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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27화 (127/380)

인조, 명군이 되다 127화

여기저기 염장을 지르고 다니는 간잽이의 최후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포화한 업보 스택의 정산을 견디지 못하고 뒤통수가 깨져 죽거나, 고비를 순탄하게 넘긴 뒤 적개심의 연착륙을 통해 간잽이 명인 시절을 다 지난 과거로 만들어버리거나.

조선이 지향해야 할 바는 당연히 후자였다.

천하대세는 합구필분 분구필합. 두 제국은 언젠가 하나로 합쳐질 것이며, 주체가 어느 쪽이건 조선은 그동안 빨았던 꿀을 정산해야 한다.

하지만 빚쟁이거 성곽 너머에서 대포로 무장하고 있는데 추심이 가능할까?

‘아무리 꼬와도 때릴 엄두가 나지 않으면 좋게 좋게 묻고 갈 수밖에 없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머저리라도, 한 대 쳤다가 자기 주먹이 박살나면 판단능력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조선의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비밀병기다.

“낙서포洛西砲라 하옵니다.”

병조판서 이광정이 소개했다.

소홍이포를 단순하게 확대한 것이지만, 원본 홍이포만큼 크지는 않았던지라 새 이름을 붙였다.

뜬금없이 낙서포인 이유는 지난 의주대첩에서 도원수를 지낸 장만의 호가 낙서이기 때문.

그만큼, 신형 무기를 소개하는 자리에는 장만도 함께했다.

“변방을 지킬 신무기에 신의 이름을 붙여주시니, 더없이 광영이옵니다.”

은퇴 후 방문객들에게 전훈 들려주는 것을 소일거리 삼아온 장만이다.

그로부터 시일이 흘러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질색하던 차에, 때마침 새로운 자랑거리가 생겼다. 장만에게는 시의적절한 행운이리라.

“경이 애써 도원수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이름이나마 걸어 국경에 세워두는 것이 아니 내키지는 않습니까?”

농담조로 물어보니 장만이 허허 웃었다.

“신이 늙어 육신이 따라주지 않아 물러났는데, 여전한 마음만이라도 높게 사주시어 대포의 이름으로 삼고 적을 무찌르게 해주시거늘 어찌 망극하지 않겠사옵니까?”

낙서포가 소소한 전공이라도 세운다면 제 전훈처럼 떠들 장만이었다.

대포 이름을 낙서로 짓기 잘했군.

이건, 실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명나라의 투자를 극대화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여차하면 소홍이포에 태창포泰昌砲라는 이름을 받아서 거액에 팔아넘길 생각이니까…….’

소홍이포의 존재를 후금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을 상대로는 이전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더 큰 낙서포를 개발한 것도 이 때문.

구식이 되었다면 비싼 값을 받고 팔아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명나라에 힘을 너무 실어주는 게 아닌가 싶지만 돈만 많이 준다면 상관없다.

애초에 양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조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겠다면 오히려 빠르고 확실한 편이 더 좋다.

‘대신 후금 쪽에도 힘을 실어주겠지만.’

이미 명 황제가 하사한 화약으로 동강진의 명군을 쓸어버린 참이다.

균형의 수호는 중요하지.

조선의 왕으로서 나의 철학은, 때리면 더 세게 때려주고 잘 해주면 뒤에서 때리는 것이다.

……이러니 후환을 대비할 수밖에 없다.

“병조와 군기시의 일원들이 크게 공을 세워주었습니다. 낙서포 한 문은, 서궐 동궁東宮으로 보내 사람들의 노고가 후대에도 잊히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광정이 감격해서 말했다.

“망극하옵나이다.”

이들의 노고를 세자에게 알리겠다는 건, 후대의 왕에게도 이들을 잘 우대하라 지시하는 것과 같다.

그게 나의 진심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자에게 소홍이포를 전달했던 건 왕도의 실현 방법에 정도正道만 아니라 사도邪道 역시 있다는 걸 새겨주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낙서포를 보내는 건 무엇으로 조선이 수호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여전히 여러 사람이 명나라와의 의리와 후금을 향한 적개심을 과시하지만, 그들이 오늘날 조선이 세운 업적에 보탠 건 무엇도 없다.

