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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4화 (124/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4화

당사자들과 사돈댁의 협조에 힘입어 가례는 크게 간소화되었다.

몇몇 신하가 후대의 왕을 의식했는지 뒤늦게 진부한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모든 의식을 마친 뒤, 이제는 예비가 아니게 된 세자빈이 소홍이(애완용 대포) 다음으로 서궐의 식구가 됐다.

강석기가 좋은 모범이 되어주었으므로, 나는 배신자 아들의 정수리에 진심 딱밤을 놔버리고 싶은 마음을 거두고서 아들 부부의 백년해로를 빌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것들아.’

그리고 초봄이 되어 한겨울의 맹추위도 꺾이고 쌀쌀한 한풍만이 끈질기게 남아 기승을 부릴 즈음.

명나라로 보냈던 동지사 겸 사은사 겸 정조사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막대한 예물과 함께 가져온 명나라 내부 소식은 심각하게 예상외였다.

덕분에 중신들이 급하게 소집된 자리에서.

소식의 공유를 마친 직후 영의정 이원익이 난색하고서 말했다.

“명나라가 아무리 신병기를 입수했다고는 하나, 무모한 자신감으로 거병하였으니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옵니다.”

사신단이 가져온 소식이었다.

풍가회에게 장창 한 아름을 안겨주고서 돌려보낼 때만 해도 걱정은 했는데, 금세 안심했다.

명나라 조정에 바보만 있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명나라에는 바보가 많은 듯했다. 아니면 바보들밖에 없거나. 황제부터 정상은 아니니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와아, 두개골이 아찔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무슨 자신감의 발로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출처는 짐작이 된다.

“병부상서가 학사 출신이라 군무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라던데,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느닷없이 조명연합군 시즌2 타령을 할 때부터 뒷목이 서늘했는데 이제는 짜릿할 정도다.

이원익이 마저 분석했다.

“전하, 명나라가 과오를 반복하게 된다면 산해관의 방비가 크게 취약해질 것이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명나라는 망해도 혼자 망하지 않으니, 후금이 중원을 장악한다면 아조의 명운도 풍전등화가 되겠지요.”

이에 병조참판 이귀가 딱딱한 낯으로 나섰다.

“노추의 자식들에게 아조의 기개를 보인지 오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유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아조는 밤송이와 같습니다. 후금이 명나라와 대치하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후금이 명나라를 잡게 되면 얼마든지 느긋하게 공을 들여 아조를 공략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제라도 명나라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는 것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이귀가 것 보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선이 당장 후금에 공격받지 않는 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도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후금이 믿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니옵니까? 적들은 아조가 강을 넘었을 때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옵니다!”

“……후금의 믿음을 깬다면, 후금은 마치 밤송이에 찔린 사람이 황급하게 가시를 떼어내고자 하듯이, 서둘러서 아조를 공격하겠지요.”

이귀는 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쳤다.

“북적은 단지 잠깐의 시운을 타 세력을 얻었을 뿐, 하늘의 뜻이 함께하는 게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난 전쟁에서는 저들이 이겼단 말입니까?”

“폐주가 정치를 못하여 내린 천벌이옵니다.”

“하지만 나는 정치를 잘 하고 있으니, 싸우면 이긴다?”

“……예.”

이놈, 대답이 살짝 늦는데?

아무튼,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 모습에 어쩐지 이 사태를 만들어낸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가 눈앞에 그려졌다.

이귀보다 더한 놈들, 이귀 같은 놈들, 이귀만도 못한 놈들이 제각기 비현실적인 주장을 쏟아내며 서로를 응원했겠지.

자존심이라면 조선보다 훨씬 강할 명나라다.

그런데 조선의 비밀병기까지 얻었으니 무서울 게 무에 있으랴?

사용법이나 교리 같은 사소한 부분들은 상큼하게 넘어가 주는 게 맞다. 대국을 경영하는 분들께서 그런 자잘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면 공무를 못 하지. 아암, 그렇고말고…….

