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32화 (132/380)

인조, 명군이 되다 132화

짧은 기간 능동적인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일까.

명과 후금은 경쟁적으로 사신을 보내왔다. 특히 후금은 유력한 후계자인 홍태주를 거듭 파견했다.

세자에게 배울 기회가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다.

이번 역사에서는 불투명해졌지만, 홍태주는 한 세상에서 후금을 중원에 들여놓은 영웅이다.

그의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겠으나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

야망, 그리고 사세를 분석하는 지혜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행동력. 야만적인 세계에서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골육상잔 끝에 정점에 이른 자 다운 자질이다.

불안한 마음도 크다.

조선의 존재감이 강조되는 만큼 동북아의 구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게추에 무게추 이상의 힘이 실리면 세력이 된다.

양강의 구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잃고, 명과 후금이 서로 못지 않은 경쟁 대상으로 여기리라.

‘박쥐가 편한데.’

그렇다고 숙일 수는 없다.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만스러운 사회에서는 약한 자가 먼저 노려지듯 야만스러운 시대에서는 약한 세력이 먼저 노려지기 때문이다.

인조만 아니라, 광해군마저 후금을 상대로 허세를 부려댄 이유다.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왜병 백만을 부르겠다고 했지…….’

광해군이 후금 사신에게 전하려던 말이었다.

신하들이 너무 나갔다고 만류해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국서國書는 한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상마연에서, 홍태주가 귀국을 앞두고 말했다.

“사패륵이 직접 맡아준다니 크게 안심됩니다.”

“전하의 서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홍태주의 말에, 그와 동석한 아파태는 무척이나 아니꼬운 낯이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았으니 더 그렇겠지.’

더 많은 금을 챙기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아파태가 제공한 정보의 수위가 매우 높았다.

조정에서는 거의 옆집처럼 들여다보게 된 패륵 간의 알력다툼만이 아니었다.

원 제국 옥새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의 준비는 물론, 동경의 통제를 포기하고 훨씬 북쪽인 심양瀋陽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알게 되었으니까.

‘명나라나 북원의 릭단 칸이 알게 되면 누르하치가 곤란해질 정보들이지.’

재물에 대한 과욕이 주효했겠지만, 나에게 신뢰를 보여준 셈이다.

그러니 협조와 신뢰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국서를 맡기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사대패륵인 홍태주를 두고 번듯한 직책조차 없는 아파태에게 국서를 맡기는 건 이상한 짓이야.’

홍태주 앞에서 대놓고 수상한 관계라는 걸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금은 추후 지불하겠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에서 받은 게 분명한 금 2천 냥을 가지고서 홍태주와 함께 귀로에 오르겠다고?

‘불안한 건 알겠는데, 서로 믿자고. 좀.’

못 믿으면 어쩔 텐가. 다 죽자는 식으로 자폭이라도 할 건가?

홍태주를 제끼겠다는 야망을 가지고도 이런 데서 불만을 가지면 안 되지.

‘불안하다, 불안해.’

연회가 끝나고 나와 사신들이 일어서자 신하들도 뒤따라 일어났다.

잠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틈타 아파태가 성큼 다가왔다. 홍태주의 시선도 함께 끌어온 채였다.

“전하.”

아파태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홍태주가 보고 있습니다.”

“국서도 아니 맡겨주시고, 셈마저 나중에 치르겠다고 하신다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홍태주가 귀로에 함께 하지 않습니까.”

“이천 냥 정도는 쉽게 숨길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불안하시다면, 절반이라도 주시지요!”

“금이 부피가 작은 건 맞지만, 무겁고 눈에 잘 띕니다. 어디서 났는지 분명한 금을 노련한 홍태주가 알게 된다면 사신은 홍태주에게 끌려다니게 될 겁니다.”

“…….”

아파태는 입술을 말고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홍태주가 있는 자리였다. 그는 아파태가 자신을 의식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귀만은 이쪽으로 집중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주 홍보를 하는군.

“이제 홍태주가 나와 사신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불안해서 그럽니다!”

아파태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기척을 죽여 소리는 없었으나 용포 가슴께가 흔들려 알았다.

“전하의 신하가 제게 무어라 했는지 아십니까?”

“압니다.”

남이공에게 보고를 받았다.

“그 금이 있어야 사람을 사고, 연합할게 아닙니까!”

