌다고…….’

살살 잔꾀를 부리는 게 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났다.

내가 늙은이들 데려다가 세자에게 가르친 게 이런 잔꾀니까. 단지 그걸 아비에게 쓸 줄은 몰랐지.

……아무튼, 세자와 예비 세자빈은 마음이 맞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그럼 대조적인 부분은 맞춰주고,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주면 된다. 부부가 함께 성장하는 맛이 있어서 좋을 거다.

‘아니, 그런데 잠깐만. 애비는 팔자가 이중 삼중으로 꼬여서 고생밖에 안 하는데 자식이라는 녀석만 혼자 노났네?’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괘씸했다.

세자가 눈앞에 있었다면 용서없이 진심꿀밤을 먹였으리라.

“중전께서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사람이 보는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는 쉽고, 보지 않는 뒤에서 나쁜 모습을 보이기는 더 쉽다.”

강씨을 예비 세자빈으로 여기고서 하는 당부였다.

형식적인 간택을 시행하기 전, 이미 중전에게도 예비 세자빈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의 일인데 나와 세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중전은 내가 며느릿감을 미리 정해두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다.

전국팔도에 처자가 얼마나 많은데, 개중에서 가장 좋은 며느릿감을 알아볼 생각은 없고 딱 한 사람 반쯤 정해놓은 채로 데려오느냐고 말이다.

‘그것도 옳은 말이지.’

하지만 막상 검증이 끝난 뒤, 중궁도 강씨가 며느릿감으로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세자빈이었던 강씨다. 기본이야 당연히 되어있었다.

중전이 마저 당부했다.

“전하께서는 세자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운궁에서 기거하고 계시지만, 나는 세자와 함께 서궐에서 지내고 있으니 언제든 너의 행동거지를 주시할 수 있다.”

예비 세자빈은 그저 부복하고서 경청할 따름이었다.

“그 점을 간과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중전마마.”

중전의 당부가 매서웠기 때문인지 예비 세자빈의 목소리가 잔뜩 쪼그라들어 있었다. 벌써 왕가에서 무서운 사람을 분별해낸 듯했다.

“중전, 예비 세자빈을 너무 겁주지 맙시다. 믿고 지켜봐주면 알아서 잘할 거예요.”

중전은 이쪽을 매의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헛기침했다.

“하하…….”

나는 멋쩍은 기분을 갈무리하고서 예비 세자빈에게 일렀다.

“부담갖지 말아라. 세자빈의 몸가짐이야 차차 배워나가면 된다.”

“예에.”

그렇게 초간택은 마무리했다.

* * *

재간택은 대비에게도 예비 세자빈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았고, 삼간택은 잘 지내고 있냐는 느낌으로 얼굴만 본 뒤 헤어졌다.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으나, 형식으로나마 절차를 걸치니 공인된 사안으로 거듭났다. 이어서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세자빈 앞에서 예비라는 단어를 떼기 위한 의례를 준비했다.

그리고 큰 행사를 앞둔 채로 간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왔다.

또 한 번 군사들이 북악산을 점거했고, 나들이에 참석한 인원은 이전과 같았다. 다만 여기에 예비 며느리에 예비 사돈인 강석기까지 끼었다.

“과연 신이 이런 자리에 끼어도 될는지…….”

강석기는 왕가의 모임에 한 자리 차지한다는 점이 많이 부담스러웠는지, 잔뜩 찌그러진 상태로 물었다.

“내가 직접 경을 불렀습니다.”

당연히 끼어들어도 되지.

누구 입으로는 출가외인이라던 정명공주와 영안위도 오는데 예비 사돈이라고 못 올까.

“정 부담스러우면 실력을 보여주세요.”

“……실력, 말이옵니까?”

강석기가 당혹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왕가의 모임에 무슨 실력을 보여줄 보여달라는 투다.

아마 속으로는 시문의 실력 정도를 짐작하고 있겠지.

당연히 아니다.

나는 손을 뻗어 누각 저 멀리 바람막을 설치해 놓은 공간을 가리켰다.

“……?”

강석기는 눈으로 내 손가락 끝을 쫓아 저 멀리 쳐다보더니, 금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서 고기 구워오세요.”

화로나 불판은 상선이 마저 세팅해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의외였던 점은, 예비 사돈의 고기 굽는 실력이 제법 괜찮았다는 점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더니 적절한 굽기를 알았다.

그러니 계속 앉혀놓고서 다리에 쥐날 때까지 고기를 굽게 해도 좋았겠지만, 예비 세자빈이 있는 자리에서 사돈을 더 괴롭힐 수는 없는지라 적당한 시점에 내관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돌아온 강석기에게 따로 빼둔 고기를 내어주니 강석기가 손사래치며 말했다.

“소관은 고기를 구우면서 많이 먹었사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비란 족속들이 하는 말은 다 똑같구나.