‘돌아버리겠네.’

나는 다시 제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금의 뒤통수를 때리자는 것 외에, 우리가 할만한 대응이 있겠습니까?”

먼저 입을 연 쪽은 좌의정 박홍구였다.

“명나라의 거병이 지극히 무모하기는 하나, 성패를 떠나 후금에 타격을 입힐 가능성만을 논하자면 전무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좌상이 말하는 타격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군요.”

“후금은 험난한 호지胡地에서 나와 요동을 수도로 삼았사옵니다. 그러나 요동 일대에는 신민들이 여전히 충성하고 있으니, 명군이 깊게 진출에 성공한다면 후금을 흔들 수 있사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만, 그 부분에서 아조가 개입할 여지가 있습니까?”

“신이 아뢴 바를 뒤집어 말하자면, 명군이 깊게 진출하지 못할 경우 후금에 타격을 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옵니다.”

“그렇지요.”

나의 긍정에 박홍구가 입꼬리를 올리고서 말했다.

“만약, 명군이 움직이기 전 아조가 먼저 병력을 국경에 배치하여 후금의 이목을 사로잡는다면, 명군이 진출 초반에 좌절할 가능성도 줄어들지 않겠사옵니까.”

박홍구의 제안에 곳곳에서 감탄이 나왔다.

나 역시 속으로나마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이국끼리 벌이는 전쟁에 이렇게라도 개입할 수 있을 줄이야.

도발의 수위가 다소 높긴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은 아니라는 점에서 후금이 취할 대응에도 한계는 있었다.

더군다나 명군이 곧장 쳐들어오기까지 한다면 더욱 그렇다.

“……역시 좌상입니다.”

노회한 의정답다. 더군다나 박홍구의 관직생활은 선조의 치세 초반부터 폐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른다.

조선사 최대 환란의 시기라 봐도 무방한 이때 무난하게 권력을 유지해오며 의정까지 이르렀으니, 그에게 꾀가 없다면 거짓이리라.

여기에 우의정 이상의도 거들었다.

“이참에 과감하게 국경에 요새까지 수축함이 어떻겠사옵니까? 후금이 트집을 잡더라도, 아조는 노추의 자식들을 통해 군사들이 강을 넘지 않으리라는 의사를 전하였으니 순전히 방어의 용도라고 둘러대면 그만일 것이며, 혹 저들이 믿지 못하더라도 금방 명군에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니 대응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재차 중신들 사이에서 감탄과 긍정이 쏟아졌다.

박홍구의 제안이 멀리서 명군의 행보를 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라면, 이상의는 한 단계 나아가서 군사를 재배치한 김에 방어선까지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명군과 후금이 치고받을 동안에 말이다.

‘두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면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셈이로군.’

그야말로 어부지리의 계책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훗날 명이 무모한 원정이 책임소재를 찾고자 할 때 아조는 당당할 수 있겠군요.”

조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당당하지 못할 게 있겠느냐만, 세상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자신보다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국가간에도 예외는 아닐진대, 하물며 명나라는 저들이 완전무결하다고 믿는다.

달리 원망할 구석이 있다면 실책을 시인하는 대신 애꿎은 주변을 탓할 게 너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조선은 제 몫을 다했다.

조명연합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미리 밝혔고, 대신 신무기를 지원했다.

공작금 은자 일만 냥을 접수한 대가로는 이 정도로 충분한데, 나아가 소식을 듣고 곧장 후금의 시선을 교란하고자 군대를 재배치하고 도발까지 했다면 도리 이상을 해준 셈이다.

이 정도면 명나라가 아무리 뻔뻔해지고자 해도 쉽지 않지.

“좋습니다. 북방군 도원수에게 군대를 압록강으로 옮기라고 전하세요.”

* * *

산해관 총병 마세룡馬世龍은 상관살해의 충동을 느꼈다.

