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5화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수방사가 적은 정원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게 되자 나머지 절차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훈련도감의 해산도 차질없이 이뤄졌다.
병조에서는 개중 유능한 군사가 버려질 수 있다는 지적으로 취재取才를 시행했으나 기준을 통과한 병력은 오직 1할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1할은 경력과 재주가 모두 검증된 셈이었으므로 대부분 하급 장교로 편입됐다.
새로운 중앙군의 창설과 함께 방비가 강화되자 조정의 관심사는 외부로 향했다.
과연 우려한 상황이 실현될 것인가?
조용히 정세를 주시하며 내정을 다지던 조선에 희소식이 닿았다.
명나라에 진하사로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귀환한 것이다.
정사는 우찬성을 지내는 윤선이었다. 명나라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는지, 안색이 떠날 때보다 좋았다.
“경하드리옵니다.”
윤선의 첫 인사말이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명나라는 안산에서 본군이 분전한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신에게 그 비결을 분명하게 해주었습니다.”
장창 덕분에 잘 싸웠다고 밝힌 모양이다.
명이 보통 공로를 이국이 양보할 나라가 아닌데도 이례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걸 보니, 조선과의 관계를 의식한 모양이다.
아니면 조선의 찬동을 빌려서라도 안산 공방전을 승전으로 포장하고 싶었거나.
그간 패전만을 거듭해온 명에 있어 안산 공방전은 최종적인 결과야 어떻건 후금의 안위와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누르하치는 아예 공방전 직후 수도를 옮겨버렸으니까.
충분히 승리로 포장할 수 있는 쾌거였다.
‘달리 주워섬길 것도 없는 명나라라면 말이지.’
이유야 어떻건 경하할 일은 맞았다.
자존심 강한 명나라다. 그들이 이례적인 일을 벌였다는 건, 달리 말해서 조선의 위신 역시 이례적으로 상승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조선의 존재감이 양강 사이에서 부각된다는 건 부작용이지만…….
윤선이 마저 말했다.
“또한 황제가 치하의 의미로서 황금 오백 냥과 백금 오백 냥을 하사했습니다. 예부에서는 별도로 비단과 명주를 두 단씩 주었습니다.”
옷감은 차치하더라도 귀금속은 합쳐서 일천 냥이다.
누르하치가 보낸 금 일만 냥과 비교하면 역시 약소했다. 그와 황제의 절박한 정도가 각기 다르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황제인데 마음 씀씀이가 작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파태에게 넘긴 수고비만 금으로 이천 냥이었으니까.
“이외에 전해들은 건 없습니까?”
“후금과 마주한 국경의 군대에 모두 아조의 장창을 보급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실용성이 입증되었으니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닐 터다.
그러나 명은 황실은 부유할지언정 나라는 가난했다. 근시일에 그 많은 군사들에게 충분한 양의 장창을 보급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 외에는요?”
“별다른 말은 해주지 않았사옵니다.”
‘하지 않았다’와 ‘해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다르다.
윤선도 나름 명 내부에서 소식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던 모양이다.
하지만 명나라 관리들이 함구했겠지. 그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기야 이 시기 명나라는 망국을 향해 쾌속으로 달려나가고 있으니.’
도교에 심취했던 가정제와 장대한 세월 국무는 방치하고 재화 긁어모으는 데에만 몰두했던 만력제의 치세는 위태로웠던 명나라에 치명타로 다가왔다.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두 사람의 치세를 합치면 거의 한 세기가 된다는 점이다.
그 한 세기 동안 황제가 국가를 작정하고 망가뜨렸음에도 그동안 명이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국의 저력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지만, 그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명나라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현 황제가 유능했다면 기사회생의 기회나마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력제의 뒤를 이은 건 즉위 후 단 한 달 만에 사망한 태창제와, 조부와 마찬가지로 정무는 도외시한 채 제 취미에만 빠져 살았던 천계제였다.
‘이런 마당에 무슨 자랑거리가 있다고 외국인에게 떠들까.’
입단속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건 않지만, 명나라의 내부사정이 생각보다 더 나쁜 모양입니다.”
“예. 신 역시 북경에 있을 때도 그리 느꼈사옵니다.”
나는 끄덕여주고는 윤선에게 일렀다.
“태창포에 대한 언급은 없던가요?”
낙서포라는 신형도 나왔겠다, 이제는 구형이 된 소홍이포는 실체를 숨기기 위해 태창포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 소개했다.
그러나,
“태창포의 언급은 없었나이다.”
명나라도 그리 바보들만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에서 수입한 장창 견본이 실상 지난 대전쟁에서 남왜가 쓰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이미 깨달았을 테니…….
‘그래서 보상이 짠 건가.’
애석할 따름이었다.
“사행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사흘의 휴가를 드릴 테니, 푹 쉬고 오세요.”
“망극하옵나이다.”
* * *
역사의 변화에도 불구, 명나라의 사정이 악화일로를 나아가니 전략을 재고해야 했다.
양강의 구도를 조선의 의지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으니까.
명나라가 저 혼자 알아서 망하겠다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나?
망국을 지연하는 건 가능하겠으나 체급 차이를 생각하면 조선의 도움으로 명나라를 존속케 한다는 건 환상에 가까웠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의 치세 안에 명나라가 소멸하고 조선과 청이 독대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서 경이 명을 방문해주었으면 합니다.”
“신은…….”
“예조판서 자리는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을 테니, 부담 갖이 마시고요.”
남이공은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이 됐다.
작지 않은 연배에 이미 가도와 명나라를 다녀왔던 남이공이다. 뱃멀미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이 적임자입니다.”
단순히 외교의 전문가여서 맡기는 게 아니었다.
