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26화
명군의 침공으로 수도 동경에서 내응 시도가 발생,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시구획 일부가 전소되었으며 명군이 점거하고서 농성했던 안산은 초토화형을 당했다.
아파태가 전한 소식이었다.
‘간만에 밥값하네.’
의주부에서 압록강을 두고 대치했던 후금군이 서둘러 물러났으므로, 저들 진영에 급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건 알았다.
예상했던 전개였다. 명군의 출정 소식을 사신단을 통해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후속 정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는 건데, 아파태가 제몫을 해주었다.
“경들도 보세요.”
때마침 불러놓은 삼의정에게 서신을 넘겼다.
중요한 정보를 나 혼자 알아두어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이원익과 박홍구, 이상의는 저마다 차례가 올 때마다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 사람 모두 일독을 마친 뒤 다시 나의 손으로 돌아온 서신은 화로 위에서 재가 되어 바스라졌다.
박홍구가 말했다.
“후금이 안산을 초토화한 점을 보아, 명군과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던 모양이옵니다.”
이에 우의정 이상의가 물었다.
“요양에서 내응 시도가 있었다니 일벌백계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요양을 쓸어버려야지, 왜 안산을 쓸어버리겠소?”
마음 같아서는 요앙과 안산 모두 쓸어버리고 싶었을 터.
그러나 혈전 직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심대한 타격을 입게 만든 안산만을 초토화했다는 게 박홍구의 논지였다.
아귀가 딱딱 맞춰지는 게, 추측의 신뢰도가 높았다.
이원익도 그리 여기는지 박홍구의 주장을 전제하고서 말했다.
“후금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니, 압록강의 방어선 수축에도 훼방을 놓지 못할 것이옵니다.”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북방군의 진주와 방어선 수축에 대군을 끌고 와 긴장감을 조성했던 후금이었다.
일개 기의 병력으로는 조선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되었으니 대군을 동원하여 기를 죽이고자 한 모양이었는데, 그것이 누르하치에게는 오판이 되었다.
때마침 치고 들어온 명군이 수도 지척까지 나아가 혈전을 벌였고 그 탓에 요양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니까.
“방어선의 수축 이외에도, 후금이 당분간 조용해지는 시기에 이익을 볼 방책이 있겠습니까?”
이원익이 먼저 답했다.
“압록강에는 거점으로 삼을만한 섬이 많으니, 이참에 진출하여서 성곽을 수축한다면 후금군의 도강을 더욱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어서 박홍구도 말했다.
“명군이 비록 몰살하였지만 적은 병력으로 큰 성과를 낸 데는 아조의 협조와 더불어 장창의 제공이 매우 주효하였사옵니다. 이 점을 미리 강조해 둔다면, 대방과의 외교에서 우위에 설 수 있사옵니다.”
정확히 내가 바란 바람직한 전개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순서를 맞춘 것처럼 차례대로 답하니, 우의정 이상의가 나의 눈치를 보았다.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걸까.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다소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지만 느긋하게 이상의의 발언을 기다렸다.
“……아조의 원호는 안산에서의 싸움과 별개의 일이나, 무도한 후금이라면 원한으로 삼고서 추궁해올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니 미리 대비함이 어떻겠사옵니까?”
다른 두 사람도 끄덕였다. 9할 확률로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금이 안산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건 먼저 조선을 상대로 허세를 부렸기 때문이지만, 누르하치가 얌전히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겠는가?
수도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대규모 화재까지 났다. 이 이상의 위신의 추락을 감수할 수 있을까. 안면에 철판 깔고 애먼 조선을 질책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의정의 지적대로 의주와 안산의 사건은 완전히 별개다. 후금이 할 수 있는 말도 많지는 않다.
기껏해봐야 왜 오해하기 쉬운 행동을 했냐며 공허한 소리를 조금 지껄이거나, 명과 모의하여 벌인 일이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누르하치는 여론을 호도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사신이 개소리하다가 깨지는 건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안에서 모든 게 조선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
곤란했다.
“후금 내에서 조선을 향한 적대감이 강해진다면 저들의 우선순위에 조선이 거론될 수 있겠습니다.”
그 끝에 누르하치가 영원성 대신 의주성에 달려들지도 몰랐다.
후금에서 사신을 보낼 거라는 우의정의 말에서 다소 선문답 같은 지적이 이어졌지만, 세 사람도 사고의 흐름이 다르지 않았는지 금세 쫓아왔다.
“허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박홍구의 탄식이었다.
그러나, 이게 약소국의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사실 이런 구도는 한반도 역사에서 질리도록 반복되었던 모습이다.
가까운 대전쟁의 발발 원인 중 하나도, 막부가 열도 통일 후 쓸모없어진 무사계급을 소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문제가 생기면 직접 책임지는 대신 주변 약소국에 토스해버리는 거다. 국제관계의 야만성이다.
“어떻게 할까요. 손을 놓고 있어도 어차피 인식은 나빠질 테니,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마는.”
어차피 후금은 당장 주먹을 들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에 이원익이 확인 차라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이받는다 하심은……?”
“조정에 심심하면 입질하는 광견이 하나 있잖습니까.”
이귀라고.
“……병조참판을 사신으로 보내자는 말씀이시옵니까?”
정확하게 맞춘 이원익이 재차 물었다.
“이귀라면 양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후금에 전달할 겁니다. 너희가 머저리 같이 굴다가 제 발등 찍어놓곤 어디에다 화풀이하려느냐고 따지겠지요.”
분명 나의 표현 그대로 입에 담고도 남을 이귀다.
그동안 보인 ‘타격감 좋은 미친개’ 같은 태도가, 안 죽을 것을 알고서 간사하게 뻗댄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뻗댄 것이라도 별 상관은 없다.
