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2화
무더위가 찾아왔다. 하늘은 화창하고, 햇볕은 따가웠으며, 지상 만물은 달아올랐다.
오직 중전이 경운궁으로 떠나면서 서궐 한켠만이 서늘해졌을 따름이다.
세자도 그것을 느꼈으나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아바마마 없이 정치적 논리만을 위해 서궐에서 외따로 지내온 어마마마다.
그간 어마마마께서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잘 알기 때문에, 부왕의 곁으로 다시 돌아간 것을 아쉬워할 수는 없었다.
아쉬워할 일도 아니었고.
‘……다음 단계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서궐로 오시는 것이니까.’
어마마마의 이어는 곧 서궐의 낙인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서궐이 지금보다 더 편한 장소가 되어, 자신과 신하들이 일제히 이어를 상주드린다면 아바마마께서도 굳건한 성지를 꺾어주지 않으시겠는가?
좋게 생각한 세자는 외출 준비를 그쳤다.
이제 서궐에는 문안드릴 사람이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옷을 갈아입던 참이었다.
편한 차림이 된 세자는 곧장 별채로 향했다. 세자빈이 머무는 곳이다.
동궁의 권역은 세자가 머무는 중심 건물과, 여기서 조금 떨어진 세자빈의 별채가 천랑穿廊으로 이어져 있었다.
돌바닥과 함께 지붕이 깔린 천랑 덕분에 교류가 편했다.
비 내릴 때나, 지금처럼 햇볕이 작열할 때 천랑 지붕이 다 막아주니까.
“오셨사옵니까, 저하.”
별채에 이르자 세자빈을 수발하는 상궁이 꾸벅 허리 숙였다.
“세자빈은 기침하였습니까?”
“예에.”
세자는 수고의 인사를 건넨 뒤 별채로 입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기겁했다.
“아니, 앉아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제가 앉아서 전하를 마중하겠사옵니까.”
배가 부른 세자빈은, 세자의 기겁과 달리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세자는 그런 세자빈을 애써 앉혀놓고서 말했다.
“빈궁嬪宮께서 강건하다는 건 알지만, 해산까지는 갈수록 거동이 힘들어지실 겁니다. 자중하는 법을 배우셔야지요.”
“중궁께서는 조금씩 운동하는 편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잠깐 서는 것조차 어려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세자와 세자빈은 저마다 억지를 부렸지만, 각자 서로를 걱정하고 달래기 위함이었다.
이를 상대방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자빈이 실소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자 세자도 금세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요, 그래. 내가 빈궁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모쪼록 무리는 안 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매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해주시는데 어찌 감히 무리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자빈은 이 역시 평소처럼이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세자 역시 능숙하게 세자빈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그간 부왕이 당부한 실습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배움을 쌓았다.
다양한 의서를 참고하는 것은 물론, 어의와 의녀들, 심지어는 여염의 능숙한 산파들에게도 가르침을 청한 세자다.
잡인의 궁궐 출입에 적지 않은 사람이 난색을 드러냈으나, 상대방의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참고할 경험과 경력이 있다면 불러서 참고하는 것이 부왕의 가르침이었다.
효용은 분명했다.
“혈압이 올랐습니다.”
“심각합니까?”
“임신성 고혈압은 해산한 후 금세 완화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어지러움이나 머리, 명치 부위에 통증이 발생할 수 있지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의에게 기혈 순환과 통증 완화의 효과가 있는 약재를 처방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저하께서 직접 의술을 익혀 도와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세자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세자빈은 그것이 보통, 세자가 깊게 생각하거나 기억을 떠올릴 때의 모습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세자의 인상이 풀리자 물었다.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빈궁, 앞으로는 소피를 모아두세요.”
“소피를 말입니까?”
“예.”
어의들은 간양상항肝陽上亢 상태가 지속하면 신음허腎陰虛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의서에 따르면 간은 나무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신은 물의 성질이 있는데 하나의 기운에 크게 성하면 상극의 장기가 반대로 쇠한다고 했다.
