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1화
“그대가 홍태주를 죽여준다면 확실하게 도움이 될 텐데.”
남이공이 웃으면서 답했다.
“전쟁이 날 수 있다지 않았습니까.”
아파태도 알면서 굳이 해본 말이었다. 홍태주를 제거할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지만, 당장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는 그 방법에 의향이 없었다. 그러니 미련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해줄 수 있소?”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서성거리던 아파태는 탁자에 두 손을 얹고서 삐딱하게 섰다. 탁자가 가벼웠다면 우스꽝스러운 꼴이 벌어졌겠지만, 사신을 위한 접대용 가구라 그리 허술하지는 않았다.
아파태는 고개를 처박은 채 노려보듯이 남이공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그러했듯 홍태주에게도 실수를 유도해 약점을 잡아보시오.”
“홍태주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런 시도가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파태는 남이공의 대답이 어련하다 싶었다. 물론 시도했겠지.
남이공이 마저 답했다.
“약점을 잡는 것도, 상대가 틈을 내줘야 가능하지요. 홍태주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방문이라고 예외일 것 같지는 않군요.”
“물리적인 위해도 가할 수 없지만, 약점조차 잡지 못하겠다면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게 뭐요?”
“그것을 직접 정하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쓸만한 정보를 제공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아파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홍태주의 타고난 강점을 제외하고, 그의 후계자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건 다른 패륵들이 중대한 결점을 안고 있다는 데 있소.”
“말씀하시지요.”
남이공이야 여느 제신과 마찬가지로 후금의 내부 사정이라면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대선은 사생활이 지극히 구차하고 한심하오. 한 번은 아들인 석탁碩託이 잠시 실종했을 때, 대선은 녀석이 명나라의 도주를 시도했다며 참살을 권했었소.”
“아비가 말입니까?”
“후처에게 푹 빠져 있었거든. 그때 쇼토는 후처의 구박에 못 이겨 잠시 가출을 했었을 뿐이요. 그리고 대선은 한도 쇼토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는 걸 알지 못했지.”
누르하치도 계모에게 핍박을 받았던 역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식이 손주를 상대로, 제 아비가 당했던 짓을 그대로 행하고 있으니 얼마나 분개했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이패륵인 아민이야, 지금은 지위를 박탈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났지만 그 전에도 후계의 희망은 없었소, 반역자인 서이합제舒爾哈齊를 이었으니까.”
그래서 아패태는 아민을 사대패륵 중에서 가장 만만하게 여기고서 그의 축출을 시도했다.
차도살인은 끝내 성공했지만, 아직 공석을 차지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것이 아파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혹여 다른 누군가가 공석을 차지하게 된다면 남 좋은 일만 한 꼴이니까.
“삼패륵 망가퇴亡可退는 한의 대부인이었던 모친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입고 실각당하자 직접 살해했소.”
“으음…….”
남이공으로서는 마찬가지로 알고 있던 바였으나, 존속살해란 야만스런 오랑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오랑캐라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자식이 제 모친을 죽이다니.
그러나 망가퇴의 사정이야 진부할 뿐이었던 아파태로선 평이하게 이를 따름이었다.
“대부인이 비록 실각했지만, 목숨은 부지했소. 한이 진노했지만 죽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는 의미요. 하지만 망가퇴는 대부인의 실각으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으니, 성정을 참지 못하고 제 모친을 죽여버린 것이지. 결과적으로는 제가 더 걷어차 버린 꼴이 되었소.”
이렇게 다른 사대패륵이 이 같은 맹점을 안고 있으니, 달리 모난 점 없고 유능한 홍태주가 후계자로서 유력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홍태주에게 유일하게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모친이 정실로 승격되기 전에 죽었다는 점이요. 그러니 따지자면 서자인 셈이지.”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금이 명나라나 조선처럼 적서의 구별이 엄격하진 않지만, 서자라서 적자보다 더 좋을 건 없지.”
“그렇다면 그 역시 맹점 아닙니까?”
애매하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홍태주의 모친이 예허나라葉赫那拉 패륵 양기누楊機奴의 딸이요. 예허가 한께 항복하고 복속했다지만, 일족이 많고 예허부 일대에서는 여전히 힘을 유지하고 있으니 뒷배로서는 상당한 셈이지. 추연이 실각한 뒤로는 청가노淸佳努의 세력까지 합세해서 더욱 그렇소.”
청가노는 양기누의 형이었다.
누르하치는 예허부를 복속한 뒤 청가노의 딸은 적장자인 추연과 맺어주고, 양기누의 딸은 자신이 측실로 들였는데 이는 예허나라를 자신의 가문과 완전히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추연이 숙청되자, 예허나라의 힘이 온전히 양기누의 외손자인 홍태주에게 집중된 것이다.
“내가 애매하다고 한 건 이 때문이요. 홍태주가 서자라곤 하지만, 뒷배만 따지자면 대선이나 망가퇴보다는 훨씬 낫지.”
대선의 모친이자 누르하치의 첫 정실부인은 집안이 대단치 않았고, 망가퇴는 아예 외척과의 연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서자인 홍태주가 능력만으로 적자들과 경쟁하는 이유였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대들이라면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정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 찌를 만한 구석이 보이시오?”
“대신 사신께서 양보를 많이 해주셔야 됩니다.”
“……일단 들어는 보겠소.”
“홍태주를 능력 면에서 압도할 사람이 없다면, 적어도 명분에서라도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대선 본인은 아닐지라도 손자들은 한의 사랑을 꽤 받는 듯한데, 대선의 적장자인 요토나 한의 현재 정실부인의 자식을 밀어주는 게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밀어주겠다면 본인은 뒤에 설 수밖에 없다.