변무상사로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보통의 사신이라면 굳이 만나지 않을 하급 관리들 및 현지의 유학자들과 접촉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또 입수했다.
개중 네덜란드인과 에스파냐인들이 거대 오랑우탄마냥 멀대 같은 덩치에 붉은 털로 뒤덮여서는, 섬 같은 배에 타고 대양을 방황한다는 소문은 여전히 터무니없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명 관리들이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이공을 돌려보낸 뒤에는 병조참판 이귀를 불렀다.
“경이 종묘와 사직을 위해 해줄 일이 있습니다.”
간만의 개인적인 호출이었고, 들먹이는 명분이 무겁기 때문일까.
이귀는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명하시옵소서.”
“그대가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면 합니다.”
이귀는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후금의 패륵들이 한양을 거듭 방문한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조선이 후금과 국경이 맞닿은 것부터가 국격의 하락이라고 주장하는 이귀다.
그런데 그런 후금에 사신을 다녀오라니, 놀라워하기 이전에 불쾌해하는 게 당연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귀가 거의 따지듯이 물어왔다.
“후금이 원정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경도 들어 알겠지요.”
아파태가 얼마 전 전해왔다. 수립만 되어있던 계획이 최근 착수되었다고.
친정親征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게, 원 황실의 옥새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누르하치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옥새가 온전히 누르하치의 쟁취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게 당연했다.
“경이 노적의 원정에 동행하면서 그들이 요즘은 어떻게 싸우는지, 평소 그들이 조선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탐해 주셨으면 합니다.”
짧은 침묵이 있었고, 이귀가 형형한 눈빛으로 물었다.
“왕명이옵니까?”
마치, 명령이라면 마지못해 따라는 주겠으나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투다.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마저도 다른 신하였다면 흉내조차 내지 못할 만행이다.
“부탁으로서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만약 전하가 아닌 다른 이가 신에게 후금 사신행을 부탁했다면 신은 그와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역시,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는다. 참으로 이귀스러운 반응이다.
“처음으로 내가 전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병조참판, 후금의 원정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안목과 더불어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귀는 병조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군무에 대한 안목이 있다.
알아보는 게 있어야 정탐도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어전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그의 태도는 누르하치 및 패륵들과 동행할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안락한 이곳 한양에서는 후금과 노적을 업신여기는 인간이 길바닥 돌멩이처럼 즐비하지만, 막상 적지 한복판에서도 그럴 강단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귀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배짱 쪽이 조금 과하긴 하지만.
“후금을 정탐해 그들에게 천벌을 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신이 사신으로 적의 소굴에 당도하면 노적과 쥐새끼 같은 패륵들이 예를 강요할 텐데, 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오랑캐 따위에 예를 표할 수는 없습니다.”
이놈의 자존심…….
“표하지 마십시오.”
“……?”
이귀의 낯에 그대로 의문이 담겼다.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일순 감정을 드러낸 게 자존심 상했는지 금세 무표정이 되었다.
“당장 부딪히지는 않아도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건 피차 아는데, 강요한 예를 따르지 않는다고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
“내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으로 경의 조건이 그러하다면, 그 정도 자율성은 내가 양보하겠습니다.”
곧 몽골로 원정 뛰러 갈 후금이다.
제삼국의 사신을 무턱대고 죽이긴 어렵지. 원정에 무력시위를 겸할 의사가 없고 단지 외부인이 거추장스러울 뿐이라면 동행을 허락하지 않고 수도에 남겨둘 수는 있겠다.
“…….”
이귀는 대답이 없었다.
막상 투정을 부릴 때는 언제고, 내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는 식으로 나오자 할 말도 어이도 없어진 모양이다.
할 말 없으면 따라야지.
“병조참판?”
“……예에.”
막상 적지로 보내진다는 생각에 이성이 회복된 걸까.
‘그래, 뭐. 죽여보라지!’ 식으로 응하지 않는 걸 보니 막상 후금 가서는 자리 구별을 할 듯했다.
평소 미친놈처럼 굴어댔지만 진짜 광기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후금을 다녀와주시겠습니까?”
이귀는 입술을 모았다가, 말았다가, 괜히 침까지 삼키고는 마지못해서 답했다.
“예.”
어째 단음절이 아니라, ‘뉘예.’하고 들렸지만 곧 목숨을 걸어야 할 사람이니 봐주기로 했다.
돌아가서 괜히 이불을 걷어찰지언정, 자존심이 있으니 뒤늦게 못 가겠다며 말을 뒤집지도 않을 테고.
“조만간 조회에서 거론해 정식으로 사신 파견의 기회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모쪼록 대비하고 계세요.”
“뉘예.”
* * *
퇴궐 후.
이귀는 인기척이 흐려지는 골목을 쫓아, 이내 아무도 없는 막다른 지경에서 사모를 벗었다.
“이런 제기랄!”
이귀는 손바닥으로 연신 이마를 때렸다.
덕분에 이마는 금세 붉게 부어올랐지만, 이귀는 조금도 신경 쓰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사모를 다시 쓸 뿐.
‘후금행이라니!’
차라리 왜국으로 향하는 통신사가 훨씬 나았다.
바다를 건너는 중에 목숨을 걸어야 하긴 하지만, 다녀온 사람은 일개 일꾼마저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후금은?
강 하나를 건널 뿐이지만, 그 뒤로는 돌아올 때까지 계속 사지였다.
게다가 원정에 동행하라니!
“아아…….”
이귀는 짙은 탄식과 함께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후금행은 못 하겠다며 사악한 왕에게 항복하는 것도 무척 자존심 상했다.
목숨과 저울질이 될 정도로.
왕이 기대한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