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6화
진귀한 손님이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으므로, 심지어는 금한마저 당혹감에 접견을 미뤘을 정도였다.
그런 금한을 대신하여 조선의 사절을 맞게 된 이는 자칭에 타칭을 더불어 대조선 외교 전문가로 불리는 아파태였다.
금한의 7남.
출생만 따지자면 서열은 분명 낮았으나, 한위의 야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자였다.
자신의 바로 아래인 8남 홍태주가 한위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으니까.
동생마저 쟁취한 자리를 자신이라고 쟁취하지 못할까.
야망과 자존심이 서로를 정당화하는 상황에서, 아파태는 두 가지 모두를 쟁취하기로 각오했다.
최근에는 조금 더 필사적으로.
“조선에서 사절을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아파태는 자신의 대접을 먼저 채운 다음, 몸을 일으켜 맞은편 자리에 놓인 대접도 채웠다.
술보다는 음료에 가까운 마유주였다.
조선에서 온 사절, 이귀는 아파태가 마유주를 단숨에 비워버리는 것을 보곤 자신의 대접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탁주와 비슷한 빛깔이었다. 냄새는 조금 더 시큼했다.
이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젖이란 어린 짐승이 먹어야 할 양식이다. 사람이 뺏어 취한다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젖으로 만드는 타락駝酪을 임금조차 함부로 먹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은 한갓 유흥을 위해 젖으로 술을 빚어 먹는단 말인가.’
사치스럽고 불경했다.
“아니 드시오?”
아파태가 권했다. 그러나 이귀가 반응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내 말이 많이 어색하오?”
몇 번 조선행을 거듭하면서 조선어를 익힌 아파태다. 홍태주에 맞서 대조선 외교 전문가라는 입지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듣기 싫을 정도는 아니요.”
이귀는 아파태의 노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는, 대접을 밀어냈다.
“내가 이런 건 안 좋아해서.”
다소 격하게 밀려난 마유주가 넘실거렸다.
그 광경에 아파태는 조용히 콧김을 내쉬었다.
자신이 아무리 대접이 좋지 않다고는 해도 금한의 아들이다. 방대한 요동 땅에서 그의 대접을 이렇게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는다.
최근 의주부를 통해 비밀스럽게 전달된 무기명 서찰에는 가타부타 없이 짧게 ‘미친개가 간다’고만 적혀 있었다.
사절의 방문을 몰랐을 때는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 아파태는 이제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한께서 그대에게 마유주나 혹 다른 것을 권하더라도 그때는 사양하지 마시오.”
“나는 포로가 아니요. 입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알아서 정하겠소.”
아파태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알아서 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입에 칼이 들어갈 때는 사양할 수 없을 터였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아파태는 이귀가 밀어낸 마유주를 단번에 비워버리고는, 의자에 늘어져 앉아 물었다.
“조선은 왕이 바뀐 뒤로, 먼저 금에 접촉해오지 않았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갑자기 한의 친정에 동행하겠다는 거요?”
“그 자체가 목적이오. 원정에 동행해서 귀국한 다음, 두 눈으로 무엇을 봤는지 전하께 보고할 뿐.”
“한께서 허락하지 않을 거요.”
“아니, 한은 허락할 거요. 원 옥새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국외의 증인이 생기는 걸 마다할 리 없지.”
이귀의 당당한 대답에 아파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대가 친정의 계획은 물론, 그 목적까지 안다는 것을 한 앞에서 드러낸다면 우리는 둘 다 죽은 목숨이요!”
“그렇다면 그대가 우리 둘 다 죽지 않도록 노력하시오.”
“뭐요?”
“나야 전하의 명령을 수행하고플 뿐이고, 그대는 살아남아 한이 되고 싶어하니 각자의 목표를 쫓아가면 되지 않겠소?”
아파태가 곧장 손을 휘둘렀다.
“헛소리! 그대도 살아남아야 조선왕의 명령을 수행할 게 아니요!”
그런데 왜 막무가내로 설치는 사람 따로, 길 닦아주는 사람 따로냐는 소리였다.
이귀는 아파태가 흥분하기 전 그러했듯 느긋하게 의자에 늘어졌다.
