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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5화 (125/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5화

산해관 총병 마세룡은 죽음을 예상하고 고향에 서신을 보냈다. 그랬기에, 출병 후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완전히 마세륭에게 예상 밖이었다.

그의 군사가 무난하게 안산鞍山까지 진출한 것이다.

안산鞍山은 후금의 수도 요양遼陽에서 고작 80리里 떨어져 있다. 미래로 치면 30km다. 충분히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였다.

마세룡은 의외의 성과에 감탄했다.

“옛 병법에서 이르기를,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더니 하늘이 도와서 이렇게 되는구나.”

안산까지 이르는 동안 분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적의 저항이 매우 미약했다. 한 줌에 불과한 후금 유격대의 일격일탈이 반복되었으나 마세룡군의 진격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신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산에 입성한 지금은 적의 유격행위도 그쳤다.

“방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장 이승선이 강조했다. 뻔한 의견이지만, 마세룡도 진지하게 의식하고 있던 바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가 천운에 힘입어 적의 심장에 다다르긴 했지만 사나운 적 오랑캐들이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 건 아닐 테니까.”

“어쩌면 적의 유인책일 수도 있습니다.”

마세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깊게 끌어들이는 것도 정도껏이지, 변변찮은 싸움 한 번 없이 수도 근방까지 내어준다고?”

“오랑캐들입니다.”

많은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오랑캐들이 우리를 이곳까지 끌어들일 필요나 인내심이 있다고 생각하나?”

살이호지전에서 명군은 조선군을 포함해 11만 명을 갖추었고, 후금군은 6만에 불과했다.

양측의 격돌은 연합군의 대패로 종결됐다.

“우리는 살이호지전 때의 절반 규모로 진출했는데 후금군은 세력 확장에 힘입어 세 배 이상의 병력을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되지.”

명군을 저지하는 데 기교까지 부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유인책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그리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놈들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야.”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막 답한 이승선은 자신의 발언이 호승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뒤늦은 후회였으나 이미 흘러나온 말이었다. 마세룡은 지적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트집이었다. 적의 심장부가 지척에 있었다.

“적은 당장 내일이라도 나타날 수 있네. 요양을 공략하는 와중이라면,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주변에 첨병을 배치하여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적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게 좋겠네.”

“……알겠습니다.”

“천조의 명운이 우리 손과 내일의 향방에 달려 있네. 그 점에서, 나는 미리 휴식을 취해두고 싶군. 새벽까지 나 대신 고생해 주게.”

“받들겠습니다.”

이승선은 경직된 자세로 예를 표했다. 말실수를 여전히 의식하는 탓이었다.

마세룡은 그런 이승선을 떠나보내고서 침실로 향했다. 군대가 기습에 가장 취약해지는 시기는 동이 트기 직전이다. 때맞춰 기상하려면 바로 휴식해야 했다.

* * *

마세룡이 눈을 떴을 때.

총병부로 임시 전용하게 된 관사 주변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미리 휴식을 충분히 취했다는 것이다. 머리 아픈 상황이 벌어졌지만, 적어도 몸은 피로하지 않았다.

마세룡이 침소에서 벗어나 먼저 군복을 챙겨입는 동안 이승선이 들어왔다.

그가 곧장 입을 열었다.

“총병대인.”

“적인가?”

“예.”

마세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구를 눌러쓴 채 이승선의 안내를 쫓았다.

“적의 수효는 얼마나 되나?”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야간이었다. 적의 규모를 추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셀 수 없다는 표현이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승선이 곧장 덧붙였다.

“최소가 십 만입니다.”

총병부를 나서자 하급 장교가 말 고삐를 내어주었다.

두 사람은 호위를 받으며 성곽으로 내달렸고, 곧장 엄중한 분위기에서 군례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섰다.

그리고 펼쳐진 것은 장관이었다.

새벽이 번지기 전, 구름마저 짙어 하늘에는 별빛 한 점 없는데 지상에는 지평선까지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은하수가 땅으로 내려앉은 듯했다. 무수한 불빛이 바람따라 일렁이므로 발광하는 밤의 바다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

그 실체를 생각하자면 등골이 서늘해지지만, 어쨌거나 장관은 장관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언제 나타났나?”

“반 각 전부터 몰려왔습니다.”

“첨병들은?”

“당한 듯합니다.”

첨병이 반응하지 못했다는 건 적들이 일반적인 이동이 아닌, 수도를 구하기 위한 질주를 해왔다는 방증이다.

‘이것들이 얼마나 멀리 있었던 거지?’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왔는데 이제 도착했다면, 군대의 대부분이 국경의 반대편에 있었다는 의미였다.

아차 싶었던 마세룡이 외쳤다.

“우리의 군사들은 즉각 출성하여 교전할 수 있는가!”

“비상 상황을 전파했으니 빠르게 준비될 것입니다. 그런데, 출성이라니요? 너무 무모합니다!”

“적들은 조선 국경에서 지금까지 달려오느라 체력을 소진한 상태다! 해가 뜨면 후속 부대와 규합해서 곧장 공성을 걸어올 테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게 맞아!”

적의 계획이 그렇다는 건 저들이 항복을 권유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수도의 지척까지 다가온 명나라 군사를 모조리 도륙함으로써 동요하고 있을 요양 신민들에게 생생한 경고를 남기겠다는 의도다.

새벽이 되어 시야가 걷히고 적의 후속부대에 체력까지 보충되면 적지 한가운데 고립한 마세룡군은 도륙을 면할 수 없었다.