나야 일전에 북악산에 들렀을 때는 정말로 구우면서 배를 채웠지만, 강석기가 왕실 사람들에게 바칠 고기를 맛보는 것 이상으로 먹지는 않았을 듯했다.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아니면, 고기 굽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이제는 보기도 싫으십니까?”

“아, 아니옵니다…….”

강석기는 재차 사양하지 않고 대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닥을 드러내고서 강석기의 젓가락질도 많이 느려졌을 즈음.

나는 세자와 예비 세자빈, 그리고 강석기를 맞은편에 앉혀두고서 일렀다.

“가례는 지극히 경사스러운 행사로, 장차 종사의 안녕을 맡을 세자와 세자빈이 백년해로의 약조를 맺는 의식이지.”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서 경청했다.

“행사가 가지는 중대한 의미를 살펴본다면 가볍게 가감해서는 아니되겠으나, 나라 역시 기로에 선 만큼 나는 가례에 쓸 물목과 행사의 절차를 단호하게 감하였으면 한다.”

“…….”

“얼마 전에 가례도감에서 필요한 물목의 명단을 올렸다.”

후계자의 혼인이기 때문일까.

정명공주가 하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로 많은 보석과 귀금속, 비단을 요구했다.

“고작 진주만 해도 1,700개나 필요하다더구나.”

이해가 안 되었다. 어디에 쓸 데가 있어서 그리 많은 진주를 달라는 걸까.

“다른 품목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총합하면 어마무시한 예산이었다.”

“…….”

“세자와 예비 세자빈에게는 미안하지만 용인하기 어려운 낭비로 비치더구나. 아무리 한 번 뿐인 세자의 혼례라고 해도 말이다.”

누군가는 왕실의 체면과 직결된 일이니 일부러라도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고 말할 테지.

“나는 부의 과시로는 명예와 존경을 살 수 없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잘 안다.

돈지랄은 잠깐의 경외를 사기에는 쉬울지언정 인간의 품위나 지도자의 소양과는 거리가 멀다.

“하물며 온 세계에 해악을 끼치는 무리와 국경을 마주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

나는 진지한 투를 걷어내고서 세자에게 일렀다.

“혹 이 아비가 원망스럽다면 장례 때는 관에 불만 지르고 끝내거라.”

저승 가는 길에 뜨끈허니 좋겠네.

옆에서 웃음이 터지길래 돌아보니 세자였다.

잘 길러놨더니 최근 호랑이가 되어 나를 물기 시작한 대비였지만, 간만에 교육의 보람을 느꼈다. 수준이 비슷해졌단 말이지.

반대로 세자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 예비 세자빈은 입만 반쯤 벌리고 있었고, 강석기는 아예 벼락이라도 맞은 낯이었다.

“곧 한 가족이 될 텐데 이 정도 농담도 못 하겠느냐?”

나는 특히 더 가까워질 예비 세자빈에게 당부했다.

“많이 익숙해져야 할 거다.”

그러자 예비 세자빈이 정신을 추스르고서 답했다.

“어찌 소녀가 감히 하늘 같은 전하와 희담을 나누겠사옵니까……?”

“그 하늘 같은 내가 허락했으니까. 아니면, 내가 허락하여도 네가 허락하지 못하였으니 희담을 못 나누는 것이냐?”

예비 세자빈이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애써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벌써 적응을 마친 듯했다.

세자도 이에 질 수 없다는 듯이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민망한 말씀 거두어주시옵소서. 소자가 가례의 낭비를 알았다면, 먼저 물품의 감액을 주청드렸을 것이옵니다.”

“그리 말해주니 기쁘구나.”

세자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비 세자빈의 의향은 세자와 다르지 않을 듯해, 나는 다음으로 예비 사돈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금지옥엽을 빼앗아가는 것도 모자라 가례도 부실하게 한다고 불만스럽지는 않으십니까?”

“다, 당치도 않사옵니다!”

강석기가 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화려함을 버리고 사직의 안녕을 취하셨으니, 만세의 모범될 일인데 어찌 사사로운 인연으로 잡스러운 욕심을 부리겠사옵니까?”

“말씀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느껴지는데요.”

“신이 감히 어찌…….”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끝말이 흐려졌다.

딸이 갑자기 세자빈으로 낙점되어 준비도 각오도 다 못한 채 출가외인으로 내어주게 됐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심정이 나도 다르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따지자면 나와 그대는 동병상련이에요. 꼬맹이 같은 게 머리만 굵어져서는 아비의 품에서 달아나는데…….”

세자는 부정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졸지에 뒷방 늙은이가 된 듯하여 기분이 썩 개운치만은 않습니다.”

내내 호들갑만 떨어대던 강석기의 입가에도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그려졌다. 군신이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나와 강석기는 막 독립한 자식들을 둔 아비였다.

이내 강석기가 푸근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신은 멀리서나마 자식의 행복을 빌어주고자 하옵니다.”

음, 예비 사돈이 나보다 더 사람이 되었구만.

난 아직도 세자 정수리에 진심 딱밤을 놔버리고 싶은 충동을 버리지 못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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