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28화
봄철도 말미에 이르렀다.
하늘은 화창하고 햇볕은 따스했으나 바람만은 여전히 선선하여서 야외활동하기 딱 좋은 때였다.
소소한 일과를 막 마친 부여현감 김경여는 서안을 밀어내고서 객사를 방문했다. 일정있는 손님이 있었다.
“영감?”
“나가겠네.”
곧, 김육이 깔끔하게 의복을 갖춘 채로 방문을 나섰다.
그는 마루에 앉아 가죽신을 신고서 섬돌을 내려왔다가, 화창한 햇볕에 잠시 손날로 이마를 가렸다.
“날씨가 좋군.”
“지낼 만하십니까?”
“덕분에 푹 쉬었네.”
김경여는 한쪽 팔을 들고서 여유롭게 말했다.
“외유하시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음. 외유가 아니라, 답사일세.”
“외유라고 생각하셔야 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김경여가 실소와 함께 말했다. 김육은 그에게 비슷한 미소를 돌려주고는, 수행원들을 불러모았다.
직후 김육과 김경여는 근무 겸 외유 삼아 동헌을 나섰다.
그새 소문이 퍼진 것인지, 동헌 출입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던 선비 한 쌍이 곧바로 다가왔다.
“참판 영감이십니까?”
용무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신상부터 물어온다.
김경여는 미간을 좁히고서 말했다.
“업무차 행차하시는 중일세.”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김경여의 완곡한 경고에 선비는 도리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김육은 그 모습만 보아도, 두 사람이 보통 귀찮은 작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현감께서 쟁송을 잘 다스리지 못하시니 이렇게 참판께라도 고견을 청하려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함께 있던 선비가 크흠, 헛기침하고서 다그쳤다.
“그래도 현감은 이곳을 다스리는 목민관이시고, 참판 영감께서는 공무차 행차하셨는데 어찌 이리 모나게 채근한단 말인가?”
“뭐어?!”
성질 더러운 사내는 곧장 동행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언제는 같이 참판에게 따져서 끝장을 보자더니, 이제 와서 혼자 고결한 척을 해?!”
김육은 예상대로의 상황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난동은 곧장 아전과 김육의 수행원들이 달라붙어 저지했으나, 소동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 광경에 김육이 난처해하는 김경여에게 물었다.
“일은 다 끝냈다고 하지 않았나?”
“……다 끝난 일이 맞습니다. 판결을 무려 삼대 전의 현감이 이미 내린 문제인데, 불복하여서는 전전대는 물론 전대와 지금까지 이러는 겁니다.”
“허어…….”
“타협을 전혀 못 하고 있어요. 서로 일방적인 주장이 실현되기만을 바라는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김경여는 제 미간을 꼬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관할의 백성이 죄를 짓거나 타인과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면 대명률과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형벌을 내리면 되고, 일반적인 분쟁이라면 판결을 수령의 권위로 강압할 수 있다.
문제는 반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쟁송이다.
다들 사대부 집안으로 자존심만은 더럽게 강한 데다, 사돈의 팔촌까지 챙겨주는 사회 특성상 뒷배까지 끌어오기 시작하면 두 가정만의 싸움이 아닌 두 가문의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다.
물론, 비화된 싸움이라도 한쪽의 뒷배가 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면 싸움은 종결된다.
그러나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집안끼리 맞부딪쳤다면?
각자가 가진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자존심뿐이라면, 이렇게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소관 역시 이 시점에서 확보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취합해 최선의 판결을 내렸으나 양쪽 모두 불복하고서 서로의 손을 들어달라고 하는 중입니다.”
질색한 김경여가 덧붙이자, 성질 사나운 선비 쪽이 붙들린 채로 외쳤다.
“이 사람이 말하지 않았소이까! 그 선산은 우리 집안이 육대조 전부터 장지로 써온 곳이라고!”
