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0화
릭단 칸은 야망을 품은 사내였다.
그는 사분오열한 몽골 부족들을 규합하기를 바랐고, 동시에 만주를 통합하며 무섭게 성장해가는 누르하치를 압박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욕이었을까.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쫓던 릭단 칸은 하나의 토끼도 잡아내지 못했다.
그의 호전적인 몽골 재통합 시도에 경쟁 부족들은 누르하치와 연합을 맺었으며, 반대로 누르하치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던 여진 부족들과의 연합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젊은 나이에 부모와 조부를 동시에 잃고 한순간에 부족을 도맡게 된 청년은, 만주를 통합하고 대명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부유한 요동땅을 쟁취하였으나…….
몽골의 대칸, 대원의 황제, 차하르 부족의 수장이었던 릭단 칸은 적만 만들어낸 채 운명의 기로에 다다랐다.
사막 한가운데 양측의 군세가 집결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는 포식의 징조를 읽고 모여든 까마귀들이 거대한 원을 그렸다. 태양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압도적인 긴장 속에서 군사들이 움찔할 때마다 반사광이 번쩍였다.
더 초조했던 쪽은 릭단 칸이었다.
“돌격!”
일갈과 함께 수만 기 기병이 질주했다.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볕 아래 달아오른 전마들은 더욱 뜨거워졌다.
누르하치는 손을 드는 것으로 명령을 갈음했다.
곁에서 대패륵 대선이 전사들에게 외쳤고, 고함과 함께 기병들 사이로 보병이 쏟아졌다.
무기를 질질 늘어뜨린 채 모래바닥을 긁으며 나선 보병들은 곧장 무기와 대오를 정비했다. 숨겨두었던 장창이 방진을 형성하는 순간이었다.
기습적인 변화에 질주하던 릭단 칸의 전사들은 당황했다.
돌격을 멈추지는 못했다.
수만 기 기병이 일제히 달려나가고 있으므로, 섣불리 고삐를 잡아당긴다면 곧장 뒤따르는 기병들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 구를 테니까.
그리고 그보다 뒤에서 뒤따르는 기병들에 의해 말발굽으로 반죽될 게 분명했다.
그나마 양익 외곽의 기병들은 고삐를 돌리는 것으로 장창방진과의 정면승부를 피할 수 있었다.
릭단 칸의 기병들은 엉성하면서도 어설프게 흩어지기 시작했고, 누르하치는 손을 휘둘렀다.
뒤따르는 대선의 명령과 함께 둥둥 북이 울렸다.
몰려드는 말발굽 소리가 워낙 시끄러웠으므로 북소리는 대선의 고함과 함께 금세 묻혀버렸지만, 무수한 전장을 누벼 온 누르하치의 전사들은 소란 속에서도 신호를 가려내어 들을 수 있었다.
누르하치의 기병들은 곧장 장창방진의 좌우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엉성하게 퍼지는 릭단 칸 군사들의 양익에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살점과 근육 부딪히는 소리가 폭발처럼 터졌다.
밀도와 충격력 모두를 갖추지 못한 릭단 칸의 전사들은 추풍낙엽처럼 밀려나갔다.
비명과 함께 충혈한 수급과 잘려나간 팔이 날아다녔고, 주인 잃은 전마들은 시체를 끌면서 흩어졌다.
뒤이어 양군의 중앙 역시 부딪혔다.
릭단 칸 중군은 피하지 못할 운명에 전력질주로 응했다. 필사의 돌진에 방진을 갖춘 보병들조차 전열이 뭉개져나갔다.
홍태주는 이패륵이 자멸하는 동안 조선군의 전술을 눈여겨보았지만, 결국에는 눈대중에 불과했다.
땅에 단단히 고정되지 않은 장창은 격돌과 함께 비껴지거나 부러졌다. 릭단 칸 중군을 묶어두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은 묶인 가운데에도 대오를 잃은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나갔다.
방진을 잃은 장창은 난전에서 쓸모가 없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서 흩어졌고, 릭단 칸의 중군은 그런 후금군 보병들을 더욱 쉽사리 베어냈다.
각기 중군과 양익에서 벌어지는 반전된 학살극은 후금군 기병들이 릭단 칸의 양익을 먼저 깨뜨리고 패주시키는 것으로 종결했다.
