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38화
파종과 함께 바빠진 농군들은 가까워지는 여름을 느꼈고, 그간 충청도를 종횡무진했던 공조참판 김육은 한양으로 귀환했다.
그가 첫 번째로 착수한 일은 난삽하게 뒤섞인 충청도의 행정구역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판서께서 도와주세요. 참판의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
조회에서, 김류는 선선히 협조 지시에 응했다.
세미의 운송을 위해 행정구역을 효율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건 그 역시 잘 아는 바다.
다만 이귀가 사라진 뒤로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근자에는 데면데면하게 된 정적 겸 악우일지라도, 그런 인연 때문에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귀가 다른 곳도 아닌, 사지나 진배없는 후금으로 떠났으므로 신경 쓰일 법했다.
‘……얌전하군.’
김류가 실제로 걱정을 하건, 단지 우연히 기운이 없었을 뿐이건 이귀는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의주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먼저 닿은 쪽은 아파태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나의 안목을 의심하면서, 사신 덕분에 거듭 고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말미에는 이귀의 보고를 쓸모없게 만드는 첨언이 담겨 있었다.
이귀의 연락은 먼저 서신이 닿은 뒤, 사행에 동행했던 수행원이 의주에 도착하면서 이어졌다.
그는 앞선 아파태의 서신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첨언보다 훨씬 무심한 태도로 자신의 활동을 보고했다.
“아파태는 노추의 어린 아들, 도르곤多爾袞과 연합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전언에 이원익이 곧바로 분석했다.
“연합의 대상이 어린 편이, 홍태주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 뒷정리하기가 쉽다고 생각한 듯하옵니다.”
“그렇겠지요.”
이어서 좌의정 박홍구도 거들었다.
“도르곤이 아직은 많이 어린 편이니, 실질적인 연합은 도르곤보다는 그의 생모인 아바하이와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두 사람의 분석에 우의정 이상의가 짧게 덧붙였다.
“합당한 분석입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일까.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는 이상의였다.
“금한과 동행하는 것은 어찌 되었사옵니까?”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상의에 이어서 중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쉽지 않은 목표로 여겼거늘, 그저 달성했다고만 전하고 자세한 사정은 생략했단 말인가?
이상의가 당혹감에 재차 물었다.
“그뿐이옵니까?”
“예.”
“……허어.”
이귀의 보고는 내가 세자에게 책봉식 때 내린 여덟 글자 교명처럼 짧고 명료했다.
아파태의 연합을 보고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도르곤과 연합했다.
끝.
“병조참판이 말수 적은 사람은 아니거늘…….”
뚫린 입이랍시고 말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지나 마찬가지인 후금 땅에 입성하면서 제정신이 든 걸까?
이상의가 탄식하자 의원익이 아차 싶었다는 투로 말했다.
“신이 사료하건대 병조참판은 귀국하는 수행원이 혹 납치되어 후금 측에 전언을 탈취당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아아…….”
곳곳에서 납득과 함께 감탄이 퍼져나갔다.
과연.
“명에서는 동림당과 엄당의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정파다. 새삼스럽게 싸움이 붙었다는 보고는, 그들이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남이공의 보고로는 자신이 도착한 직후 불거졌다는군요. 황제가 나의 근황에 관심이 많고, 그 부분에 대해서 양당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모양입니다.”
“황제의 권력을 전횡하는 위충현의 엄당이라면 황제가 정사에 계속 무신경하기를 바랄 것이옵니다.”
이원익이 분석하자 이번에도 박홍구가 뒤따랐다.
“엄당에 맞서 황제를 옹위하려는 동림당이라면 정반대일 것이옵니다.”
두 사람의 새삼스러운 분석과 별개로 중신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국과 천하를 경영한다는 황제가 자신들의 왕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뜻이니까.
이원익이 재차 분석했다.
“사신이 보낸 정보를 취합하여 명나라의 정세를 아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소식이 한양과 북경을 오가는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큰 의미는 가지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남이공에게 지령이 전달될 즈음에는 양국을 오가는 데 필요한 몇 개월이 흐른 뒤일 테니까.
앞으로 폭풍이 휩쓸 듯 정세가 변모할 북경이다.