그러자 함께 붙들린 음흉한 선비도 무어라 반박했지만, 한쪽이 너무 흥분한 상태에서 유의미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덕분에 김육은 이게 쟁송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산송山訟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 그대로 선산先山을 두고 벌어지는 송사訟事인 산송은, 성리학과 풍수설의 보급으로 부모와 조상을 명당에 모시는 것이 효의 실천이자 기복祈福행위라는 일념하에 만성적인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오죽하면 산송 때문에 가문끼리 수백 년 동안 척을 지는 경우마저 발생할 정도였다.
“영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마저 행차하시지요.”
김경여가 대로를 향해 팔을 뻗자, 김육은 짧은 침음과 함께 여전히 소란스러운 한 쌍 선비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다투는 소리가 아련해질 즈음.
김육은 지친 얼굴로 늘어진 김경여에게 말했다.
“삼대 현감 전부터 다투었다기에, 관찰사나 형조에 의송議送(항소)하지 않고 여전히 다투는 이유가 의아했는데 산송이어서였군.”
“그렇습니다.”
조선도 미래와 마찬가지로 삼심 제도가 있다.
현지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겠다면 관찰사에게 재심을 청할 수 있고, 이마저도 불복한다면 형조에 삼심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사나 형조에서는 직접 청리聽理(심리)하지 않고 원심의 목민관에게 재심을 지시할 수 있다.
충청도 관찰사는 이 경우에 해당했다.
김경여가 쓰게 웃었다.
“산송은 대개 지리멸렬한 싸움이 이어지는데, 수령의 중재안마저 먹히지 않는 경우입니다. 관찰사 영감이 굳이 공까지 들여 직접 청리하겠습니까?”
“그래서 전전대 현감이 직접 판결했겠군. 전대 현감도 마찬가지고.”
“예.”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에 따르면 연속으로 패소한 경우 다시 같은 건으로 소송하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거듭 현감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설마.”
김경여가 짐작이 맞다는 뜻으로 쓰게 웃었다.
“돌아가면서 소송을 걸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중재안을 거부하니, 그 점에서만은 타협이 이루어졌지요.”
수령이 세 번 바뀔 정도라면 어림짐작으로 십 년이다.
누군가는 강산도 바뀐다고 하는 세월에, 또 누군가는 장지를 두고서 다툼을 이어왔다. 불필요한 부분에서는 극적인 합의를 이룬 채였다.
김육은 제가 당하는 현감이라도 된 양 콧바람으로 탄식했다.
그리고선 말했다.
“현감이 나의 답사를 도와주기로 했고, 또 두 사람도 공조의 참판일지언정 나의 권위에 기대고자 했으니 산송 문제는 내가 맡아보겠네.”
김경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입만 떡 벌린 채로 쳐다보다가, 금세 정신을 수습하고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보답을 바라고서 안내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네. 한데 송애松厓께서는 이 사람이 각 읍을 도는 동안 이런 상황이 이번이 최초라고 생각하시는가?”
“……처음이 아니시군요.”
“관찰사와 같은 건 품계뿐이네만, 그래도 이 사람이 제안한 합의를 거부하는 경우는 잘 없더군.”
무려 종이품에, 어디까지 더 성장할지 모르는 육조의 참판이다.
더군다나 이번 대사업을 차질없이 성취한다면 육경六卿(판서)의 자리도 반쯤 따놓은 셈.
이만한 위치에 놓인 사람이 친히 합의점을 제시한다. 감히 거부할 간 큰 인물은 흔치 않다.
“……감사합니다.”
김경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려 십 년짜리 고질병이다.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낸다면 고과에 반영된다.
김육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서로 도와주고 사는 거지, 뭘.”
김육 역시 김경여에게 빚이 있는 몸이었다.
친히 안내를 해줘서, 라곤 했지만 대충 둘러댔을 뿐이다.
이렇게 현지 목민관들에게 점수를 따 두어야 대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을 때 차질이 적다.
굳이 적극적인 협조를 약조하지 않더라도, 고을의 주의를 훼방하는 고질병이 해결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 * *
김육과 김경여는 백마강에 이르렀다.
장대하고 잔잔한 물길이 굽이굽이 흐르는 백마강의 풍경은 장관이라는 표현도 부족함이 없었다.
햇볕이 바스라지는 수면에는 쪽배가 듬성듬성 놓여 그물 따위를 놓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작은 돛을 단 나룻배 한 척이 사공의 인도를 받으며 나아갔다.