적의 날개를 부러뜨린 후금군 기병들은 중앙으로 몰려들어 릭단 칸의 중군을 포위했다.
중앙에서 벌어지던 학살의 양상이 반전됐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들자, 전쟁의 결과를 짐작한 릭단 칸은 난전 가운데 어렵사리 기수를 돌렸다.
“비켜! 길을 뚫어라!”
함께 돌격한 친위대는 난전 속에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의 곁에 친위대는 오직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있었고, 몽골 최후의 충성심을 가진 그들은 최후의 대칸을 살리기 위해 동료와 그들의 전마까지 베어냈다.
그리고 어느덧 릭단 칸과 잔존 친위대의 우군 사살이 적 사살을 능가했을 즈음.
그들은 다시 후금군을 마주했다.
릭단 칸은 필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 * *
칸에게서 물러난 후금군 전사들은 세심하게 화살을 날렸다.
온 사방에서 몰아친 화살은 릭단 칸의 애마를 순식간에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렸다.
고통의 순간조차 없었는지, 당혹한 주인의 손길과 발짓에 따라 애먼 주변만 말발굽으로 마구 디뎌대던 백마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애마의 몸이 꺼지자 릭단 칸도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항이란 의미는커녕 시도조차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릭단 칸은 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쩌면 몇 번 남지 않았을 호흡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임박한 최후에 릭단 칸의 머리가 금세 식었다.
“……후우우.”
결심한 릭단 칸이 눈을 감고서 처결을 기다린지 몇 분쯤.
주변을 에워싼 후금군 기병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길을 텄고, 그 사이로 누르하치와 패륵들이 여유롭게 등장했다.
선두의 누르하치가 말했다.
“릭단 칸.”
“……말해라.”
“항복하고 대원의 옥새를 바쳐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이미 운명을 받아들인 릭단 칸에게는 대답이 무척 쉬운 제안이었다.
“알겠다.”
* * *
싸움이 끝난 직후에는 의례처럼 약탈이 뒤따랐다.
후금군 병사들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시체를 뒤졌다. 전사들은 전장에 많은 것을 가져오지 않았으나, 무구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장식품 따위는 수거하느라 수고한 값을 잘 치러주었다.
그렇게 약탈자들이 볼일을 마친 다음에는, 대자연적 약탈자들이 식어가는 잔해 위에 내려앉았다.
그런 잔해에는 약탈꾼이 다가가지 않았다.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이종 사이에 각자의 이익과 편의를 위한 배려가 눈치껏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 광경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귀.
몽골과 대원의 최후를 목도한 그는 심경의 변화가 느껴졌다. 하지만 느낌만 그랬고, 실제로 변한 건 없었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두 제국의 초라하고 신속한 몰락은 분명 범상찮은 일이 맞았지만, 이 정도로 태도가 달라지기에 이귀는 너무 편협한 사람이었다.
멍청하고 야만적인 오랑캐들 따위가 서로를 좀 쳐죽여 대다가 저들끼리 세운 조금 큰 부족이 겸사겸사 망한들 무슨 상관이랴?
“릭단 칸이 항복했소.”
아파태였다.
격전의 와중 적을 제법 베었는지, 갑주 곳곳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혹자가 보았다면 무척 위협적인 광경으로 여겼겠으나 이귀는 여전히 편협했다.
“봤소.”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은 듯하오.”
이귀는 작게 끄덕였다. 어쩌면, 싸움은 경이로운 광경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데 동요하지 않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이귀였다.
자신은 조선을 대표 겸 대신하여 원정에 동행했으니까.
동요하여 경거망동하기보단 그저 당당하게 있는 게 맞았다.
“이제 뭐요. 순의왕順義王이라도 치러 갈 건가?”
후금군이 앞서 점령한 푸른 도시, 후흐허투는 릭단 칸의 차하르부가 아닌 투메드부에 속해 있었다.
순의왕은 그런 투메드부 수장의 칭호다.
명에서 사로잡은 포로들로 후흐허투를 세운 장본인인 알탄 칸이, 명나라에서 ‘왕으로 인정할 테니 제발 유순順하고 의義롭게 있어 달라’는 의도로 내린 봉작인데 대대로 승계해 왔다.