후금의 지배를 소망하는 아파태로서는 당연히 기껍지 못했다.
“야망을 접어두고 남 좋은 일이나 하라는 말이오?”
“홍태주부터 꺾어야지요. 그러려면 당장은 누군가와 힘을 합쳐야 할 게 아닙니까?”
요토라면 명분 면에서는 확실하게 우위에 선다.
대선 본인이 후처와의 사랑에 빠져서 박대한다고 한들, 누르하치가 강제로 후계자로 삼게 했으니 대선도 별다른 수가 없다.
본인에게 야망이 있거나 훗날 호사를 누리고픈 생각이 있다면 자식이 잘 되는 편이 좋을 테지.
누르하치도 요토 형제를 안타깝게 여기니, 잘 풀어낸다면 한과 대패륵의 지지를 동시에 집중시킬 수 있다.
또한 요토라면 이미 아파태가 함께 몽골 원정에서 종군한 전우이기도 했다. 들러붙고자 한다면 여지는 충분했다.
“흐음…….”
아파태는 턱을 쓰다듬었다.
누르하치의 현재 정실, 아바하이阿巴亥의 자식들을 지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장남 아지거阿濟格는 망가퇴와 함께 종군한 적이 있었다. 요토의 경우 잘 풀어낸다면 대선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면, 이쪽은 크게 망가퇴와도 연합을 구축할 수 있다.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차남인 도르곤多爾袞을 밀어도 좋았다.
나이에 비해서 용맹하고 총명한 것이 홍태주 못지않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과 아바하이의 총애도 유난했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 나이이니, 자칫 힘이 과하게 실려 패권을 빼앗기게 되어도 섭정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어찌, 계산이 서십니까?”
때마침 입을 연 남이공에 의해 아파태의 상념이 흩어졌다. 그는 짧게 침음하고는 답했다.
“음…… 다른 누군가와 힙을 합친다는 것 자체는 이미 고려해 본 적 있소. 하지만 내키지 않았지.”
손아랫동생이 자신보다 잘나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아파태다.
그만큼 자존심도 세고, 열등감도 강한 사람이 누군가를 밀어주기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남이공이 말했다.
“이제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 할 때입니다. 아민도 실각시켜 봤겠다, 후계자의 자리도 현실적으로 노려볼만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는 그저 소망에 불과했으니 연합을 지양한다는 만용을 마음껏 부려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대패륵 하나를 숙청시키고 공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이제는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홍태주의 실각을 노리는 중이었다.
만약이 어쩌면이 됐다.
고집을 꺾어 어쩌면을 실현해 낸다면, 괜찮은 일이었다.
“……생각해보겠소. 지금 당장은 결정해도 소용없으니까.”
조선을 방문한 참이므로, 접촉할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만족하셨습니까?”
“일단은.”
홍태주를 직접 어쩌지 못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남이공이 거듭 답했듯 그건 한계가 있었다.
조선 땅에서 홍태주가 위해를 입는다면 상황이 매우 심각해질 테니까.
예전 같았다면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홍태주만 죽일 수 있다면 조선과 대금이 전쟁을 일으킨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조선이 일신우일신하여 남다른 전투력을 가진 지금, 양국이 전쟁을 일으키면 양패구상이다.
끝내 미소를 짓는 건 남의 손으로 코를 풀게 된 명나라뿐.
아파태의 야망은 금을 차지하는 것이지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폐허를 수습하는 게 아니었다.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대들은 운이 좋소.”
남이공도 지지 않았다.
“사신께서도 운이 얼마나 좋으신지요”
* * *
“오래간만에 인사 올립니다.”
홍태주가 왕과 신하들 앞에서 허리 숙였다.
후금의 유력한 후계자라도 사신의 신분으로 방문했다. 한때 으스대었던 명나라의 사신마저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된 조선에서, 후금의 사신이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홍태주는 굳이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금한께서 조선 국왕 전하께 보내는 예물입니다.”
홍태주가 손짓하자, 건장한 수행원들이 나와 대전 한가운데 상자를 내려놓았다.
쿵
상자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마룻바닥이 울렸다.
수행원들이 조심스러웠어도 그랬다.
일만 냥 순금은 미래 기준으로는 345킬로그램. 엄청난 양이지만, 금은 밀도가 높아 부피로는 18L에 불과하다.
이런 게 마루를 때리면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울릴 수밖에 없다.
왕은 굳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서 말했다.
“금한께서 양국의 우애와 화친을 위해 이렇게 진심어린 선물을 보내주니, 내 아주 기쁩니다.”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금한에게는 내 따로 사의를 표하지요. 금한은 나의 기쁨을 생생하게 전해받을 겁니다.”
남이공을 통해서는 ‘금 일만 냥이면 하사로 받아들이겠다’고 전했다.
그것으로 누르하치가 원하는 대가는, 그와 다른 패륵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행해지는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일국의 군주에게 존중을 담아 보내는 전언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금한의 관대함이 어떻고, 교린의 의사가 어떻고, 고마운 마음이 어떻고 하는.
그래야 신하들에게 보여줄 게 생기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사신까지 보내준다면 누르하치로선 공중제비도 돌 일이다.
사신을 파견한 국가의 명분이야 어떻건, 후금도 왜국처럼 사신을 제후의 사절로 포장해 위신을 드높일 수 있으니까.
조선의 왕은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어쨌거나, 아파태가 기대한 홍태주의 미친짓은 실현되지 않았다.
홍태주가 숙소에 몸 성히 귀환한 것을 확인한 아파태는 남이공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힘을 실어줄 대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