아파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기척은 죽여도, 감정은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곤란하군.’

귀로에 오르는대로 홍태주는 아파태에게 나와 오간 대화를 추궁할 테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 아파태가 냉정하게 대처하리란 기대는 들지 않았다.

“당장 금을 가져갈 방법은 있습니다만, 추천은 못 드리겠습니다.”

“뭐요? 방법이 있지 않았소!”

“추천은 못 드린다고 했습니다. 조선에서 공공연하게 금을 받아간 다음에는 한에게 어떻게 소명할 생각입니까?”

“그럼 비밀스럽게…….”

“그러다가 걸리면 그대만 아니라 나까지 곤란해집니다.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면, 혼자 감수하세요.”

아파태의 얼굴은 여전히 벌건 채였다.

홍태주의 존재가 그를 다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조선 전문가라는 유일한 우위를, 거듭 뒤따라온 홍태주가 완전히 뭉개버렸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자신의 이점을 압도해가는 상황은 누구라도 유쾌하지 못하다.

하물며 아파태는 안산 공방전에서 친위대를 상당수 상실한 상황.

팔기를 거느리지 않기에, 그의 친위대는 본디 규모가 작고 회복이 어렵다.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수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파태의 언성이 올라갔다.

이제는 말소리를 줄여야 한다는 것마저 망각한 건가.

나는 내색하지 않고 집중하고 있던 홍태주에게 다가갔다. 그는 막상 내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던지, 다분히 진심 같은 놀라움으로 맞아주었다.

“전하.”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전하!”

아파태가 경악했다.

내가 홍태주에게 이실직고한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자신감으로 과욕을 부렸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먼저 온 사신이, 한이 제공한 금의 일부를 가져가고 싶다고 합니다.”

“……아.”

홍태주가 얕게 탄식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약간의 창의력이 가미되어, 나와 아파태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짐작했겠지.

옳은 추측일 거다.

아파태가 과욕을 부렸고, 나는 질색하다가 견디지 못해 홍태주에게 공개적으로 말한 거다.

더 붙어있는 내밀한 사정은 모조리 생략된 채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의심스러운 상황은 충분히 설명된다.

“두 사신 모두 양국의 오해를 종식하고자 이역만리의 타국까지 방문해주었으니, 포상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금을 나눠주고자 하는데 받아가시겠습니까?”

홍태주는 조금 더 놀라워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금한께서 전하께 보낸 금은 순전히 양국의 화친을 위한 예물인데, 어찌 사신으로 온 신분으로 탐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아파태를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로 같잖은 짓거리를 벌였다는 듯.

나는 아파태를 돌아보고서 물었다.

“귀 사신은 가져가겠지요?”

“…….”

아파태는 쉬이 답하지 못하고 나와 홍태주, 그리고 본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한을 의식하는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이목을 산 다음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져가겠습니다.”

끝내 사양하지는 않는 아파태였다. 이미 일을 벌였으니 챙기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까.

“떠나시기 직전에 붙여드리지요.”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신하들을 대동하고서 먼저 회장을 빠져나갔다.

* * *

“어찌 된 일입니까?”

영의정 이원익이 모두를 대신해서 물었다. 이렇게 아파태에게 공공연하게 금을 나눠주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파태가 불안했는지 참지 못하고 닦달하더군요. 비밀스럽게 챙겨주기를 바랐지만, 그의 조심성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공개적으로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이원익에 이어서 몇 사람이 탄식했다.

“사신이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일을 벌였으니 낭패입니다.”

좌의정 박홍구의 찬동에 이어, 예조판서 남이공이 난색을 지었다.

“아파태가 혹여 추궁당해, 그간 그와 조정 사이에서 오간 비밀스러운 사정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사옵니다.”

그랬다간 기껏 진정시켜놓은 후금의 반조선 여론에 다시 불이 붙게 된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타오르겠지.

아파태도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자백 따위 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그는 신뢰하기 어렵다.

교전의 가능성?

낮다.

당장은 북원의 후예인 릭단 칸이 가진 옥새를 탈취하려는 후금이다. 사유는 당연히 위신의 회복이겠으나, 국경의 분쟁의 수위부터가 이쪽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들었다.

언제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런 때 조선을 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후환이 될 가능성이라면 매우 크다.

