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1화
후금의 원정군은 옥새를 확보했으나 축하나 기념은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명과의 국경지대로 돌아와 다음 행보를 고민했다.
오늘날에는 간판만 남은 대원과 몽골일지라도 한때는 천하를 지배했던 제국들이다. 그 편린이 가진 힘이 작지 않았다. 릭단 칸의 차하르부는 주력 군대를 잃고도 상당한 무력이 남았다.
후금군은 그 잔존한 무력을 흡수했다.
힘이 생겼다면, 남은 건 어디에 힘을 휘두를지 정하는 것뿐이다.
누르하치는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음산한 밤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 달빛과 은하수가 청명했으나 그 아래 펼쳐진 번화한 도시에서는 인기척 하나 없이 골목마다 귀곡성만 울렸다.
몽골인이 명나라로 세운 푸른 도시였다. 한때는 붉게 물들었다가 이제는 검게 물든 채였다.
금한의 축객과 함께 패륵들은 각자의 처소로 흩어졌다.
아파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한 유지의 저택을 자신의 처소로 삼은 아파태는, 친위대의 조심스러운 마중을 받으며 핏자국이 여전히 선명한 침실로 들어섰다.
곧장 잠들지는 못했다.
‘명나라냐, 조선이냐.’
금한은 자신의 힘을 어디에 휘두를지 고민했다.
일단 대패륵 대선의 제안에 따라 군사들을 이곳으로 모았지만, 금한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였다.
홍태주는 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본디 후방 안정을 위해 조선 공략의 필요성을 설파했던 그였다.
‘섣불리 건드릴 자신은 없다는 거겠지.’
아파태는 조선 공략을 지지했다.
그는 조선과 야합 관계를 지녔지만, 필요에 의할 뿐 동맹 관계는 아니었다.
아파태의 최우선 목표는 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르하치가 원정의 성공과 함께 대원의 옥새를 얻었다. 권위가 회복됐으니 질서도 돌아올 터다.
홍태주가 유력한 현재의 후계 구도가 다시 견고해진 셈이다.
아파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후금은 다시 곤란해질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고슴도치를 무리해서 삼킨다던가.
누르하치와 그의 총애하는 후계자가 군사를 잃고 취약해진 틈을 탄다면 미약한 연합의 힘으로도 한위를 쟁취할 수 있다.
‘조선의 왕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됐지만.’
원래 이런 게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계의 생리 아니겠는가?
이용할 구석이 있다면 이용할 뿐이다. 유감스러운 감정과 냉혹한 현실은 별개다.
저벅, 저벅……
문득 발소리가 다가왔다.
상념을 마친 아파태는 허리춤에 매둔 곡도를 쥐었다. 금한과의 회의에 출석할 때는 비무장이었지만, 처소로 귀환할 때는 친위대에게서 무장을 받아두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누구냐?”
아파태는 불청객이 더 다가오기 전에 몸을 돌렸다.
불청객은, 아파태의 몇 없는 처소를 지키는 친위병이었다.
“놀라셨다면 송구합니다.”
친위병의 사죄에, 아파태는 곡도를 여전히 쥔 채로 물었다.
친위병이 혹여 겉과 속의 색채가 다른 인물이라면 방심을 틈타 달려들 수도 있었으니까.
급사를 면하고 싶다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친위병은 달려드는 대신 다시 입을 열었다.
“삼패륵이 방문했습니다.”
“……?”
아파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패륵 망가퇴가 무슨 사정이 있어 야심한 시각에 방문한단 말인가.
불청객은 불청객이었다.
그러나 삼패륵의 방문을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망가퇴는 성정이 불같고 충동적이어서, 홍태주처럼 간사한 자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후계 구도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로 제 모친을 때려죽여 한에게 잘 보이고자 했던 자다.
“……들여라.”
“예.”
친위병이 물러나고 아파태가 곡도 손잡이를 몇 번 주무르자, 망가퇴가 등장했다.
“야심한 밤에 삼패륵께선 어인 방문이십니까?”
망가퇴는 동행한 아파태의 친위병에게 말했다.
“나가라.”
친위병은 난처해했고, 아파태는 황당해했다.
“제 병사입니다.”
“밖으로 보내라. 네 병사를 잃을 생각이 아니라면.”
