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29화
“……끄응!”
사나운 선비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판결을 내린 사람이 다름 아닌 종이품 영감이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는 건 알지만, 객관적으로 신뢰 가능한 증좌들을 취합해보면 이것이 최선의 결론일세.”
김육의 단언에, 음흉한 선비가 아뢨다.
“영감의 판결에 따른다면 소인은 이전 판결만도 못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한 번만 더 재고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없네.”
“…….”
“그대가 제시한 증거는 많았지만, 대부분 신뢰도가 떨어졌네. 송사는 종문권從文券이지. 가장 중요한 증문證文의 효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니, 합의점의 중심이 상대방에게 옮겨가는 건 당연한 이치일세.”
김육의 말에 내내 평정을 유지했던 음흉한 선비가 입술을 말았다.
“보통, 같은 건으로 소송이 이렇게 반복되는 경우는 없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분쟁이 이어진 건 두 사람이 거듭 수령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편법적으로 쟁송을 지속했기 때문일세. 이건 비리호송非理好訟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되네.”
그러니 김육의 최후 중재안은 동시에 통첩이기도 했다.
“결송입안決訟立案(판결문)에 수결하시게.”
아전이 결송입안과 세필을 내밀었다. 먼저 응한 쪽은 사나운 선비였다.
종육품인 부여현감에게는 거칠게 대들었던 그였으나, 재상의 지위를 앞둔 종이품 영감에게는 그럴 수 없었는지 일필휘지로 수결을 남겼다.
한쪽이 중재안에 응했으니, 다른 쪽도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버틴다면 상대와는 물론, 참판과도 척을 지게 된다. 도리어 철퇴를 맞을지도 몰랐다.
“끙.”
음흉한 선비가 신음과 함께 수결을 남기자, 김육이 풀어진 낯으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나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니, 의기투합하여 원망해도 좋네. 이미 쟁송에 있어 합의한 구석이 있으니 또 마음을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
“그러나 싸움만은 여기서 끝내셔야 하네. 그렇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물론이고 대대로 현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을 거야. 양자 모두 자손들이 그런 데 심력을 낭비하면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4대를 연이어 학문에서 성취하지 못하면 반가의 특권을 박탈한다.
그리고 여기서 학문의 성취란 국가 시험에서 합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과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살벌한 경쟁률은 소과나 대과나 크게 다르지 않다.
급제는 서로 소송을 걸어대는 와중에도 느긋하게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쟁송은 이쯤하고 사대부의 도리를 다 하는게 양자 모두 이로울걸세. 이 사람은 어느 쪽을 먼저 한양에서 볼 수 있을지 궁금하군.”
“…….”
두 선비는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만 퇴청들 하시게. 각자 결심이 선 듯하니 괜히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아전이 대문을 열어주자, 두 선비는 서로를 밀쳐대면서 앞다투어 관청을 빠져나갔다.
그 광경에 김경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닐세.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오히려 기쁘지.”
김육은 대청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서 내려와, 비껴선 김경여를 마주했다.
“백성들이 헛되게 고생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했지?”
“……예, 감히 그렇게 부탁드렸습니다. 돌이켜보니 주제넘게 말씀을 올린 듯합니다.”
답사는 물론, 월경지와 돌출지까지 고려하고 향후를 위해 지도마저 친히 작성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백성들의 공력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김경여가 당부하기 이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목민관이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백성들의 마음까지 달랠 수 있다면 좋겠군.”
“……말씀하시지요.”
“지난 겨울 한양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더군. 개천을 보수하는데 일개 여염들의 찬반까지 조사했다는 거야.”
한양의 백성들은 매우 오래전부터 개천을 손봐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던 참이었다.
때마침 나라가 나서서 여론을 취합하니, 결과는 분명했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원자가 끊이질 않았다는군. 모두에게 필요성을 상기한 덕분이겠지.”
“……대업도 마찬가지겠지요.”
