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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37화 (137/380)

인조, 명군이 되다 137화

해가 떨어진 뒤 마련된 연회 자리에서.

상석을 차지한 황제는 엉성하게 잡은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이다, 금세 흥미를 잃곤 사신에게 물었다.

“오랑캐를 격퇴한 대포에 선제의 연호를 붙여 기념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남이공이 상석을 향해 허리 숙이자, 황제가 말을 이었다.

“가상한 일이다. 그대 왕이 선왕과 마찬가지로 대국과 황상의 은혜를 항상 상기하고 있다는 뜻이니.”

“조선 왕은 물론, 소관과 여느 백관들 역시 대국과 폐하의 은혜를 한 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짐이 마땅히 헤아렸어야 했는데, 근자에는 마음과 정신이 어려워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여러 명국 조신이 숨을 삼켰다.

주군의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고픈 신하는 없었다. 하물며 변방의 소국으로 여겨지는 조선의 사신 앞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근래에는 조선의 기세가 제법 매서워 그런 치부도 어불성설이었으나.

아무튼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의 근심을 그간 어쩌지 못했던 조신들이다. 오죽하면 황제 역시 외부인에게 앓는 소리를 낼까. 불쾌해하기 이전에 민망했다.

“조선의 왕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노추의 자식들이 거듭 수도를 방문했다고 들었다.”

“왕은 무탈합니다. 노추의 자식들이 거듭 한양을 오가는 것은 저들이 감히 대국에 범접하기에 앞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기 위함이니, 물지 못하는 개가 시건방지게 구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대단한 배포다. 그처럼 강건한 마음가짐으로 오랑캐를 대적하니, 그들이 조선의 지경을 범접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호의적인 어조에는 천하를 경영한다는 황제답지 않은, 존경심마저 은근히 묻어났다.

그 광경에 마냥 민망해하던 명나라의 조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계속 듣고 보니 황제가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제삼자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해 신하들을 질책하는 것이었다.

신하들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나라를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간신 위충현의 세력이 건재한 건 그간 정무에 무관심했던 황제의 책임도 컸다.

외부인 앞에서 굳이 거론할 수 없을 뿐.

다만 희망적인 관측을 은근히 품어볼 뿐이었다.

‘설마 폐하께서 위충현을 내치기로 하셨나?’

그럴만한 계기랄 게 있었던가.

명나라의 조신들은 속단하는 대신 잠자코 침묵했다.

황제에게는 계기가 있었다.

현 조선의 왕은 자신의 자리를 직접 쟁취해 낸 자였다.

유약하게 위협만 당하다가 얼렁뚱땅 태자에 임명됐고, 그렇게 얼렁뚱땅 태자 자리를 지켜나가다 즉위한 선황과는 달랐다.

그 점은 황제 본인과도 달랐으며, 나아가 조선의 왕은 찬탈 직후 으레 뒤따르는 역반정이나 제삼자의 반란 시도도 당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정을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증거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환관의 세력이 미약하다고 했다. 딱 왕의 수발을 들어주는 정도의 역할만 있다고.

눈과 귀는 물론 거동조차 환관들에게 통제되는 황제 자신의 처지와는 달랐다.

조선은 원래 그런 나라라는 걸 알지 못하는 황제로서는 현 조선의 왕이 더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건, 왕이 내치만 아니라 외치에도 유능했다는 점이었다.

사신의 발언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조선은 야만스럽고 흉폭한 북쪽 오랑캐들마저 자식까지 보내 말로써 달래고자 할 만큼 강성했다. 대첩이라 불리는 의주에서의 싸움 뒤부터였다.

요동의 무수한 백성들을 적의 손아귀에 둔 채로, 산해관과 장성의 존재만을 믿고 그 너머에 틀어박힌 명나라와는 달랐다.

황제는 황제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자 한 국가의 주인으로서 조선의 왕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만약 자신도 그 같았다면, 눈과 귀를 가리려 드는 환관과 간신들을 모두 물리치고 요동을 침범한 오랑캐들 역시 저들처럼 미개하고 사나운 영역으로 다시 몰아냈으리라.