철 지난 정보를 기반으로 내린 지령은 적절하게 수행되기 어렵거니와, 성공하더라도 당초 원했던 이익을 실현하기 힘들다.
도리어 파견된 사신의 발목이나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여러 사람의 미련을 일축한 이원익이 제신에게 강조했다.
“전장에 파견된 장수에게는 전권을 맡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남이공은 여러 번 명과 왕래하며 경력과 경험을 쌓은 인물이니, 그가 잘 대처하기를 기원하는 것만이 우리의 최선이겠지요.”
과연, 마침 명에 파견된 사신이 남이공이라는 점은 다행스럽다.
그라면 달리 뒷북 같은 지령을 내리지 않아도 조선에 가장 도움이 될만한 흐름을 모색하겠지.
이미 남이공이 전달한 북경의 소상한 정세는 놀랍다.
엄당과 동림당의 주요 인물과 과거, 현재의 상황은 물론 각자 어떤 요직을 자치하고 있는지, 현지인과 다름없는 수준의 이해도와 정확도를 보여주었으니까.
‘양당을 이간질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 같군.’
그리고 겸사겸사 엄당에서 금 이천 냥까지 받아냈다.
개중에서 절반은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남은 절반은 공작금으로 알아서 쓰겠다는데 그저 가상할 따름이었다.
거금의 처분을 숨기거나 눈치 보지 않고 알아서 잘 처리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신하의 이런 자신감과 자율성은 때로 무능하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왕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지겠지만, 나는 해당하지 않는다.
“후금과 명이 사신을 내쫓지 않고 오래 붙잡고자 하니, 매우 기쁜 일입니다.”
누르하치의 친정과 수도에서 벌어지는 격한 정쟁.
외부인에게 보여줄만한 광경은 아니다. 그럼에도 각자 이귀와 남이공을 곁에 두고자 하니 두 사람이 잘 해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앞으로도 각자 양국의 사정을 잘 전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래야 불온한 기류가 당장의 현실로 닥쳤을 때, 조선은 강건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
* * *
누르하치의 원정에 동행하게 된 이귀는, 자신이 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하고 사나운 오랑캐들이 서로를 죽여대는 광경은 불구경과 싸움구경을 능가하는 볼거리였으니까.
“위험한데 피해 있으시지 그럽니까?”
아파태가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의 등 너머에서는 무수한 기마가 얽히며 만들어낸 흙먼지가 걷히며 막 종결한 싸움의 참상이 펼쳐졌다.
쓰러지고 토막 난 인간과 말의 흔적들. 그곳에서, 승리한 여진인들은 발끝으로 시체를 뒤집고 식지 않은 품을 뒤졌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이귀가 답했다.
“나는 무엇도 피하지 않소.”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파태는 이귀 주변에 틀어박힌 화살들을 돌아보곤 덧붙였다.
“그러다가 눈 먼 화살이라도 맞는다면 내가 무척 곤란해지겠지만, 그것도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요?”
이귀는 실소를 지었다.
아파태도 대답을 바라고서 한 투정은 아니었다.
* * *
화창한 날씨였다.
다시 찾아온 여름으로 세상은 다시 따스해졌다.
만생이 창생하는 계절에 세자빈은 동궁 별실에서 문지방 너머로 손목을 내놓은 채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의녀가 무릎을 꿇은 채 세자빈의 손목을 짚고 있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서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던 의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회임하셨습니다.”
진단과 함께 세자가 순간 반색했다가, 금세 안색을 굳혔다.
마당에는 세자만 있지 않았다.
“왕실에 가족이 늘어났으니 경하할 일이구나.”
간만에 서궐을 방문한 왕이다. 그를 쫓아 중전도 동궁으로 행차한 참이었다.
중전은 안쓰러운 얼굴로 세자빈을 바라보았다.
“불편하지는 않으냐?”
“예, 마마. 세자가 잘 보살펴주어 거취에 불편함은 없사옵니다.”
세자빈이 다소곳하게 답했다. 중전은 세자빈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왕에게 청했다.
“전하. 잠시 세자빈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세자야?”
왕은 긴장한 세자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고서 함께 물러났다.
적당히 동궁 구석에 이른 왕은 세자를 껴안은 그대로 어깨를 토닥였다.