오직 생존만을 위한 고뇌의 결과만이 비참한 역사가 재현되는 것을 막아냈다.

이러한 마음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기에, 병조와 군기시의 관리들 앞에서는 다르게 둘러댔다.

세자는 현명하니 나의 진심을 알아채겠지.

* * *

충청도 부여현扶餘縣.

삼국시대 120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했던 부여는, 오늘날에 퇴락하여 일개 현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온 나라가 휘말렸던 임진년 왜란 때도 전화戰禍가 비껴갔을 정도다.

그러나 천혜의 도읍지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고을을 관통하는 백마강 덕에 서쪽의 홍선현鴻山縣이나 북쪽의 정산현定山縣보다 땅이 기름졌다.

덕분에, 부여현은 소외되었을지언정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는 고즈넉한 고을이었다.

해마다 추수철에 이르면 마을마다 쟁箏과 피리 소리를 반주삼아 춤을 추었다.

그런 부여현을 공조참판 김육이 방문한 건 초봄이었다.

왕명 때문이었다.

충청도에도 선혜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육로와 수로를 확보하라는 지시였다. 직후, 판서와 왕의 인가를 받아 종이품의 신분으로 친히 답사를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영감께서 폐읍弊邑을 친히 방문해 주시니, 송구스럽고 민망할 따름입니다.”

부여현감 김경여金慶餘였다.

김육이 일대를 답사한 지도 오래였으므로, 그의 방문에 때맞춰 현감이 고을 어귀까지 나와 마중하는 것도 특이할 일은 아니었다.

김경여가 과장되게 굽실거리며 덧붙였다.

“소관이 즉각 미녀들과 산해진미를 모아 바칠 터이니, 영감께서는 성의를 좋게 봐주십시오.”

그러자 김육은 동료 관리의 장난스러운 환대에 정색하고서 답했다.

“송애松厓(김경여의 호).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영감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사람들이 이제 잠곡潛谷(김육의 호)은 깐깐한 자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흥, 송애의 배려에 부응해드려야겠군.”

두 사람의 대화에 일순 식겁했던 아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현감이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한 탓에 관찰사와 동격인 참판이 정색하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가는 말을 들어보니 영락없이 친우끼리 오가는 장난이 아닌가?

과연 그러했다. 김육과 김경여는 강원도에서 함께 양전어사를 지냈던 사이였다.

“동헌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김경여가 먼저 말 머리를 돌리자, 김육이 따라붙어서 말했다.

“이렇게까지 멀리 나오실 필요는 없었네만.”

“영감이 소관보다 부여의 지리를 잘 아십니까?”

“……으음.”

“방문하시는 고을마다 길과 강을 일일이 파악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소관이 많이 안내해드릴 터이니 적응하셔야 할 겁니다.”

여전히 장난스러운 김경여의 말에 김육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목민관이라는 분께서 소관 사무는 아니 보시고 친히 친구 동네 구경이나 시켜주시려는가?”

“다 여유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요. 부여는 인구가 적고 풍속은 순박해서 사건 사고랄 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면 어쩌시려는가?”

“양해드려야지요.”

김경여가 피식 웃었다. 친구가 노파심을 발휘하지 않아도 일의 경중은 알아서 분간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전들 앞에서는 김육의 깐깐함을 드러냈으나 실상은 못지않게 깐깐한 김경여였다. 혹여 일이 생긴다면 고을을 안내하던 와중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갈 사람이었다.

김육도 잘 알고 있었다.

“양해는 무슨……. 그래도 볼일이 생긴다면 돌아가기 전에 말이나마 해주시게. 꼴사납게 미아가 되어 방황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고민해보지요.”

“고민?”

두 사람은 동헌에 다다를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화제를 바꿔나갔다.

