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4화
수방사는 부족한 병력으로 한양을 지켜야 하는 만큼, 북방군에 이어 또 하나의 신식 군대가 되었다.
병력의 과반을 포수로 구성했으며 화력은 신식 대포인 낙서포로 보강했다.
초창기 병조와 수방사 지휘부에서는 의문을 드러냈다.
북방군의 검증된 삼수병 전술이 있는데, 왜 이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는) 극도로 개발된 한양 일대에서 북방군식 전술은 적합하지 않았다.
사람 키보다 몇 배는 더 긴 장창을 들고서 골목을 종횡무진할 수는 없다.
그 골목에 방진을 짠다면 방어력은 분명 대단하겠지만, 거미줄같이 얽히고설킨 한양의 한 구획 전체를 측후면 타격의 위협 없이 철저하게 틀어막을 수 있는 조직력이 신생 수방사에 존재하냐면, 글쎄…….
수방사는 전투원 개개의 전투력이 극한까지 강화되면서도, 복잡한 환경에서도 교전이 가능해야 했다.
때로는 적을 맞아 협동도 하면서 말이다.
극악한 조건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다.
‘내가 미래인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조선에 새로운 화약 보관법 및 생산법을 도입했으나, 당초 우려와는 다르게 기술의 유출은 발생하지 않았다.
명나라와 후금은 그만큼 화약 생산에 절박하지 않은 탓이리라.
애초에 두 국가는 조선의 물자 보급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방대한 영토에서 노동력과 자원이 썩어나기 때문에, 조선이 딴에는 화약을 많이 사용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부러운 놈들.’
아무튼, 나는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할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기왕 공적을 세운다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위신을 드높이기로 했다.
오리지널 인조와 달리 나는 이미 조정에 균형과 평화를 가져왔고, 새로운 화약 생산법을 도입했으며, 거듭된 전투에서 승리까지 거두며 확고한 권위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위에 굳이 흙 한 수레 들이붓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만약 보태야 할 위신이 있다면 후계자가 적합하겠지.
이것 역시, 내가 인조나 선조처럼 본인의 무능으로 아들을 경쟁자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다.
그래서 자리를 만들었다.
“세자야…….”
“예, 아바마마.”
“이것이 뭔지 알겠느냐.”
산속에서 은거하는 노인처럼 분위기를 잡고 물어봤지만, 내가 들고 있는 건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조총이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냐?”
나는 조총을 왼손에 두고서 환도를 뽑아들었다. 그러니 대답이야 당연하게도……,
“환도이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조총이 있고 환도가 있구나.”
“……예.”
세자는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총과 환도가 있는데, 그래서 어떻냐는 느낌이다.
먼 미래, 열도의 한 엔터테이너는 양손에 각기 사과와 펜을 들고서 흥겨운 박자와 함께 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세자에게 실마리를 주려는 것이었다.
“조총은 먼 거리의 적이라도 단숨에 사살할 수 있는 무기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그저 휘두르기 좋은 막대일 뿐이지.”
“그러하옵니다.”
“환도는 응급한 상황에서 적과 육박전을 벌일 때 용이하지만, 단창 앞에서도 쉽게 무력해지지.”
“예.”
“포수들은 이 두 가지의 무기를 함께 장비한다. 하지만…….”
세자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무기의 이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면 아주 용이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는 수준의 무덤덤한 대답.
그러나 세자는 금세 진지해져서, 양손에 들린 조총과 환도를 노려보았다.
아비가 그냥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은 모양이다.
“직접 살펴보겠느냐.”
“예.”
조총과 환도를 받아든 세자는 입술을 다물고서, 이제는 제 두 손에 쥐여진 무기들을 노려보았다.
단서는 있지만 쉬이 통찰이 따라오지는 않았는지 인상만 쓰기를 한참.
무기를 더 살펴보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세자는 눈을 감고서 고뇌에 빠져들었다.
그 진지한 모습을 보노라면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티가 난다.
‘……정신적으로만 성숙한 게 아니어서 그렇지.’
이 못된 녀석이 은근히 마누라가 필요하다고 티를 낼 때부터 짐작은 했다만, 시강관들이 입을 맞춰 지적하는 바가 있었다.
세자가 ‘조섭調攝’하지 못하고 있다고.
조섭은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몸조리’다.
그러니 조섭을 하지 못했다는 건 건강 관리를 똑바로 하지 못했다는 셈인데, 최근 세자가 몸살을 앓거나 잔병치레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건강관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다고 지적받은 것은, 실상 ‘몸 상하겠다, 이 자식아’라는 말을 굉장히 점잖게 돌려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새신랑에게.
‘세자빈, 원손들과 신축 대궐에서 알콩달콩 살겠다고 아주 발동이 걸렸구만…….’
아비와 양조모는 골방 같은 경운궁에 처박아놓은 채로 말이다.
내가 자처한 일이긴 하다만, 세자의 이 불덩이 같은 효심을 시강관들 어깨너머로 보니 내 가슴에도 불덩이가 들어차는 듯했다.
누구에게 배운 건지 아주 효심이 효심이 뜨거워.
못난 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세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그래.”
“혹시…….”
세자는 조심스럽게 두 무기를 맞대었다. 마치 천지창조와 같은 세심한 접촉이었다.
“이것이옵니까?”
세자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총구 바로 아래, 환도의 손잡이를 가져다 댄 채였다.
“그래.”
총검.