괘씸해서라도 후금으로 보내버리는 게 맞으니까. 정면으로 들이받겠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겠으나 조선의 입장은 전달할 테고, 평소 미친 척하던 인간은 귀국할 때 정상인이 되어 돌아오겠지.
“어떻습니까?”
* * *
매우 안타깝게도, 삼의정은 나의 제안을 보류했다.
누르하치가 손상된 위신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복구하려들 수 있다는 반대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의견을 전달하는 건 후금에서 사신이 왔을 때가 좋다고.
“쩝.”
성질 더러운 광견 하나를 사람 만드나 싶었거늘.
대신 삼의정은 저들이 앞서 발한 두 의견부터 실행했다.
북방군 도원수 김충선에게는 방어선 수축의 재개와 더불어 압록강의 섬들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덜떨어진 선조레기가 명나라 눈치나 본답시고 포기한 섬들이 다시 조선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참에 요새 등 방어시설까지 세우기로 했으니 후대에 선조레기가 한 멍청한 소리가 또 나오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명나라에는 진하사進賀使를 파견했다.
명분이야 그 이름처럼 경사를 축하하기 위함이라지만, 진의는 조선이 장창도 내어주고 뒤에서 힘도 많이 써주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내색하기 위함이었다.
폐하께서 체면과 염치란 게 있다면 은사금을 두둑하게 내려주시겠지.
기고만장한 명나라 대신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에 대한 나의 공식 입장은 ‘그래서 어쩌라고?’이다. 꼬우면 단독으로 후금 찍어누르든지.
‘그게 가능해지면 나는 후금에 힘을 실어주겠지만 말이야?’
후금과 명을 상대로 양아치짓을 한 번씩 저질러주니 속이 아주 편안- 했다.
21세기에 이르러 대한민국은 을질이라는 이슈가 생겨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을질도 진부한 현상일 뿐이다.
이게 바로 을질이 아니면 무엇이냐. 국제외교의 냉혹함은 강국만의 무기가 아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양강 중 어느 한쪽이 균형의 수호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멍청한 짓을 저지른다면, 조선 역시 망국의 위협에 놓일 것이다.
특히 양강 사이에서 빨아먹은 꿀이 많을수록 괘씸함이 더해져 소위 ‘업보 스택’이라는 게 많이 쌓이는데, 너무 많은 업보를 쌓았다면 망국의 실현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니 요지는 조선이 균형의 수호자로서 현재의 외교구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구도가 달라졌을 때를 착실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소홍이포의 숫자를 늘려야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대형화된 신형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전하.”
병조판서 이광정이 딱딱하게 답했다.
“의주부 일대에서 신설하는 진보와 돈대만으로도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고 있사옵니다.”
“내수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종친들에게서 회수한 궁방전으로 작년 내수사 수입이 늘어났다.
그리고 가례를 축소해 많은 비용을 아꼈다. 진주와 금은, 옥과 비단들…….
가례에 앞서 행해지는 삼간택에도 참석한 세자빈 후보들에게 예물을 내리는데, 이것 모두 생략되기까지 했다.
나라에 돈이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명나라에 파견된 진하사 역시 뭐라도 들고 돌아오리라 예상되고.
다만 이광정의 성향이 국방비 증대와는 잘 맞지 않았다. 호조판서 때부터 일관적으로 군축을 주장해온 그다. 직품이 달라졌다고 정책을 손바닥처럼 뒤집을 정도로 경박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이 예산 지원과 설득이었다.
“후금은 아조에 의해 장창방진의 매서움을 깨달았고, 명나라 또한 예전과는 다른 장창을 도입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응당, 장창방진을 파훼할 묘안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책이 더 많고 큰 대포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예. 장창방진은 병사들이 빽빽하게 밀집하여 구성되고 기동성은 거의 전무한 탓에 적의 화포에 매우 취약합니다.”
볼링핀을 뭉쳐놓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상태라면 볼링공이 한 번만 적중해도 와장창 무너지겠지.
전장에서는 화포의 포탄이 그 역할을 할 거다.
“적의 화포를 제압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압도적인 기병전력을 갖춰 적의 포병대를 단숨에 휩쓸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보다 우세한 포병전력으로 화력전에서 압도하는 것입니다.”
기병전력이 강한 후금을 상대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는 너무나 분명했다.
애초에 장창방진을 도입한 이유가 후금의 압도적인 철기들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장창방진에 더해 포병전력에 힘까지 실어준다면 우리의 군사는 더욱 수동적으로 변하겠으나, 전술이 전략에 부합하니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후금이건 뭐건 국경 넘는 놈은 확실하게 피곤죽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게 현 조선 상황에 적합한 전략이다.
장창방진과 포병 극대화 전술의 맹점은 기동과 난전에 불리하다는 것인데, 전략에 따라 수비에 집중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
‘적이 거시적은 차원에서 우회하거나 전격적인 기동을 보인다면 위험해지겠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큰 강이 흐르고, 강이 좁은 상류에는 산악지형이 더럽게 펼쳐져 있다. 자연환경 역시, 쉽게 말해 ‘존버’ 전략에 부합하는 셈이다.
원 역사에서 이게 안 됐던 이유는 무능한 인조의 무능한 똘마니들이 ‘명치 때리러 갈게요~’ 하고 지나가는 후금군을 방관했기 때문.
이번 역사는 다를 예정이다.
북방군은 정예하며 전의가 높았고 대로大路 초입인 의주부 일대와 강변은 물론 강 한가운데 섬들까지도 소위 ‘벙커’를 박아놨다.
방어선이 나아간 만큼 탐지와 대응이 빨라지겠지.
“그러니, 병조판서?”
예산을 너무 맹목적으로 아끼지는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