신경전은 짧았다.
“물러나라.”
축객과 함께 친위병이 침소를 떠났고, 아파태는 칼자루를 단단히 틀어쥐고서 물었다.
“물렸으니, 말씀하시지요.”
발소리가 멀어지자 망가퇴는 팔짱을 끼면서 답했다.
“내가 네 생각을 모를 줄 알았느냐?”
마치 무언가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아파태는 내심 흠칫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만.”
망가퇴는 비웃었다.
“네가 입은 혐의가 있지 않으냐? 조선의 왕과 결탁했다는 것 말이다.”
“…….”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서라도 조선과는 무관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했겠지. 하지만 나서서 전쟁을 치르자고 드는 건 속내가 너무 보이더구나.”
아파태가 인상을 굳혔다.
과연, 그가 조선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자신이 조선의 왕과 결탁하고서 그동안 한과 형제들을 기만해 왔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이귀가 설명해 주었다.
장차 아파태 자신에게 공공연히 혐의를 씌워, 조선을 침공할 명분으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나도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다고 목숨을 구명할지는 모르겠구나. 평소 홍타이지에게 불만이 많아 보였으니까.”
“놀리기 위해서 오밤중에 찾아오신 거라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아파태가 방문의 진의를 추궁하자 망가퇴의 눈이 일순 사납게 번쩍였다.
“조선 공략을 지지하겠다. 대신, 나를 한으로 만들어라.”
밀담이 급격히 진전했다.
* * *
복심을 가진 채로 원정에 참가한 이는 아파태만이 아니었다.
오래전 한의 환심을 사고자 벌인 구차한 행위로 도리어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망가퇴 역시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은 야망을 내색할 기회가 없었다.
홍태주는 유능하면서도 간교했다.
한은 그런 홍태주를 내심 후계자로 점찍어두었으며, 대패륵인 대선은 일찌감찌 한의 의사에 굴복했다.
견고한 질서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것을 흔들기 위해서는 커다란 틈과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런 망가퇴의 눈에 아파태가 띄었다.
한이 조선의 왕에게 보낸 금 일부를 돌려받아,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사용한 아파태의 최근 행보는 망가퇴가 보기엔 매우 필사적이고 구차했다.
자신 역시 그랬던 적이 있기에 망가퇴는 알았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이용하기도 그만큼 쉽다고.
“그동안 홍타이지에게 미움받을만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느냐? 녀석이 한이 되면 당장은 목숨이 붙어있어도 살아남기 어려울 거다.”
망가퇴가 단언했다.
아파태는 안도했다. 삼패륵이 자신의 행동 동기를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고작 생존을 위해 이러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방심의 틈이었다.
아파태가 별 의미 없이 물었다.
“제 생존은 어떻게 보장해 주시겠습니까?”
* * *
대패륵 대선의 제안으로 군사를 명과의 국경으로 이동하긴 했으나, 곧바로 침공하는 대신 회의를 가졌다는 점에서 한의 의사는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다.
여기에 아파태가 제안하고 삼패륵 망가퇴가 지지하니 여론이 금세 기울었다.
오직, 대선만이 분명하게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조선에 금 일만 냥을 주어 화평을 다진 게 최근인데, 고작 군사가 생겼다고 먼저 전쟁을 일으킨다면 금 일만 냥은 의미없이 허비된 셈이고, 온 세상이 대금의 신의를 의심할 것이오!”
한이 침묵하는 가운데 패륵과 참석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에 반박한 건 아파태였다.
“금 일만 냥은 원정 기간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쓸모를 다 했고, 신의를 잃는 건 분명 문제가 되겠지만 조선에 이어 명까지 정벌한다면 온 천하가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는 셈인데 평판의 일시적인 실추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긍정했다. 심지어는, 한과 마찬가지로 입장을 유보해온 홍태주조차 그러했다.
여론의 반전에 대선은 질색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서 조금만 남진하면 곧장 산해관을 피해서 명나라 땅에 무혈입성할 수 있어! 그런데 곧장 여세를 몰아 중원을 공략하지 않고 귀로를 거쳐 조선으로 가자고?”
동선도 비효율적이거니와, 막 편입한 차하르부의 몽골인 전사들이 동조할지 의문이었다.