하지만 그는 조선의 왕과는 달랐다.

안내와 달리, 자신과 다르게 성대하게 확대된 연회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했던 황제다.

그와 조선의 왕 사이에는 장대한 간극이 있었다. 조선의 왕을 쫓아가기보다는, 그저 선망만 하는 이유였다.

“조선의 왕에 대해서 더 말해 보라.”

황제의 지대한 관심에 남이공은 난처하면서도 동시에 기대감이 들었다.

어쩌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다는.

황제가 가진 호감이 그의 눈에도 보였으므로, 남이공은 콩깍지 단단히 씌인 황제가 좋아할 만한 일화를 거듭 소개했다.

과연 황제는 기뻐했다.

***

연회에 참석했던 명국 조신들을 중심으로, 황제가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낙관적인 관측이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황제가 아이처럼 사신에게 소국의 왕 소식을 거듭 청했다는 건 민망했지만, 자존심만 떼어놓고 보자면 무능하고 무기력한 황제가 유능한 군주를 선망했다는 건 희소식이 맞았다.

그리고 소문을 접한 일부는, 밝은 미래를 막연히 기대하기보다는 행동으로써 쟁취하고자 했다.

“폐하의 권위를 바로세우고 천하에 평화와 도리를 가져올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바로 고자놈의 패거리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오!”

동림당이 분명할 명 관리가 남이공에게 종용했다.

왈패들 같은 모습이었다. 연회 같은 소식을 듣기 무섭게 공명심에 불타오르는 젊은 관리들이 의기투합하여 숙소를 쳐들어왔으니 당연했다.

‘정쟁이 벌어지겠군.’

남이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림당 인사들이 대놓고 눈에 띄는 짓을 벌였으니 위충현의 엄당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마 숙소 앞에서 육박전도 벌어지지 않을까.

정치적인 다툼이라면 음양을 떠나 물리적인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근래의 명나라다.

“그대도 충신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정의라는 걸 알 테지요!”

“……이 사람은 대명의 신하가 아닙니다.”

남이공이 사양하자, 동림당 일원이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조선 왕이 폐하의 신하거늘, 어째서 조선 왕을 따르는 그대가 대명의 신하가 아니란 말이요?”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렇지요. 국외의 일개 배신이 대명의 정치에 간섭한다면, 세간에서도 좋게 여기지 못할 것이거니와 전하께서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겁쟁이!”

그 한 마디와 함께 패거리에서 비웃음이 뒤따랐다.

동림당이 간신 위충현의 엄당에 맞선다고는 하나 동림당이라고 깨끗한 세력은 아니었다.

사실 오늘날의 위충현을 만든 게 바로 동림당이었다.

선대 황제인 천계제의 추대에 성공한 동림당은 권력을 장악하고서 다른 경쟁 당파들을 모조리 몰락시켰기 때문이다.

그 위협적인 세력 팽창에 천계제는 그나마 자신을 고분고분 따르는 위충현에게 권력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동림당이 몰락시킨 옛 정당의 당여들 일부가 위충현의 엄당에 합류했으니, 따지자면 오늘날의 상태에 이른 건 동림당의 공로가 컸다.

호전적으로 경쟁 당파를 몰락시키던 버릇이 여전한 동림당이다.

만약 남이공이 국외의 인사가 아니었다면, 겁박은 말뿐으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남이공은 사신이었고, 아무리 사나운 동림당이라도 건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녕 우리를 돕지 못하겠다면, 대신 이곳에 더 남아서 조선 왕의 이야기라도 계속해 주시오!”

동림당은 황제에게 야망을 불어놓아야 했다.

직접 왕위를 찬탈하고 조정을 평정한 자.

그런 황제의 재림을 바라는 동림당이다. 저들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야망만은 정당하다고 여겼다.

황제를 옹위하고 그가 강인하기를 원하는 건 충성이었으니까. 지상 최대의 가치다.

그들이 직접 조선 왕 이야기를 떠들 수는 없었다.