그리고 긴장한 아파태에게 말했다.
“내가 전하께 아뢰기를, 한에게 예법을 강요받는다면 설사 죽더라도 따를 수 없다고 했더니 전하께서 뭐라 답하셨는지 아시오?”
“…….”
“죽이기야 하겠느냐더구려.”
이귀는 조소를 지었다.
“전하께서는 내가 죽을 가능성을 상정하신 듯하오! 한의 원정에 동행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편도 소용이 되는 모양이지!”
후금이 원정으로 군대가 빠진 동안 뒤통수를 갈길 명분이라든지.
이귀가 제 죽음의 가능성을 자못 유쾌하게 언급하자 아파태는 학을 떼었다.
“그걸 진심이라고 하는 말이오? 그대 왕이 안배했으니 죽어도 그만이라고?”
“전하께서는 내가 적임자라 하시면서, 이 일을 맡기 위해서는 배짱이 필요하다고 하셨소.”
끝내 아파태는 감탄 섞인 탄식을 쏟아내었다.
“……허어!”
조선에서 먹물 좀 먹었답시고 으스대는 별종이야 발에 채지만, 이자는 여느 별종을 훨씬 능가하는 별종이었다.
이 인간은 붓 대신 칼을 들어야지 않았을까.
……이귀가 이따금 다른 중신에게 베어버리겠다며 엄포를 놓아대는 습성이 있음을 알았다면, 아파태는 고민만 하는 대신 직접 칼을 쥐여주었으리라.
“……좋소, 독종. 대신 내 지시를 따라주시오. 말을 맞춰야 하니까. 그래야 한께 동행을 요청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추궁 끝에 주벌을 당하는 경우가 없을 거요.”
“계획부터 듣겠소.”
이귀의 당당한 오만에 아파태는 이골이 났지만, 이미 본국에서도 미친개 취급인 사절이다. 계속 당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귀가 아파태를 구슬려 부려먹을 동안.
명나라 역시 후금처럼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았다.
남이공.
안산 공방전에서 조선의 협조를 이례적으로 강조해 준 덕일까. 오만하다는 평가가 있는 조선의 왕이 어울리지 않게 사은사를 보내왔다.
예물도 함께였다.
선대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이름의 태창포泰昌砲.
명의 관리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조선보다 훨씬 일찍 홍이포를 입수한 뒤 무수한 인력과 자원에 힘입어 원형 그대로의 복제에 성공한 명나라였다.
‘이게 조선이 후금군을 승리를 거둔 또 하나의 비결이오?’
‘그렇습니다.’
‘인상적이지만, 대명은 이미 홍이포를 생산해 산해관과 영원성의 성곽에 올려두었소. 굳이 작은 복제를 만들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는구려…….’
그대들처럼 작은 나라라면 모를까.
태창포를 소개받은 관리 중 하나가 무리 가운데서 속삭였고, 옅은 웃음이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남이공은 태창포의 의이가 수성만 아니라 야전에서도 동원할 수 있는 화력임을 강조했으나, 거포를 가진 명의 관리들에게 작은 대포는 중대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작은 대포라면 이미 호준포나 불랑기포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선이 대포의 이름을 태창泰昌으로 지었다고?”
“예.”
태감의 대답에 황제는 집게와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달그락.
평소 세밀한 모형을 작업하는 만큼 하찮은 도구라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황제였다. 태감은 황제의 심기를 짐작하고는 서둘러 덧붙였다.
“변방 소국이 황제의 연호를 감히 남용하니 매우 불경합니다만, 딴에 대국과 황은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으로 벌인 일이니 염두에 깊게 두지 마소서.”
“……가상한 일이 아니냐?”
황제가 모형에서 등을 돌리고서 말했다.
흔치 않은 광경에 태감의 눈이 커졌다.
선제의 의심스러운 죽음이 일으킨 홍환안紅丸案 사건과 어린 나이에 즉위한 현 황제를 조종하고자 한 선황의 애첩 선시 이씨의 처소에 화재가 발생한 이궁안移宮案 사건이 이어지면서 오로지 목공에 몰두했던 황제다.
자신이 뒤에서 말해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폐하.”
