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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30화 (130/380)

인조, 명군이 되다 130화

“난 이미 영의정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걸 말했소만.”

아파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사실상 왕을 대신해 나온 영의정과 교섭을 끝마친 참이었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유감과 위로를 표명하면 대금大金은 감사와 함께 금 삼천 냥을 제공한다.”

대가가 작지 않았으나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금나라가 바라는 건 조선이 저들과 친해지고 명나라와는 멀어지는 것.

조선의 그 같은 입장 표명은 명나라로서 달가워할 일이 아니었다.

또한 조선이 금나라 내부의 흉흉한 분위기를 인지하고서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금과 한의 체면도 회복된다.

“대신 금 오백 냥은, 개인적으로 돌려받기로 하셨다고.”

남이공이 덧붙이자 아파태가 인상을 썼다.

“나는 대금과 조선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거래 조건을 제시했소. 객관적인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으니, 그 수고비를 받아 챙기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하오만?”

아파태는 당당했다.

첫 방문 때 유력한 한 후계자인 홍태주를 모욕한 건으로, 이미 코가 꿰였다면 꿰인 마당이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금 오백 냥이야 장난일 따름.

남이공이 웃었다.

“문제 될 건 없지요. 단지, 고작 오백 냥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요?”

“금한에게 자존심을 살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아파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보다 못한 아비라고는 하나 그래도 아비였고 대금의 한이다.

마치 베풀어준다는 투의 말이 기꺼울 리 없었다.

남이공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금 일만 냥이라면 하사의 형식을 취하겠습니다.”

하사下賜란 말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하사의 형식을 취해주겠다는 건 조선이 금한을 웃전으로 대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선이 진심으로 굴복한 것이 아니니 실질적인 의미는 없겠으나, 지금의 한은 그렇게라도 체면을 회복할 기회가 절실했다.

금 칠천 냥이라면 오히려 싸게 치르는 셈이다.

그러나, 아파태는 곧장 미끼를 물지 않았다.

“조선에서 관리들과 먹물깨나 마셨다는 자들은 명나라를 제 나라보다 더 받들고, 황제를 제 왕보다 더 받든다던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도 되겠소?”

“많은 사람이 그렇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철산부의 참화를 접한 직후 동강진 척결을 실천환 왕부터 그러했으며, 왕이 수족처럼 부리는 삼의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아가 최근에는 육경과 여느 재상들도 명나라를 향한 시선이 예전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단판승일지언정, 의주대첩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니까.

그런데 천하의 대명제국은 여전히 후금군을 상대로 쩔쩔매는 중이다.

안산에서 분전하여 후금에 타격을 입혔다지만, 어쨌거나 패배는 패배.

“명나라의 패권에 이견을 가지는 사람은 없지만, 이전처럼 명나라에 무작정 굴종하겠다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고작 싸움에서 한 번 이겨놓고 콧대가 올라갔다는 말이오?”

“한 번 이긴 건 맞지만, ‘고작 싸움’은 아니지요. 그 뒤로 유력한 후계자인 홍태주와 이패륵인 아민을 포함해 한의 아들 네 명이 한양에 모이지 않았습니까?”

노적의 자식을 포로로 사로잡거나 입조시키는 건 대명에서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당연히 콧대가 올라갈 수밖에 없지요.”

“좋소. 명나라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건 그렇다 치고, 한께 예를 표하겠다는 건 가능한 일이오?”

“순전히 재물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서 일선을 넘지 않겠다면, 어울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나의 수고비는?”

“금 천 냥을 더 드리겠습니다.”

아파태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칠천 냥을 더 뜯어낼 생각이면서, 고작 천 냥만을 양보하겠다니. 아니될 일이다.

“이천 냥.”

“천오백 냥.”

“그대가 필사적으로 아끼려는 재화도, 내가 한을 잘 설득해야만이 그대들 손바닥 위에 떨어진다는 것을 망각하지 마시오.”

“그래서 오백 냥 더 쳐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도합하면 이천 냥이니 이쯤 하시지요.”

아파태는 남이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이공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 한 점 없이, 은근한 미소만을 그릴 따름이었다.

어색한 침묵 끝에 남이공이 말했다.

“어차피, 사신께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나눠줄 수고비가 절실하지 않습니까?”

과연 그러했다.

아파태는 아직 입지도 세력도 위태로웠다. 이번 협상 결과에 한이 크게 만족하여 패륵으로 삼아주더라도, 독이 든 술잔에 가깝다. 불어날 질시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태는 재화가 절실했다.

무수한 질시의 시선에 맞서 더 많은 방패와 칼을 갖추고, 지난 공방전에서 상실한 병력도 충원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금 이천 냥은, 국가 단위에서는 그리 대단치 않을지 몰라도 한 세력을 이끄는 개인에게는 충분히 야망을 진전시킬 거금이었다.

“서로의 사정이야 너무 뻔한데 괜히 힘 빼지 맙시다.”

아파태는 남이공이 제법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자리 같았으면 뺨을 올려붙였겠지만, 조선에서는 근질거리는 손바닥을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 많은 금화가 필요한 거요?”

남이공이 용처를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아파태는 그것으로 금 오백 냥을 정보료로 갈음할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를 남이공도 읽었는지 사뭇 진지해진 태도로 말했다.

“아조는 경기와 가까운 지역부터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있소이다. 그동안의 방식은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쇄신하는 것이요.”

효율 문제보다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는 쪽이 현실에 더 가깝겠지만, 외인에게 나라의 치부를 고백할 필요는 없었다.

