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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39화 (139/380)

인조, 명군이 되다 139화

전근대에서 많은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 산욕열産褥熱은, 분만 과정에서 발생한 상처가 감염되는 것이 원인이다.

상황만 다를 뿐 일상적인 상처가 감염되어 벌어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위생 관념이 빈약하고 의료기술이 미진하여 원시적인 환경과 방법으로 이뤄지는 분만이 여느 부상보다 감염되기 쉬운 상황일 뿐이다.

왕은 이것을 풀어서 설명했다.

“질병이 여기癘氣(나쁜 기운)에 의해 발생한다는 건 세자도 배워 알 것이다.”

개천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써먹은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자는 부왕의 행보와 가르침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직접 조회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시강관에게 보고와 분석을 받아 철저하게 익혀왔다.

“여기癘氣는 환부를 통해서 쉽게 스며든다. 깨진 달걀이 그렇지 않은 달걀보다 쉽고 빠르게 썩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자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 쉬운 예시였다.

“산모가 분만하는 과정에서 입는 상처나, 군사가 훈련하던 중 베고 긁힌 상처나 달걀 껍데기처럼 몸을 보호하던 피부가 찢어진다는 점은 같지. 환부에 여기가 침투해서 벌어지는 일도 동일하다. 이름만 다를 뿐이야.”

“아아.”

“이것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려면 직접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최선이다.”

“의서는 소용이 없사옵니까?”

“의서를 통해 지식을 함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의서만을 맹신하는 건 상책이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도 많거니와 상징적이거나 미신 수준의 내용도 분별없기 뒤섞여 있기 때문이야.”

환자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제공하거나 플라세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처치라고 완전히 무의미한 건 아니다.

하지만 치료의 본질은 놓친 채로 상징이나 미신에만 의존한다면 본말이 전도한 꼴이다.

“의서의 글줄만 읽어서는 무엇이 본질이고 현상이며, 원리이고 형식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에서는 산부가 눕는 자리 아래에 몰래 도끼를 깔아두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데, 세자는 이게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사옵니다.”

“이 아비가 하는 말에 대강 맞장구나 친 건 아니겠지?”

“아니옵니다. 그런 주술이 실제로 소용이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남자들만 있지 않겠사옵니까?”

열심히 듣고 있었구나.

“그래. 이 미신이 당당하게 수록된 언해태산집요의 저자는 허준이다. 명과 왜국에서도 찾는다는 당금의 최우수 의서인 동의보감의 저자조차 이렇다. 다른 의서라면 어떻겠느냐?”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는 없다.

“이해했사옵니다.”

“원한다면 수방사에 의향을 전하마. 의원들과 함께 다친 사람들을 돌볼 수 있게 해주겠다.”

“전해주시옵소서.”

세자가 결의를 가지고서 답했다.

조언의 수준이 시대를 넘어섰다는 건 인지했다.

통찰력을 지닌 천재가 몰두한다면 병원체病原體의 존재 및 위생의 중요함, 과학적 증명의 필요성 등 의학에 혁신적인 발전을 불러올 단서들을 포착할 테니까.

그러나 세자가 의학에서 천재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세자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니까. 천재성을 발휘할 거라면 주어진 쪽에서 보여주어야 했다.

‘아니면, 할 거 다 하면서도 취미로 삼던지…….’

마치 세종대왕이 음악에서도 조예를 보여주었듯 말이다.

지금은, 여차할 때 세자빈과 아기를 도와줄 수 있는 정도로 족하다.

* * *

세자에게 조언을 마치고서 귀환하니, 중전과 세자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들끼리 무슨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대담이 이토록 길었습니까?”

중전의 물음에 나는 세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자가 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알려주었지요. 중전께서는, 세자빈에게 충분히 조언해주셨습니까?”

중전은 세자빈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제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냐?”

“예, 중전마마.”

세자빈이 다소곳하게 답하자, 중전은 그런 세자빈을 흐뭇하게 지켜보고는 다가왔다.

그리고 감사를 표하는 세자에게 일렀다.

“세자빈과 자주 함께 있어주거라.”

“예.”

“그리고 갈수록 거동을 불편해하거나 사사로운 바람이 많아질 것인데, 궁인들에게 시키지 말고 직접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자빈이 안정할 것이야. 네 아이를 품은 몸이니 지아비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게 사람의 도리다.”

중전이 특히 엄하게 당부하는 걸 보아, 인조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마침 인조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짐작에는 분명한 근거도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아니, 나.

“명심하겠사옵니다.”

견부호자의 사례인 세자는 중전의 당부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가 보거라.”

“예.”

세자는 잠깐 떨어진 것을, 마치 세상이 달라졌던 것마냥 세자빈에게 돌아갔다.

그리고는 부모는 안중에도 없이 서로 끌어안고서 얼굴을 맞대는데, 내 자식과 산부만 아니었다면 걷어차서 날려버렸을 광경이었다.

“바로 돌아가십니까?”

중전이 물었다.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요.”

나의 대답에 중전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에게 엄히 이를 때와는 또 다른 딱딱함이었다.

“……서궐은 지낼 만하십니까?”

“처소를 옮겼을 때부터 거취가 편하지만은 않았으나, 세자빈을 간택한 다음에는 더욱 불편해졌습니다.”

중전은 세자와 세자빈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좋게 들러붙은 채로 무어라 서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중전을 세자와 함께 서궐로 보낸 건, 세자 한 사람이서 서궐을 전용하기엔 부담이 크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갖은 업보를 진 궁궐이기도 하고, 규모 면에서도 매우 방대했으니까.

하지만 각방 쓰는 부모 앞에서 염장을 지르는 두 인간의 모습을 보니, 부담도 이제는 옛일이라는 걸 느꼈다.