태감이 당혹감에 고개 숙였다.
“짐조차 선제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일개 변방이라도 선제를 기려주니 얼마나 가상한가?”
“……그러하옵니다.”
“대국이 제몫을 다하지 못하여 과중한 짐을 안기고도 후하게 보상하지 못했는데, 한 줌 재물에 사은하고자 이렇게 찾아와 충성하는 마음을 보이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황제가 무기력하게 말했다.
태감은 자신이 여러 번 놀란다고 생각했다.
이전부터 황제는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려왔다. 여기서 더 무기력해질 수 있을 줄이야.
탄식한 황제는 발을 돌리고자 했다. 다시 모형에 몰두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태감은 거듭된 감정적 동요 끝에 충동적으로 말했다.
“폐하, 그 가상한 나라의 사신을 직접 만나보심은 어떻겠사옵니까?”
우뚝.
황제가 반쯤 몸을 돌린 채, 그러나 고개만은 다시 태감을 향하고서 물었다.
“직접 말이냐……?”
황제의 의문에 태감은 후회를 느꼈다. 환관은 황제의 은총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황제는 정무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 했다. 쏟아진 물과 마찬가지로,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예에.”
태감은 가슴을 졸이며 답했다.
황제는 조용했다.
한참을 침묵한 그는, 태감의 극심했던 긴장과 불안마저 가라앉은 다음에야 어렵게 결심을 내놓았다.
“……좋다.”
그 대답에 태감이 반색했다. 황제의 방황이 벌써 종말을 고한 듯했다.
“아랫사람들에게 일러 준비하겠나이다.”
“그래.”
황제는 짧은 수긍과 함께 모형이 있는 쪽으로 마저 몸을 돌렸다. 결심을 내린 것만으로도 많이 지쳤으니, 더 할 말이 있더라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태감은 기꺼이 그러기로 했다. 그는 푹 숙인 황제의 등판을 향해 읍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 * *
태감은 다시 없을 기회를 소중히 다루기로 했다.
만약, 황제가 가상하게 여기는 조선의 사신을 딱딱하고 고지식한 학사 출신의 신하들 사이로 불러들인다면 정무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부담 없이 사신과 회담할 수 있도록 소박하게 연회를 열기로 했다.
여기에 훼방을 놓은 건 위충현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행하는 황제의 권력을 온전히 전용하기 위해, 황제가 계속 정무는 도외시한 채 취미에 몰두하기를 바랐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간만에 보인 바람직한 모습은 경각심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그래서 위충현은 자신의 권력을 발휘해 연회의 규모를 성대하게 확대했다.
심약한 황제에게 부담감을 주어 다시 구중궁궐로 밀어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래서 남이공은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건 그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뒤따라 입장한 명국의 조신朝臣들마저 한밤중을 환하게 밝히는 화궁 내부의 조명에 압도된 기색이었다.
마치 서산 너머로 넘어간 노을의 붉은 빛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고작 사신 한 사람을 위해 이런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다니요?”
슬금슬금 모여드는 조신들이 삼삼오오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며 수군댔다.
“원래는 이만큼 성대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위 태감이…….”
한 사람이 남이공의 뒤를 지나가며 속삭였다.
위충현의 악명이라면 남이공도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다 건너인 조선 땅에서조차, 명에서 황제의 서열은 삼 위요, 위충현 및 그와 결탁한 봉성부인 객씨가 각기 서열 1, 2위를 맡고 있다는 풍문이 돌까.
재차 명나라를 방문한 남이공이 조사한 바, 위충현의 악명은 그새 한계를 능가해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다.
자신의 조카를 황궁 근위대인 금위의 대장으로 만들고, 위충현 본인은 비밀 첩보조직인 동창을 맡아 음양 양면으로 황제를 고립하고 신하들을 탄압했으니까.
명나라 관리들이 특히 소극적으로 변한 이유였다.
하지만, 모두가 위충현에게 굴복하지는 않은 듯했다.
국외의 사신인 남이공을 지나가며 슬쩍 간신배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건가…….’
썩 기분 좋은 취급은 아니었으나 명나라 조신들의 절박함만은 확실하게 느꼈다.
어쩌면,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