싸움에 대해서라곤 조금도 알지 못하는 병부상서가 행패가 정점에 이른 탓이었다.

마세룡이 가장 가관으로 여긴 건, 조선이 적의 철기를 꺾은 비결이랍시며 왜창을 잔뜩 복제한 것이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지역朝鮮之役에 참전한 노병들이었다.

갑자기 풍문이 돌아 출처를 적발해 모아놓으니, 모두 입을 모아서 소싯적 조선 땅에서 보았던 왜노들의 창이 이러했다고 고했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세룡은 어쩌다 병부상서가 왜창을 조선의 비밀병기랍시고 가져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병부상서가 글줄만 안다 뿐 군무에는 눈 뜬 장님이니 또 멍청한 짓거리를 해냈다고만 여길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비밀병기’ 사건도 이제는 마세룡 최대 가관의 영예에서 물러나게 됐다.

간밤에 출병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총병대인, 정녕 멀쩡한 산해관을 내버려두고 사지로 출병하시겠습니까?!”

부하인 이승선李承先이었다. 그 역시 중앙의 지시가 어처구니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하지만 마세룡에게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황명이야.”

따르지 않는다면 항명이었고 반역이었다.

“…….”

마세룡은 항명을 해서라도 부하들의 목숨을 건지고자 할 정도로 의협심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설령 그런 사람이었더라도, 항명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과 무고한 일가친척의 목만 달아날 뿐, 자신의 자리에 또 불쌍한 사람이 내려와 무모한 명령을 강요받게 될 테니까.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출병을 준비하게.”

“…….”

이승선은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가, 장탄식을 흘렸다.

막 초봄에 들어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바람은 쌀쌀하니 출병한 군사들의 체력 관리에는 도움이 될 듯했다.

후금의 철기가 들이쳐 모조리 도륙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등골 싸늘해지는 소문을 접하고 총병부에 쳐들어온 이승선은, 별다른 수확은 거두지 못하고서 겨드랑이에 끼워두었던 군모만 뒤집어썼다.

“유서 쓸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이승선이 물러난 뒤, 마세륭은 눈을 질끈 감고서 이마를 짚었다.

본디 인명이란 언젠가 종식을 고하기 마련이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도 마세륭은 지금처럼 자신이 예비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감해본 적도 없었다.

황명을 거부해도 죽음뿐이나, 따르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호랑이 아기리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니까.

그러니 마세룡 자신은 당장 살아있어도 숨 쉬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받아들이기 쉬운 사실은 아니었다.

괜히 부처가 추앙받는 게 아니구나 싶을 뿐이다. 생자필멸을 깨우치고도 덤덤히 가르침을 퍼뜨렸으니까.

그러나 마세룡 그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깨달을 터였다.

그래서 마세룡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백지를 깔아놓고 붓을 드는 행위 자체가 곧 결단이어서인지, 한 번 먹물을 머금은 붓은 멈추지 않고 일필휘지로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영평부永平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영평부는 산해관 바로 너머에 있는 고을이자 북경으로 가는 길목이다.

황제와 조정이 무능하여 산해관의 명사들을 바깥으로 내몰았으니 영평부가 잔학한 오랑캐들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저 최대한 멀리, 남쪽으로 달아나라고 할 수밖에…….’

편지를 완성한 마세룡은 총병부의 심부름꾼을 불러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승선은 진담인지 빈정인지 유서를 쓰겠다고 했는데, 마세룡에게는 서찰이 유서나 마찬가지였다. 고뇌로 글줄을 채우고 좌절로 방점을 찍었다. 생애의 마지막 의념意念을 그렇게 서찰에 담아 떠나보냈으므로 남은 몸뚱어리는 진정으로 예비 시체나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절망감이 많이 가셨다.

마세룡은 등받이에 편히 몸을 뉘인 채 이승선의 귀환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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