그런 순의왕과도 싸우려느냐고 이귀가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자 아파태 역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순의왕이 그럴 필요가 있게 만든다면.”
* * *
“위충현은 권력을 전횡하고 황제를 기만했소! 반드시 죽어야만 하오!”
“위충현은 충신이오! 그의 충심이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데, 그대들은 어찌 모함만 해댄다는 말이오!”
“위충현은 간신이니까!”
“그대들이야말로 간신이겠지!”
동림당과 엄당의 중진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했다.
묵묵하게 제 할 일만 하는 관리들을 제외한다면, 작금의 명 조정은 양분된 상태였다.
시작은 조선 사은사의 방문이었다.
황제가 사은사와 접견하는 도중 조선왕의 소식을 이례적인 적극성으로 요청하면서, 어심의 개변 여지를 느낀 동림당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이에 맞서 위충현과 엄당은 권력을 보존하고 동림당을 마저 축출하기 위해 대응했다.
덕분에 재상들이 보이는 자리마다 관리들은 쉰 목소리로 서로를 규탄했으며, 각 관청에서는 양당으로 파벌이 나뉘어 별개의 조직처럼 굴러갔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정쟁에 일조할 수 없는 최하급 관리와 식자, 그들의 수행원과 몸종들은 수시로 패싸움을 벌이며 정적을 물리적으로 배제해나갔다.
누르하치가 릭단 칸을 무릎 꿇리고 대원의 옥새를 확보하는 도중이었다.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이자 정점에 선 황제는, 우유부단한 태도로 용단을 미뤘다. 난장판이 수개월이나 지속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황제만 책망할 일은 아니었다.
동림당은 선제를 추대하며 얻은 권력으로 현재의 난장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쟁을 이미 일으켰던 세력이다.
엄당이 간신들의 패거리라면, 동림당은 권신들의 패거리인 셈이다.
황제로선 마음을 굳히기 힘든 선택지들이었다. 쓰레기냐, 혹은 쓰레기냐의 문제였으니까.
그럴수록 황제는 사신이 전해주는 조선왕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한때 황제의 일정 대부분을 차지했던 목공은, 사신과 만나지 못한 나머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차순위의 취미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관리들이 자신의 앞에서 목구멍을 학대할 때는 그 목공이라도 절박해졌지만.
“너희 엄당 모리배들은 금의군에 동창, 심지어는 사병까지 갖춘 채로 무고한 선비들을 탄압하고 학살하지 않았으냐!”
“그렇게 말하는 네놈들은 절당浙黨과 초당楚黨, 제당齊黨이 다 어디로 갔는지 말할 수 있느냐?! 천하의 악신惡臣, 태악太惡 장거정을 복권한 것도 너희 동림이었다!”
양당은 각자의 원죄를 계속해서 쏟아냈다.
개중에는 사병의 존재처럼 매우 민감한 사안도 있었으나, 공격하는 동림당이나 무시하는 엄당도 그저 정쟁의 수단으로만 여길 뿐 심각성은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황제의 면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양당이 서로만이 아니라 동시에 황제의 원죄 역시 질책하는 셈이었다.
황제가 용단을 내렸다면, 혹은 일찍 정무에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처럼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다 못해 비실존의 영역으로 진입하여 신하들이 대놓고 황제의 존재마저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테니까.
실상은 황제를 추앙하고 받들자는 동림당도 엄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러한 증명이 황제의 용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만…… 그만들 하라, 그만!”
황제가 언성을 몇 번 높이자, 그제야 황명을 언쟁에 낀 잡음 정도로 치부하던 신하들이 조용해졌다.
여전히 서로를 향해서 중얼대는 채였다.
“짐은 가겠다. 경들은 계속 싸우겠다면, 그리 하라.”
황제가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휘젓자, 엄당의 당여들은 기고만장해졌고 동림당의 당여들은 항의를 쏟아냈다.
그렇게 언쟁이 재개되는 동안 슬쩍 나타난 위충현이 비틀거리는 황제를 부축하고서 말했다.
“그러게 왜 신에게 일임하지 않으시고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굳이 나와보셔야 귀만 따가울 뿐입니다. 앞으로는 저에게 다 맡기시옵소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자, 위충현은 곧장 입을 닫고서 숙였다.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