새로운 길을 내는 건,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공납 제도를 선혜법으로 대체하기 위함이다.
이런 궁극적인 목적을 알리지 않고 단순히 ‘다 너희 좋아서 하는 거다’ 식으로 노역에 동원한다면, 설령 노동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유쾌할 백성은 없었다.
“강원도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 경험 있는 송애松厓라면 더 잘 해내겠지.”
“받들겠습니다.”
김육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사로 향했다.
휴식을 취하려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김경여가 곧장 따라붙었다.
“바로 떠나시렵니까?”
“여기 일은 다 마쳤으니 가야지.”
“석반은 들고 가시지요.”
김육은 실소를 지었다.
“송애松厓, 한양에서 보세.”
“……예.”
김육은 수행원들을 집결시켜 여장을 챙겼다. 김경여는 떠나는 오랜 친우를 배웅하고자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냐는 당부에 동헌 문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육이 떠나간 뒤 김경여는 아전들을 불러모았다.
백성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해야, 쉽고 확실하게 선혜법 시행의 편의와 육로 및 선창 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 * *
아파태는 고민했다.
‘이 술을 마셔야 하나?’
그는 조선에 사신으로 방문한 참이었다.
왕은 하마연을 베풀어주었으나, 지난 방문 때 연회에서 만취하고 벌인 실수를 떠올리니 술잔을 좀처럼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크흠.”
아파태가 한참 만지작거리느라 미지근해진 술잔은, 내용물을 비우지 못한 채 다시 소반으로 내려왔다.
“입맞에 아니 맞습니까?”
우의정 이상의였다.
차림새가 매우 이상했는데, 관복 위에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른 봄이라 이따금 날씨가 추워지곤 한다만, 내내 추운 것도 아니고 오늘은 오히려 따뜻한 편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작자인가.’
얼핏 짐작되는 연배를 보면 그럴 법도 했다.
“오늘은, 영 술이 당기지 않는군.”
“허어……. 하마연의 주인공인 사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술을 마시겠습니까?”
“…….”
“기껏 자리를 마련한 우리 체면도 생각해 주시지요.”
이상의의 발언에 동조하듯 다른 참석자들이 일제히 술잔을 손에 든 채로 아파태를 주시했다.
그 빤한 시선에, 아파태는 한숨을 쏟아내고서 술잔을 기울였다.
‘……맛은 있군.’
이곳이 호랑이 아가리 속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면 당장에 술병을 들어 비워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명줄이 붙들린 상황이다. 목숨보다 술맛이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호랑이가 앞에만 있느냐?
뒤에도 있었다.
비록 염원하던 아민 축출에는 성공했으나 안산 공방전에서는 지휘하던 병력을 크게 손실했다. 명군과 명인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한 탓이었다.
가까스로 손에 잡힐 듯했던 패륵의 지위가 저만치 달아났다.
그리고 한은 대조선 외교의 전문가로 포장된 아파태를 다시 한 번 조선으로 보냈다.
조선이 국경에서 보인 도발적인 행보 탓에, 명군의 침공을 조기에 대응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말도 안 되는…….’
자신이 조선 왕 같았어도 파안대소를 내지를 헛소리였다.
강을 넘어 쳐들어간 것도 아니고, 제 땅에서 공사 좀 일으켰거니와 왜 엄한 곳에 혈전의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그러나 아파태는 한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동경의 소요사태와 안산의 공방전으로 한은 위신이 크게 추락했다.
일대에 명군과 명인들로 시산혈해를 펼쳤다지만, 한가닥 하는 패륵과 공신들에게는 유치힌 분풀이로만 비칠 따름이다.
아파태마저 그리 느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늙고 망신을 당했다지만 한은 한.
패륵들은 경쟁자를 탈락시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한을 지지할 수 있었고, 한 역시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기 위해 누구라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
‘내가 그 제물이 되어줄 필요는 없지…….’
한의 몰상식한 지시를 따른 건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귀국했을 때 고초를 면하고 싶다면,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쯧!”