명나라야 지척에서 국경을 맞대고서 늘상 약탈해왔으니 후금군을 따라 침공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만, 조선은 너무 멀고 뜬금없지 않은가.
이건 아파태와 조선 공략을 지지하는 망가퇴 등도 반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대선이 내세울만한 결정적인 주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더욱이, 무슨 명분이 있다고 화친을 깨고서 조선을 침공할 건가?”
일순 아파태가 긴장했다. 조선 침공의 명분을 만드는 건 본래 본인의 희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목숨을 바쳐 조선 공략을 정당화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아파태를 대신해 나선 건 망가퇴였다.
“쉬운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이목이 집중하자 망가퇴는 마저 말했다.
“릭단 칸의 양보로 한께서 대원의 옥새를 계승하셨으니, 한께서도 이제는 칭제건원을 하시는 게 맞습니다.”
“설마…….”
“조선에 한의 즉위식에 참가하라는 뜻을 보내면 됩니다. 만약 놈들이 고분고분 응한다면 굳이 정벌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괘씸하게 불응한다면 징치하는 게 마땅하지요. 마침 우리에게는 전언에 적합한 자도 있습니다.”
이귀.
그제야, 대선은 아차 싶었다는 얼굴로 한과 홍태주를 돌아보았다.
릭단 칸이 항복한 직후 한에게 황제 등극을 기쁘게 강권한 대선이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반대한 사람이 당사자인 한과 홍태주였다.
‘…….’
뒤늦은 깨달음에 대선은 충격받았다.
이래서 한이 천하의 주인으로 등극하고, 홍태주는 그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것이리라.
새삼스럽게 자신의 자질을 직시하게 된 대선이 침묵하자 명나라 정벌에 대한 주장도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대선과 같은 충격을 받은 아파태는 슬쩍 홍태주를 흘겨 보았다.
홍태주는, 여전히 별말 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미리 안배해둔 것을 믿고서 회의에는 관심을 끈 채, 다음 일을 고민하고 있던 걸까.
아파태는 주눅들지 않았다.
홍태주의 간교함보다 더 분명한 만고불변의 진리는, 우연히 파고든 칼날 한 자루는 어떠한 장사와 천재라도 단숨에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니까.
아파태 자신에게는 여전히 약간의 행운과 기회만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흐르고 있었다.
* * *
이귀는 원정의 종결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단독으로 조선으로 가는 길은 알지 못했고, 또 수소문하더라도 매우 위험할 터이므로 후금의 새로운 수도인 선양瀋陽까지 개선군과 동행했다.
그리고 금한의 강권으로 개선 잔치에 거듭 초대됐다.
후금이 원정에서 거둔 수확은 대원의 옥새만이 아니었다.
이귀가 마지못해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의 소지품은 한 수레씩 늘어났다.
족히 원나라 시대부터 사용해 왔을 진귀한 가재家財와 보물이었다.
이 사치스러운 선물 공세의 의도는, 매수가 아니었다.
이귀는 사나운 패륵 및 공신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예법을 생략한 채 우두커니 서서 금한을 마주한 자였다.
이런 패기는 재물만으로는 사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이귀와 같은 패기를 가진 건 아니었다.
금한과 패륵, 공신들은 조선의 선비들이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기는 하나 그만큼 유약하고 비열한 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르하치와 여타 후금의 권력자들은 이귀가 조선으로 귀환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귀가 지참한 예물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다.
그만큼 관심이 모일수록, 누르하치 본인과 후금이 대원 황실의 옥새를 쟁취했다는 증인이 늘어나는 셈이니까.
그리고 이귀가 원치 않게 선양에서 발이 묶인 기간이 길어져, 인내심이 다다랐을 즈음 누르하치와 후금의 권력자들은 아파태를 보내 미뤄두었던 진의를 전달했다.
한이 황제 즉위식을 치르고자 하니, 조선이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는 전언이었다.
이귀는 조정을 대신해 단언했다.
“대명에 천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오랑캐 무리에 불과한 그대들이 마찬가지로 오랑캐가 세우고 참칭한 황위를 모사한다고 아조가 어울려주어야 하오?”
무척이나 사나운 반응이었다.
아파태가 답했다.
“어울리지 마시오. 그게 한과 홍태주의 의도이니.”
이귀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