“그 쇄신의 제반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과 재물이 소모되니, 국고를 더 비축해두려는 거요. 금 팔천 냥은 거기에 조금 보탤 뿐이지.”

남이공의 대답을 경청하던 아파태는 한숨과 함께 의자에 푹 늘어졌다.

혹여 써먹을 법한 정보일까 싶었으나, 아직 후금을 쟁취하지 못한 아파태에게 일국의 세금 변화란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파태는 훗날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세법이 기존의 어떤 제도에서, 어떻게 변화한단 말이오?”

“세금 상당분을 현지에서 나는 특산물로 대체하던 제도에서, 납세를 세미稅米로 일원화하게 되었소이다.”

아파태에게는 여전히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들은 것이 있으니, 값은 치러야 했다.

“……좋소. 그대의 제안은 한에게 전달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럼, 답변이 돌아올 때까지 한양에서 계속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남이공이 태도를 바꿔 다시 가볍게 응대해 왔다. 아파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고 싶지 않으니까.”

* * *

그런 아파태의 희망도 위기를 맞이했다.

국경에서 홍태주가 ‘또’ 한의 답서를 들고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민을 송환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지요?”

소식을 전한 남이공이 은근히 묻자, 아파태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분이 나빠 도저히 얌전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지라 낯을 붉힌 채로 주변을 서성거리던 참이었다.

“비슷한 일이 아니라, 똑같은 일이요! 그때도 홍태주가 한의 서신을 가져왔지!”

“홍태주는 유력한 한 후계자입니다. 그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거듭해서 아조로 보낸 이유가 뭘까요?”

조선의 신하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민의 송환을 요구할 때야, 그의 지위인 이패륵을 조선으로 치환하면 이왕자에 좌의정을 합한 것이니 천 번 양보해서 세자 후보가 나설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왕자인 자송합도 아민과 같이 억류되어 있었고.

하지만 이번은 아니잖은가.

일국의 후계자가 궐밖 마실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재적 적국을 거듭 방문한다는 건 모험이 아니라 만용에 가까웠다.

오랑캐의 습속이 원래 그러한 것일까?

남이공이 제신의 의문을 대변하자, 아파태마저 저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말고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아니, 유력한 후계자에게 하사의 의례를 주관시켜 자신과 홍태주 모두의 입지를 굳히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겠군.”

아파태는 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면, 본인은 적지에 보내는 첨병처럼 조선의 수도가 안전한지 시험 삼아 먼저 던져보는 용도가 되어버린다.

분개하고도 남을 처사였다.

“홍태주는 용맹하면서도 간교한 인물이요. 귀국 전하께서도 잘 아시는 듯한데, 혹 이참에 우환을 미리 없앨 생각은 없으시오?”

“그러면 바로 전쟁이지요.”

“그걸 한과 금도 믿고 있으니 이처럼 방자하게 홍태주를 한양까지 보낸 것 아니겠소!”

조선이 더 대들지 않고 유감을 표명한 건, 전적으로 아파태 본인의 업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홍태주가 거듭 끼어들어서 자신의 공적을 잡아먹는단 말인가?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오!”

아파태가 박대에 분개해 말 그대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인 한에게 방자하다 하니, 남이공은 그저 쓰게 웃었다.

“홍태주를 입국시킨 의도가 과연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일단 두고봐야지요.”

“놈에게 놀아날 필요 없소! 입국을 금지시키고 돌려보내시오!”

“홍태주는 이유 없이 조선을 방문한 게 아닙니다. 조선이 사신을 통해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한이 응하여 답서를 작성했고 홍태주는 그것을 가져왔지요.”

그런데 홍태주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건 마치, ‘돈 내놔!’ 하고는 주겠다는 상대방의 말에 ‘필요 없어!’ 하고 일갈하는 꼴이었다.

“조선이 새로운 사신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홍태주의 태도를 지켜보고 결정해야지요.”

홍태주가 만약, 제가 진정으로 상국의 사신인 양 진지하게 하사의 의례를 준수하고자 한다면 남이공이 경고한 일선을 넘는 행위가 된다.

그다음에는 아파태가 소망하는 상황이 이어지겠지.

그러나, 홍태주가 조선을 재차 방문하는 만용은 보여주었어도 나아가 한양 한복판에서 조선을 적으로 만들 가능성은 낮았다.

졸지에 첨병으로 전락한 아파태와 달리 홍태주는 유력한 후계자니까.

한동안 씩씩거리며 방황하던 아파태가 말했다.

“조선에 귀부할 수는 없겠소?”

“진심은 아니시겠지요.”

“이딴 취급을 계속 당하느니 차라리 이 땅에서 사는 게 훨씬 낫지!”

말은 그러했지만, 진심으로 귀부하고 싶다는 투는 아니었다.

단지 한의 어이없는 편애에 심각하게 빈정이 크게 상했을 뿐이다.

“홍태주를 밀어내는 게 쉽지 않겠습니다.”

남이공의 말에 아파태는 그 뻔한 소리를 굳히 할 필요 있었냐는 듯 눈총을 보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홍태주보다는 사신이 한이 되는 게 더 어울리니까요.”

“나를 우습게 여기는군.”

“홍태주가 한이 된다면 피차 이롭지 못하게 된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아파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용맹에서나, 지략에서나 홍태주는 몇 발자국이나 더 앞서 있다.

더욱 기분이 나쁜 건 그런 홍태주가 자신과 고작 손아랫동생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대선이나 아민이 그 같았다면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고작 손아랫동생이 그 같이 재주와 후계자의 지위를 뽐내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부딪혀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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