아패태는 속이 타는 기분에 자중하던 술잔을 재차 기울였다.
맛을 빌어먹게도 좋았다.
* * *
“한동안 입에 술을 대지 않고 똥 마려운 개처럼 앓는 소리만 흘리더니, 인상을 찌푸리고는 연거푸 마셔댔습니다.”
하마연에 참석했던 이상의의 보고였다.
“지금은요?”
“완전히 곯아떨어졌으니, 지금쯤이면 숙소에서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저번에 크게 데이고도 재차 만취한 걸 보니 부담이 큰 모양입니다.”
누르하치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들어주게 생겼으니까.
그러나,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는 어울려줄 의향이 있다.
후금 내에서 조선을 향한 적대감이 과해져서 좋을 건 없기 때문이다.
‘홍태주의 속마음도 알지 못하겠고.’
일전의 만남에서는 강짜를 놓아 조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은 새겨주었다.
그러나 홍태주는 야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실제로 실현해낸 인물.
앞에서는 중립국 주장을 납득한 척 수긍하면서도 뒤에서는 칼을 갈고 있을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래서 국경에 요새를 쌓는 것이기도 하고.’
틈을 보였다간 홍태주가 돌변하여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태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 역시 내가 국익과 상관없는 억지에 어울려 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테니까요.”
속에서 나름의 계산을 하고 왔을 터였다.
이에, 예조판서 남이공이 한 발자국 나섰다.
“이번 사신의 방문은 후금 전체는 물론, 노적 개인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함이옵니다. 그렇다면 거래의 대상 역시, 사신 개인만 아니라 후금 전체는 물론 노적도 포함된다고 해야 할 것이옵니다.”
크게 뜯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아파태의 의사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후금이나 북적이 위신 회복의 대가가 과하다고 생각되면 훗날 아파태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제거할 테니까요.”
아파태는 그런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파태는 제 목숨마저 버려가며 후금이나 한의 위신을 회복시키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이복형제인 아민을 숙청하고자 뒤에서 결탁하는 일부터 없었을 테지.
남이공이 재차 고했다.
“과연 노적은 탐욕스럽고 비열한 인물이니, 그 한 사람에게서는 취할 것이 많지 않고 본인 역시 달가워하지 않겠으나, 반대로 후금 전체나 아파태에게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면 협상의 여지가 넓어지겠사옵니다.”
고개를 끄덕이니 남이공이 마저 고했다.
“그렇다면 두 부분에 각기 중점을 두고 협상을 시행함이 어떻겠사옵니까? 국익의 최대한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제신을 돌아보니, 이론을 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오랑캐 따위와 협상한다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할 뿐.
마치 제가 북방군을 창설하고 훈련시키며 새 전술을 마련하고 무구를 지원한 양, 고작 한 번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후금을 발아래로 여기는 걸 보니 역사가 바뀌어도 기고만장한 특유의 태도는 어디라고 가지 않는구나 싶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이겼다고 정신을 차릴리 없었다.
나는 쉬이 고쳐지지 않을 고질병을 지적하는 대신, 남의공의 제안에 답했다.
“후금 전체와의 협상은 영의정께서 맡아주세요. 사신으로서 대하기 이전에, 아파태 개인과 현 정세를 논한다는 태도로 임한다면 아파태가 먼저 적절한 제안을 제시할 겁니다.”
당장 아파태에게 있어 후금은 자신의 것보다는 누르하치, 홍태주의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무엇은 쉽게 취할 수 있고 무엇은 취하기 어려운지 알아서 알려주겠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예조판서께서 아파태를 상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전에 명 사신들이 방문했을 때 보여주신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울음까지 터뜨려가며 두 사신에게 환심을 샀으니까.
21세기였다면 연기자로 대성했을 자질이다.
그러나 남이공은 그 시절이 장밋빛은 아니었다는 듯, 거론과 함께 인상이 굳었다.
칭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