각기 당상의 경관, 참상의 외관이라서 나눌만한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김경여가 들려주는 일화들은 대개 제 임지처럼 소소하고 잔잔한 것이어서, 화제성으로는 최근 굵직한 사건이 많은 한양의 사정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김육은 말단 목민관의 사정과 관심거리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김경여가 부민들의 사정에 상당히 관심 있는 인물이라는 것 역시 깨달았다.

충청도 내륙을 순회하는 도중 몇 본 보았던 수령들과는 바람직한 쪽으로 달랐다.

“이곳이 앞으로 영감께서 지내실 객사입니다. 청소는 미리 해두었습니다.”

김경여가 소개와 함께 객사 날개칸의 방문을 열었다.

김육은 익숙하다는 태도로 안쪽에 짐을 풀어놓았다. 대동한 수행원과 노복 역시 뒤따라 저마다 진 짐을 놓았다.

각자의 어깨가 가벼워지자 김경여는 곁의 아전에게 일러 다른 이들을 위한 숙소를 안내하게 했다.

그렇게 현의 외곽에서부터 우르르 함께 이동한 무리가 멀어지자, 김육은 태평하게 마루에 걸터앉았다. 충청도 전체를 아우르는 관찰사와 동격의 중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탈함이었다.

김경여가 물었다.

“사서 하시는 고생은 어떻습니까. 어찌, 즐길 만하십니까?”

“……처음에는 외유를 겸할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이 사람 몸이 버티질 못하겠네. 말 타는 것에 금세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내 발목이나 무릎 중 하나는 지금쯤 박살났겠지.”

김육은 훗, 웃고는 김경여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자네는 어떤가. 현감 노릇은 즐길만 한가?”

“쟁송도 별로 없고, 죄짓는 사람도 흔치 않아서 좋은 쪽으로 지루합니다. 그래도 어사 시절을 생각하면 이편이 훨씬 낫지요. 영감은 아니 그렇습니까?”

“어휴, 말도 말게.”

당시 양전어사들은 서인의 전도유망한 후기지수, 다 망해가는 북인들 최후의 희망들로 이루어졌다.

각자 당색과 신세는 달랐지만, 경력과 경험이 모두 일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는데 상대방인 외관들은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외부인의 처지로 일신의 안위를 감사 대상인 목민관에게 의탁해야 했으니 심적인 부담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끝까지 버틴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였다.

만약 북병사가 독살당한 사건으로 여러 부패 목민관들의 목이 효수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어사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경여가 담소를 이어나갔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을 터인데, 안내는 내일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그리 해주시게.”

“망극할 따름입니다.”

“어차피 나도 쉬어야 하고, 자네도 준비라는 게 필요하겠지. 망극할 것까지야…….”

김육은 옛 동료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여야지요.”

“이 사람에게 말인가?”

김육이 피식 웃었다. 관찰사도, 이조 당상도 아닌 자신에게 잘 보여 무엇한단 말인가.

“잘 보여야지 길도 잘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길을 잘 내어야, 나라의 사업도 잘 성취되고 백성들은 덜 고생하지요.”

“흐음. 그런 가상한 의도인지는 몰랐군.”

김경여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진심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이곳 백성들이 순박하긴 하지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싫어하는 건 다른 곳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점 부디 상량해주신다면 더 망극하지요.”

길을 닦고 선창을 세우는 건 관리 몇 사람이 해낼 일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충청도의 모든 백성이 대업의 실현을 위해 동원될 터였다.

물론, 공리를 위한 노역이니 아예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김경여는 강원도에서 길을 낼 때 비효율적인 작업이 다수 발생한 것을 봤다.

불필요한 노동처럼 백성들이 학을 떼는 것도 없다.

그건 관리라고 다르지 않으나, 단적으로 말해 ‘헛고생’이라 불릴만한 부분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관리의 영역이었고 또한 의무였다.

동료의 능력을 불신하는 건 아니지만, 봐온 게 있고 현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김경여였으므로 노파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동료의 진의가 와닿은 김육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다시 봤을 때 민망해지지 않으려면 이 사람이 눈치를 많이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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