“기병대부터 출성하라! 적이 지쳐있을 때 기회를 노려야 한다!”

* * *

누르하치는 안산을 우세의 병력으로 포위함으로써 명군을 묶어놓고자 했다.

명군이 안산에서 나와 동경東京(요양)을 공격하면 동경의 불순한 명인들이 내응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경이 적에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이 퍼진다면 요동 전체에 소요사태가 번져나갈 것이 너무나도 명약관화했다.

요동의 확고한 지배를 위해 포석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누르하치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그런 제약이 틈을 만들었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명의 기병대가 튀어나왔다.

후금군 기병대와 비교하면 바위로 달려드는 계란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금군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압록강부터 안산까지 꼬박 질주해온 후금군이다. 교대용 말까지 지쳐버린 상황이었으니 기수들의 상태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후금군과 달리 명군 기병대는 충분히 휴식을 취한 채였다.

나아가 전의라면 체력보다 더욱 굳건했다. 산해관을 넘어올 때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 실상을 따져보면 양측의 형국은 계란이 바위에 달려드는 게 아니라, 자갈이 계란 소쿠리에 달려드는 격이었다.

질주해 온 명군 기병대가 어쩔 줄 몰라 하던 후금군 기병대와 격돌했다.

육중한 군마끼리 부딪치면서 폭음 같은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후금군 기수들이 맥없이 튕겨나갔고, 명군 기수들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온 사방이 적이었으므로 거리낄 게 없었다.

토막 난 사지와 피 흘리는 시체들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졌다.

기세에 밀린 후금군 기병들이 대오를 빠져나가면서 일대에 혼란이 가중됐다. 그럴수록 유리해지는 건 명군 기병대였다.

격전의 혼란을 틈탄 건 명군 보병들이었다.

우군 기병대의 분전으로 방해받지 않고 성을 빠져나온 보병들은 본능적으로 방진을 갖춘 채 진격했다.

덕분에 사수들이 방해받지 않고 사방으로 화살을 쏘아내니, 대오와 함께 지휘계통이 완전히 무너진 후금군 기병들은 차마 단독으로 달려들지는 못하여 달아나기 급급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도 졸장은 아니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지도력으로 일개 부족을 준 황제국의 반열로 올려놓은 세기의 영웅이었다.

소산하는 기병들을 헤치고 고지대로 나아간 누르하치는 언덕 끝자락에 이르러 편자를 밟고 굳건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군기를 받아들여 높이 치켜드니, 때마침 번져오기 시작한 여명과 함께 군기가 환하게 빛났다.

그 광경에 정신없이 흩어지던 후금군 기병들은 칸이 자리를 지켜선 것을 보고 침착해졌으며, 명군은 영웅의 무시하지 못할 기개에 질색했다.

누르하치는 군기를 기울여 끝으로 명군 기병대를 가리켰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명령이었다.

후금군은 명군 기병대의 사방에서 들이쳤다. 무참하게 깨져나갈 때와는 판이한 기세였다.

명군 보병대가 즉각 원호하였으나 파도로 변해버린 후금군의 질주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적의 기병대를 좀처럼 달려들지 못하게 했던 엉성한 장창방진은 목숨을 도외시한 돌격에 곧바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후속으로 달려든 후금군 기병들은 대나무 숲을 질주하듯이 장창방진을 헤집었다. 혈전이 벌어졌다.

* * *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즈음 안산의 주변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양측 모두 극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겪은 참이었다. 위태로운 적막이었으나 그것을 깨는 자는 대역죄인이라도 된다는 듯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동안 신난 건 까마귀들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시산혈해 위에 새카만 점들이 흩뿌려졌다. 불길한 우짖음이 적막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막연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시끄러운 적막을 깨뜨린 건 안산의 명군도, 주변을 에워싼 후금군도 아니었다.

중천의 화창한 하늘을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가로질렀다.

방위상 동북쪽이다. 명군은 요양이라 부르고 후금군은 동경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 쪽이었다.

누르하치는 모두와 마찬가지로 한풍에 실려온 탄내음을 맡았다.

병력을 분할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 대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거리감과는 달리 그의 마음에서는 이미 많이 멀어진 7남, 아파태였다.

“전하……!”

아파태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인사했다.

누르하치는 시작된 보고를 한 귀로 흘리면서, 보병들의 지휘를 맡은 아파태의 귀환이 가진 의미를 떠올렸다.

“다이샨!”

누르하치의 일갈에 대패륵 대선이 커다란 얼굴을 훔치며 나타났다.

“부르셨사옵니까.”

“네 병사들을 이끌고 동경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대선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누르하치는 말 머리 앞에 고개를 숙인 아파태를 쳐다보았다.

“아바타이.”

“예!”

아파태는 이어지는 말이 없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누르하치가 안산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저곳을 함락해야 한다. 병사들을 독촉해 빨리 데려와라. 네가 유능한 만큼 병사들이 쉴 수 있을 것이다.”

“……예.”

“적이 기습적으로 출성할 수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드는 것으로 축객을 대신했다. 아파태는 서둘러 물러났다.

곧 대선의 병력이 후방으로 빠져나가고, 아파태가 멀어지는 방향에서는 지평선이 일렁이고 있었다.

전장에 다시 적막이 맴돌았으나 이번에는 오래 가지 않을 적막이었다. 새카맣게 내려앉았던 까마귀들이 본능적으로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누르하치는 날짐승의 그림자가 무수히 자신의 얼굴을 스쳐가는 와중에도 안산을 향한 지긋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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