정무라면 학을 떼는 황제다. 신하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의 군주와 그들 사정에 대해 떠들면서 황제의 유일한 구원책을 어지럽히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이건 현지 사정에 해박하면서도, 조선 왕에 대해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맡아야 했다.

남이공이 답했다.

“이 사람이야 일정에 따라서 오갈 뿐입니다. 폐하께서 권하고 명하신다면 응당 가능한만큰 남아서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드리겠지만, 그런 윤허나 지시가 부재한 상황에서 독단으로 북경에 남아 황궁 주변을 서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폐하께 주청을 드리는 방법도 있소.”

“무슨 명분으로 말입니까? 그대들이 나를 찾아와, 전하에 대해 더 말해주기를 원했다며 자리를 청해야 되겠습니까?”

“…….”

“고작 사담이나 나누고자 폐하께 시간을 내어달라고 한다면 불경이지요.”

동림당 패거리는 침묵했다.

정론이었다.

할 말은 떨어졌고 무력은 쓸 수 없다.

막상 호기롭게 찾아왔을 때와 달리 동림당 패거리의 기세가 반전되자, 남이공은 승리자의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대신, 기회가 생긴다면 폐하께 그대 충신들이 바라는 전하의 일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금상께서 즉위하시기 전만 해도 조선은 간신배와 소인배들로 도탄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 과정이라면, 분명 동림당이 폐하가 알기를 원하는 일화가 맞았다.

“……!”

의외의 호의에 동림당 패거리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남이공이 호락호락 따라주지 않은 건 불만이었다. 설령 그가 정론을 들어 거부했다고 한들, 무모한 호전성과 행동력이야말로 동림당의 강령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절박했던 패거리에게 이런 일말의 호의는 감지덕지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 사신을 어떻게든 황제 앞에 데려놓기만 한다면, 도와주겠다는 뜻 아닌가.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왔던 패거리로선 만족할만한 수확이었다.

“……좋소. 기다리시오.”

패거리 선두의 사내가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대신. 알려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뭐지?”

반갑지 못한 조건인지 패거리가 일제히 인상을 굳혔다. 그러나 남이공은 물러서지 않았다.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마침 한때 권력의 핵심이었던 동림당이다.

“위충현과 엄당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적어도 그들이 어떤 작자들인지는 알아야, 귀공들의 의향에 더 잘 어울려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패거리의 선두가 미간을 굳혔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남이공이 보이는 관심이 불순해 보인 탓이다.

그러나, 불순한 의도가 느껴진다며 남이공의 후의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가 궁금하시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빠르게 알려주십시오.”

“……우리가 협조를 구하는 처지라고 업신여긴다면 좋지 않소.”

“업신여기는 게 아닙니다. 조만간, 엄당의 무리가 소식을 듣고 그대들처럼 숙소에 쳐들어올 테니 서두르기를 바랄 뿐이지요.”

동림당 패거리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장 위충현과 엄당에 약점이 될만한 정보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혹 남이공이 일화를 푸는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한 사내가 패거리를 찾아왔다. 다급한 얼굴이었다. 거친 호흡으로 가슴이 오르내리는 와중, 사내는 패거리와 남이공을 번갈아 보았다.

입은 열지 않았으나 그게 그가 전할 소식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패거리는 사내를 뒤쫓아 숙소를 빠져나갔다.

곧, 숙소 바깥 거리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무수한 발소리가 뒤섞였다.

남이공은 품질 좋은 명나라산 찻물을 들이키며, 패싸움을 안주 삼았다.

그리고 반 각쯤 소란스러웠을까.

발소리와 함께 서로 욕지거리하는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번에는 엄당의 무리인 듯 수염 없는 자들이 뒤섞인 패거리가 숙소에 입장했다.

그들 중 하나가 헐떡이며 물었다.

“저 멍청하고 야만적인 동림당 왈패들이 여기서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남이공은 대답을 서두르는 대신 찻물을 마저 들이켰다.

그는 이런 사태가 다름 아닌 대명제국의 수도이자, 외국 사신이 머무는 객사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상황이 꽤나 재미있게 느껴졌다.

개판.

명나라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다.

이래서 왕은 자신을 명으로 보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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