“긴장되나 보구나.”
“예. ……혹 세자빈에게 못할 짓을 한 건 아닌가 두렵기까지 합니다.”
왕은 생각했다.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세자빈이 내색은 안 해도 고생을 많이 하는 모양이라고.
중궁도 그것을 느꼈으니 따로 세자빈과의 자리를 청한 거겠지. 이쪽은 졸지에 자식 셋이지만, 중궁은 그 셋을 직접 품었다.
삼형제의 어머니로서 예비 어머니가 된 세자빈에게 해줄 말이 무척이나 많으리라.
“당장 세자빈이 느낄 곤란은 어머니가 되는 불가피한 과정이고,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왕은 조언하면서도 회한을 느꼈다.
아버지로서의 경험은 그가 세자보다 월등할지 몰라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문외한이니까.
던져지듯 떠안게 된 세자와 두 왕자다. 아내가 처음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의 감정은 알 수 없다.
‘……내가 뭐래냐.’
왕은 조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나름 정신적 성장의 기로에 선 세자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주는 조언을 주는 게 나았다.
“오래전부터 시강관에게 자주 듣던 말이 있는데, 이제는 자중하는 게 좋겠다.”
세자빈의 회임이 드러났으니, 이 시점에서 무리한다면 몸이 상하는 건 세자만이 아니었다.
돌려서 말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당사자가 잘 알아서 세자는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리고, 당분간 의술을 배우자.”
원래 역사에서 소현세자는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갖는다.
첫째와 둘째 딸은 어려서부터 요절했으며, 세 왕자는 못난 조부에 의해 유배당했고 다른 세 군주(공주)는 각기 가정을 두어 그런대로 살았다.
그러나, 이젠 역사가 달라졌다.
세자와 세자빈이 혼인하고 합방한 시기가 바뀌었으니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의 운명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자빈도 마찬가지다.
“어떤 산모는 출산한 직후 산욕열로 건강을 해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때로는 아이가 기형을 가진 채로 태어나기도 하지.”
왕가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말, 고종과 명성황후는 가까스로 첫 아이를 가졌으나 존귀한 생명의 탄생은 고작 닷새 만에 비극으로 끝났다.
아기가 항문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공적으로 뚫어주는 방법은 고려되지 않았다. 왕가의 일원에게는 함부로 칼을 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경우 네가 세자빈과 아이를 지켜야지 않겠느냐?”
세자는 곤혹스러웠다.
부왕이 거론한 ‘만약의 경우’란 상상만으로도 난처했으니까.
여염에서 산모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세자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반가는 물론, 부귀를 갖춘 현직자의 가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부인이 출산한 직후 사망했다는 소식은 너무 흔히 전해진 나머지, 비극보다는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세자빈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의술을 배우고자 해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서를 구해 뒤적여야 할까?
세자는 글줄만으로 익힌 지식이 만약의 경우에도 통용될지 자신할 수 없었다.
단순히 지식에 기대야 할 상황이라면 어의들에게 자문받는 편이 나을 테고, 그들을 차치하고서 직접 나서야 할 상황이라면 글줄을 익힌 것보다는 경험이 훨씬 중요할 테니까.
그렇다고 세자 신분에 산파 견습을 하러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술은 어떻게 배워야겠사옵니까?”
세자는 부왕에게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그라면 보다 분명한 길을 알고 있을 테니까.
과연 그러했다.
“알아보니, 수방사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부상자가 나온다더구나.”
사람 일만이 모이면 일상을 지내도 다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군대라면야, 당연히 부상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세자는 의아했다.
“조련하는 과정에서 다친 군사를 돌보는 것이, 과연 세자빈에게 도움이 되겠사옵니까……?”
훈련과 출산이다. 세자로선 두 상황을 아무리 비교해봐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완전히 판이한 상황.
그런데 한쪽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치료하는 과정이, 다른 쪽에도 통용될지 미지수였다.
그나마 부왕께서 하교하셨으므로 반의하면서도 반신하는 것이었다.
“반드시 세자빈에게 도움이 된다. 세자가 보기에 두 상황은 완전히 다를지 몰라도, 사람이 다쳐서 고생하는 과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왕은 미래의 가르침을 베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