애초에 몽골을 평정한 뒤 곧바로 조선으로 기수를 돌렸던 후금이다.

아파태가 조선과 내응하고 있었다는 건 전쟁을 일으키기 좋은 명분이다. 아파태의 수급을 장대에 걸어놓은 뒤 대군의 맨 앞에 세워놓고서 진격해오겠지.

‘……잠깐만. 아파태가 이실직고하지 않아도 목이 장대에 걸릴 수 있겠는데.’

후금이 조선을 치고자 작정한다면,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마침 아파태가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았나.

홍태주는 하사의 의례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걸 두 눈으로 보아 알고 있다.

조선 왕과 금을 나눠 가지기로 하고서 한을 기만했다는 혐의로 아파태를 제거한 뒤, 그와의 내통을 명분 삼아 조선을 침공한다면 전개도 매끄럽다.

그들이 조선과 전쟁을 일으킨다면 가장 좋은 시점은 릭단 칸과 그의 차하르 부족을 평정한 뒤 몽골인 전사들이 대거 확충됐을 때다.

확신은 없었다.

후금이 원정에서 큰 타격을 입어 숨을 고를 수도 있고, 조선보다는 명나라를 먼저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저들이 전쟁을 일으킬 적기가 그때인 건 분명했다. 이건 대비해 두는 게 옳았다.

“국방력을 강화해야겠습니다.”

사고의 흐름 끝에 선문답처럼 말했다.

몇몇 관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지레 기겁하냐는 투였다.

재상들은 사고의 흐름을 각자 속에서 쫓아왔는지, 의문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마침 누르하치가 자신에게 대적하라며 보내준 거금이 있으니, 국방비에 크게 보탬이 될 거다.

황제도 당해봤으니 누르하치도 이 맛을 봐야지.

* * *

“북방군을 신설할 때 정원 문제로 편제하지 못한 병력이 있습니다.”

병조판서 이광정이 말했다.

평소 그는 군축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후금과의 관계가 특수한 국면에 접어들자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방군에 편제되지 못한 병력은 기존에 소속되었던, 정확히는 소속되었어야 할 진보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을 빼낸다면 국경의 수비가 약화되겠군요.”

“그래서, 후금과 마주한 국경지대 진보들을 제외한다면 1만가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작다고는 못하겠으나 크지도 않은 숫자다.

그간은 피역자를 다시 군역에 충당시킴으로써, 군사를 거의 새로 창조해 내는 기적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그들의 과반을 이미 신설한 군대에 충군시키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돌려놓은 지금, 피역자들을 다시 어떻게 한다는 건 이곳에 괸 돌을 배어 저곳에 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군대를 원한다면 징발을 해야하는 상황.

‘……그건 어렵군.’

후금의 위협은 백성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저들에게는 징병되어도 정당할 수준의 명분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가정과 함께 파종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논일을 모두 고향에 남겨놓고서, 일면식도 없는 다른 장정들과 이역만리에서 군역을 지는 게 즐거울 사람은 없다.

나아가 군대의 규모가 늘어날수록 갖춰야 할 설비와 예산도 폭증한다.

북방군을 신설할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인재에게 군무를 맡겼음에도 북방군은 한동안 명확한 주둔지를 갖추지 못했다.

1만.

크지는 않지만, 뒷바라지까지 생각한다면 절대 작다고는 못할 숫자다.

“일단은, 옮길 수 있는 군사들부터 소집하여 새로운 군대를 만듭시다.”

“북방에 충군시키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국경의 수비를 최대한 강화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혹여 오랑캐들이 큰 피해를 각오하고서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중앙군이 없는 한양은 속절없이 당하게 될 것이옵니다.”

“중앙군이라면, 훈련도감이 있지 않사옵니까?”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무용합니다.”

고작 선조 말부터 허수아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된 훈련도감이다.

예전부터 혁파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다른 중앙군이 없는 한양에서 정규군을 해산하는 건 때로 위험한 파급을 낳을 수 있는 탓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틈타 중앙군 간판만 걸어놓은 이들은 치워내고, 새로운 중앙군을 양성한다면 일석이조였다.

“병조판서, 호조판서?”

호명과 함께 이광정과 김신국이 허리를 숙였다.

“두 분은 북방군을 신설할 때 합을 맞춰보신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두 사람은 벌써 합을 맞췄는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