환도를 총구 아래 장착하는 것만으로, 조총을 단창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
마우리츠가 고안한 선형진은 화력 면에서 기존의 파이크 앤 샷 전술을 압도할 수 있었지만, 육박전 전문 병과가 없어 난전과 기병 돌입에 취약했다.
가위바위보 싸움인 것이다.
파이크 앤 샷 전술은 장창방진을 앞세워 기병 돌입을 거의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그래서 근접사격 기병이라는 극단적인 변종까지 만들어냈으니까.
총검은 이런 가위바위보 싸움판을 완전히 엎어버린 신무기였다.
총신 끝에 꼬챙이나 단검을 장착한다는 건 무척이나 단순한 아이디어였지만, 때로는 논리에서의 오컴의 면도날이 그러하듯 단순한 것이 가장 강력한 법이다.
총검은 장단이 분명했던 총병의 맹점을 채워주었다.
조총이 단창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난전과 기병 돌입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효용성과 효율성은, 복잡한 전투환경을 가진 한양과 주변 일대에서도 적합하지.’
수방사를 수방사로 기능하게 해줄 마지막 조각이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세자가 총검 아이디어를 가지고 수방사 원수부를 방문하는 것뿐이었다.
수도 방위라는 창설 의의와 달리 원거리 화력전에 극도로 특화된 현재의 수방사 지휘관들은 하늘의 시혜와도 같은 이 선물에 기뻐 방방 뛸 테지.
* * *
“하지만……, 이건 아바마마의 업적이옵니다.”
세자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녀석이 자식 잘 길러놔도 소용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넙죽 받아챙기지 않고 미안해하는 걸 보면.
“세자는 후대의 왕이다. 미리 신하들의 존중과 존경을 사둔다면,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들은 전하의 신하들이지, 소자의 신하들이 아니옵니다.”
신하들에게 지지받는 후계자는 대개 왕에게 위협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그 대개란, 대개 왕이 무능할 때 그러했다.
“세자가 아비의 권위를 신경 써주니 고맙구나.”
세자는 내가 놀린다는 것을 알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정 미안하다면, 나중에 네가 왕이 된 다음 신하들에게 밝혀도 그만이야. 지금은 아니다.”
“아바마마께서 잘 닦아놓으신 길을 편하게 쫓아가는 기분입니다.”
“그야 아비라면 다 자식에게 바라는 일이지. 자식이 걸어갈 길을 미리 닦아놓는 것.”
책임감 강한 세자이니 이렇게 아비에게 빚만 쌓아두는 게 편치 않을 수도 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잘난 아버지의 후광과 그늘에 가려지는 것을 한으로 삼은 후계자들도 많고.
하지만 나는 세자를 충분히 험하게 가르친다고 생각한다.
노회한 신하들에게서 음양을 가리지 않는 실전적인 경험과 교훈을 전수받거나, 장차 맞수와 적이 될 국외의 후계자 및 권력자와 흔히 대면시키는 건 일반적인 가정의 교육이 아니다.
세자가 자신의 지위가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그래서 내가 이 같은 교육을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기 때문에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더 험하게 굴려줘야 하나?’
그러면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워할 테지.
여전히 눈앞에는 책봉식을 앞두고 두 눈이 토끼눈처럼 되었던 세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래놓고는 아비가 저 대신 길을 닦네 마네 하니 가소로울 따름이다.
“꼭 너 같은 아들을 만나서, 이 아비의 기분을 똑같이 느꼈으면 하는구나.”
“놀리지 마시옵소서.”
“들리는 말을 보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듯하더만…….”
“아바마마!”
세자는 낯이 금세 새빨개져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 *
“오오.”
시제품을 받아든 장만은 총신에 고정된 환도를 감상하며 감탄했다.
“단창에 비해 더 짧고 무겁긴 하오나, 고작 고정장치 하나만으로 환도를 창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 총검의 효용은 그야말로 명약관화이옵니다.”
장만에 이어 시제품을 받아든 이완 역시, 총몸을 움켜잡고서 창처럼 내질러본 뒤 감탄했다.
“놀랍습니다. 이것이라면, 포수의 비율이 지금처럼 극단적이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장만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아차하고는 물었다.
“혹, 전하께서 수방사에 많은 포수를 두게 한 연유가 바로 총검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옵니까?”
날카로운 사람 같으니.
부원수로 이귀나 이서를 추천하던 안목답지 않았다.
“하하. 나에 대한 신뢰는 고맙지만, 총검을 개발한 사람은 세자입니다.”
세자의 등판을 툭툭 두드려주니, 딴에는 민망해하던 세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의 말이 맞다는 듯.
장소에 따라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할 줄 안다는 거다.
장만은 재차 아차 싶었다는 얼굴로, 세자에게 사과했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늙어 정신이 혼미한 탓에, 총검을 처음 거론한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세자는 입술을 움찔하고는 덧붙였다.
“……아바마마께서.”
“……?”
“아바마마께오서 그간 많은 대업을 이뤄오셨으니, 저 역시 세자로서 흉내를 내보았을 뿐입니다.”
순간 이실직고하고픈 충동을 느낀 모양이다.
영 자존심이 안 사는 걸까.
세자로서 이뤄낸 업적이 없는 건도 아닌데 말이다.
‘아파태를 그동안 잘 써먹어온 것도 다 세자가 코를 꿰어놓았기 때문이거늘.’
이제는 아파태의 명운도 영 불안하고, 또 과거의 일이 되었으니 세자로서 새롭게 체면을 차려보고 싶은 걸까?
장만은 골방으로 밀려난 늙은이와 사춘기 찾아온 아들 사이의 복잡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너털웃음만 터뜨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