신하들이 서궐의 존립 명분을 신경 쓴 지도 오래되었고.

“중전, 다시 경운궁으로 오시겠습니까?”

중전은 나의 제안에 반색하면서도 대답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작게 오므릴 따름이었다.

“중전께서 다시 경운궁으로 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못된 세자야, 새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라지요.”

그리고 중전의 흠칫하는 손을 붙잡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소리를 살짝 깔고 간절하게 청하니, 중전은 마음에도 없는 고민을 한 뒤 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부탁이라면야, 들어드려야지요.”

그렇게 중전의 경운궁 귀환이 확정됐다.

멀리서 염장을 지르던 세자와 세자빈을 돌아보니, 일순 시선이 마주친 두 녀석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

* * *

중전이 경운궁으로 돌아와 첫 번째로 기쁜 점은, 옆집의 대비를 제외하고는 삭막하기만 했던 경운궁에 사람의 온기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것을 잘 느낄 수 있었던 건, 중전이 즉조당의 별실을 차지한 덕이 컸다.

보통 궁궐에서 왕이 기거하는 대전大殿과 왕비가 기거하는 중궁전中宮殿이 별개로 존재한다.

하지만 경운궁은 한때 행궁으로 사용되었던 임시 궁궐이다.

비좁은 영역에 전각의 숫자는 한정되었고, 이미 모든 전각은 저마다 중요한 역할이 배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정해진 중전의 귀환에 맞춰서 비우기는 힘들었다.

‘명분만 그랬지.’

궁궐의 본래 역할이 왕가의 거주를 보호하는 것인데, 이미 배정된 역할이 무엇이건 중전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보다야 중요할까.

하지만 내가 중전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고 싶었다.

중전이 부인 아닌 부인이라는 애매한 거리감은 장기간의 고독한 궁궐 생활로 희석된 지 오래다.

중전 역시 외롭긴 했던지 사양하지 않았다.

일각에서야, 왕실의 품위 문제로 걸고넘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부가 각기 다른 궁궐에서 지낸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는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 수도 있지.

세자와 세자빈 부부에게 염장질까지 제대로 당한 마당이다. 나나 중전이 우울증에 걸리기라도 하면 제깟 것들이 심리 상담이라도 해줄 건가?

“중전과 한 궁궐에서 살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거의, 즉위한 직후 따로 떨어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서궐의 존치가 반정 직후 선결과제였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조정의 분위기나, 나라 안팎의 사정이나.

못난 놈들이 못난 짓거리를 마구 벌여대어서 다른 못난 놈들이 대단히 못난 짓거리를 벌인 직후였으니 당연했다.

그 못난 상황을 못난 인간들로 수습해 냈으니, 세종대왕이 지켜봤다면 고생했다고 인정할 정도다.

돌이켜보면 순식간인데 중전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중전도 마찬가지였을까?

“그간 십 년은 떨어져서 지낸 듯합니다.”

나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중전이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만 봐도 그랬다.

두 왕자는 세자만큼 신경 써주지 못했고, 왕래도 잦지 못했다. 아버지의 역할을 의식해 왔는데도 그랬다.

그동안 훌쩍 자라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지나간 세월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함끼 지내게 되어 기쁘구나.”

왕자들을 향해 두 팔을 펼치니, 중전이 붙어있던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밀어주었다.

한동안 뜸하게 보았던 아버지와 다시 함께 살게 되어서인지, 두 왕자는 무척이나 어색해하면서도 다가와 품에 폭 안겼다.

“와.”

최초의 기억과 비교하면 덩치가 반 배씩은 자라난 왕자들이다. 각기 깔고 앉은 다리마다 전해지는 무게감이 범상치 않았다.

“사흘만 더 지나면 아비보다 더 커지겠구나. 작은 괴물들아, 천천히 좀 자라라.”

고작 몇 년 뜸하게 봤다고 벌써 이렇게 자라났단 말이냐.

솔직히 섬찟할 정도다.

그 불안한 마음을 왕자들의 정수리 냄새를 맡으며 진정시키니 중전이 포근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 * *

머나먼 북쪽.

몽골 땅 후흐허트Хөх хот에 이방인이 입성했다.

이귀.

그와 동행한 누르하치의 후금 원정군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외부인이겠으나, 누르하치는 자신과 군사들을 몽골의 외부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비록 만주가 대평원에서는 외방에 속할지언정 그의 일족 역시 일대의 족속들처럼 말을 잘 다루고 천하를 갈망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여겨야 대원大元의 옥새를 차지할 명분이 있었다.

“후, 뭐라고? 혀가 꼬이는 발음이로군.”

이귀의 질문에 기수를 나란히 한 아파태가 답했다.

“후흐허트. 몽골 말로는 푸른 도시라는 뜻이오. 지금 펼쳐진 광경만 보면 전혀 아니지만.”

거리마다 붉은 핏줄기와 웅덩이가 즐비했다.

한쪽 구석으로 내던져진 시체의 무더기에서는 그새 검은 날벌레 무리가 꾀인 채였다.

확실히 푸르다고는 못할 광경이었다.

이귀로서는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진격하는 경로에서 거치적거리는 인간과 도시를 모두 없애버렸으니까.

이번에는 지명 때문에 조금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이귀는 구석마다 쌓인 시체의 무더기, 피와 재로 얼룩진 푸른 도시를 둘러보다가 물었다.

“얼핏 듣기로 여긴 금한이 노리는 릭단 칸의 세력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릭단 칸이 대원 황제이자 몽골의 대칸을 칭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의 지배력이 행사되는 세력은 차하르부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흐허트는 투메드부 세력의 도시였다. 누르하치의 원정 의의를 생각하면 제삼자나 마찬가지였다.

누르하치는 그런 제삼자의 도시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점령한 것이다.

아파태는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상관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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