행인일 나룻배 손님은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몸을 돌려 김육과 김경여 일행을 돌아보았다가, 금세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관청이 있는 이쪽에서는 합류하는 지류가 크지 않지만, 지형이 평탄하고 포구가 작게나마 있어 세곡을 옮기는 데 차질은 없습니다.”
“백마강 반대편은?”
“현 경계 너머에서부터 발원하는 금강천金剛川이 맞은편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백마강에 합류합니다. 수량은 나쁘지 않습니다. 남쪽 경계는 금양천金陽川과 맞닿는데, 포구가 있습니다.”
“매우 양호하군. 월경지나 돌출지는 없나?”
“동쪽으로 석성현石城縣쪽에, 마을 하나가 산세 너머로 넘어가 있습니다.”
“세곡을 운반하려면 석성현감의 도움을 받아야겠군?”
“골짜기 길은 있습니다만, 석성현감의 도움을 받아 수로를 사용한다면 훨씬 운송이 용이하겠지요.”
김육은 미간을 문질렀다.
월경지와 돌출지.
고을의 여타 영역과는 연계가 비효율적인 형상으로 뻗아나가 있거나, 심지어는 경계 너머 다른 고을에 외딴 섬처럼 덩그러니 놓인 파편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여타 지역보다도 향촌이 발달한 하삼도에서 특히 심각했다.
충청도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일대는 행정구역이, 거의 바위에 내던진 도자기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으니까.
안동에서 같은 안동으로 이동하는데 고을 두 개는 가로질러야 할 정도다.
‘산세 하나라면야…….’
언젠가 날 잡고 고쳐야 할 문제이긴 했다.
지형지물은 인력으로 어쩌기 힘들지만, 행정구역은 순전히 사람이 만들어냈고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세곡의 운송은 나라 운영의 밑바탕이다.
그처럼 중대한 업무를 불합리하게 만들어놓고서, 알아서들 잘 옮기라며 으름장을 놓는 건 상부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다.
“그쪽에서 세곡을 옮기는 건, 석성현감에게 도움을 받는 것으로 하세. 어쩌면 아예 석성현으로 이속移屬될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정리가 필요하니 오늘은 이쯤하고 귀환하세. 강 건너편은 내일 방문하지.”
“예.”
객사로 귀환한 김육은 김경여에게 청해 부여현의 지도를 빌렸다.
그리고 자신이 작성하고 있던 충청도 지도에 복사해 그렸다.
이 시기의 지도가 다 그렇듯, 축적이 부정확했으므로 김육은 옮기는 데만도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미진한 부분이 매우 많았다. 지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정확한 지도가 있었다면 직접 답사하는 수고도 크게 덜었을 텐데.’
김육은 자신이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는 최소화하기 위해 답사를 마친 백마강 동쪽만 그려넣었다. 그래도 긴가민가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 * *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이게 더 정확할걸세.”
답사도 끝나고, 김육의 지도에도 부여현이 그려졌다.
지도에서도 부여현은 산세로 에워싸여 바구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꺼운 백마강이 흐르고 있었고, 서편에서 합류하는 금강천과 금양천 하류도 그려져 있었다.
“반나절만 빌려주시겠습니까?”
“그러시게. 그럴 의도로 보여드린 것이니.”
“망극합니다.”
김경여는 아전을 불러 지도를 맡겼다.
“여기 있는 부여현과 근방의 지리를 그대로 확대해서 옮기되, 지도를 손상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네. 영감께서 친히 작성하신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아전이 지도를 신줏단지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물러났다.
“평소 서화에 관심이 많다면서 틈틈이 백마강변이나 망월산望月山자락으로 나들이 가는 자입니다. 이번에 해내는 걸 보면 서화 타령이 진심이었는지 변명거리에 불과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이 사람 생각엔, 진심이었던 편이 그치가 더 고생할 것 같구만.”
김경여가 옳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도를 다시 작성할 생각은 전연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과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더 자세한 지도를 완성해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군.”
김육은 부여현을 떠나기 전, 김경여가 차마 해결해두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