걱정되는 건 신음허가 고질병이라는 점이다.
신음허의 대표적인 증상은 당뇨인데, 산파들의 말에 따르면 소변에 개미가 모이는 산모의 경우 유산이나 산모 사망의 경우가 높다고 했다.
고혈압으로 간양상항이 크게 의심되니 미리 대비해야 했다.
세자는 겸연쩍은 얼굴로 세자빈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맥을 짚는 게 아니라, 단지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배우고 나니 산부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깨달은지라, 책임감이 강한 세자는 죄책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세자빈에게 극성인 것이기도 했다.
“식사는 여전히 많이 남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궁녀들이 밥을 굶어야 할까 봐…….”
“궁녀들은 별도로 식사를 지어먹게 됐습니다. 아바마마께 허락을 받았어요.”
세자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세자가 많이 배워두어, 심지어는 서궐 외소주방外燒廚房에까지 친히 식사의 방침을 정해놓았다.
다만 산모를 위한 것이다 보니 식사가 소위 말하는 건강식이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다 빈궁의 안위를 위해서 내가 지시한 것이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나 역시 세자빈과 같은 식사를 들고 있습니다.”
“……예.”
세자는 세자빈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손을 두드려준 뒤 일어났다.
“벌써 가시렵니까?”
세자빈이 배웅을 위해 일어서자, 세자는 거의 도망치듯이 인사하고는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세자빈과 더 있고 싶었으나 일과가 많았다.
세자빈의 처소를 나선 세자는 동궁 권역 구석에 마련된 창고로 향했다.
몇 가지 없으나 무기가 보관된 창고로, 최근에는 총검 한 자루가 늘어났다.
이를 기존의 대포들과 함께 갈고 닦는 게 세자의 아침 일과였다.
운동도 되고, 정신 수양도 된다. 부왕이 의미 없이 둔 것이 아니므로 관리하는 동안 의미를 되새기면 작심삼일로 끝날 각오를 매일 새롭게 다질 수 있다.
세자는 기름 먹인 천으로 대포들과 총검에 밤새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여름이라 유난히 땀이 흘렀다.
세자는 이마를 훔쳐내고서 동행한 궁인에게 일렀다.
“등목을 준비해주시겠습니까? 나가기 전에 씻어야겠습니다.”
“예에.”
그렇게, 창고의 무기 관리를 마치고 땀을 씻어낸 세자는 옷을 갈아입은 뒤 출궁했다.
목적지는 한양 남쪽의 수방사 본부였다.
* * *
손을 다친 사내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 세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귀로만 접해보았던 유명인을 직접 본 사람의 반응이었다.
명성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세자 역시 수방사에서 부상자들을 상대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따가울 테니 각오하시게.”
“예……!”
부상자가 신음과 함께 손을 떨었다.
세자는 움찔거리는 부상자의 손을 단단하게 부여잡은 뒤, 마저 꼼꼼하게 바느질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남은 실을 가위로 잘라내자 부상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핏기 가신 얼굴로 늘어졌다.
세자는 붕대로 환부를 감쌌다. 고약은 쓰지 않았다.
“상처가 낫는 동안 간지러울 텐데 건드리지 말게. 혹여 통증이 너무 심해지거나, 너무 간지러워진다면 그건 따로 말해주고.”
“예에……. 알겠습니다.”
세자는 사용한 도구를 천으로 감쌌다.
다시 사용하기 이전에 한 번 삶고 바짝 말려야 했다.
부왕은 상처가 여기에 특히 취약하다고 가르쳤다. 옳은 말이었다.
그리고 산파들은 아이를 받기 전 손은 깨끗하게 씻고, 천은 삶은 뒤 햇볕에 바짝 말린 것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야 경험상 산모가 덜 아프다고 했다.
세자는 두 교훈을 결합했다.
시술에 들어가기 전 양손은 깨끗하게 씻었으며, 도구는 매번 삶고 바짝 말렸다. 놀랍게도 상처가 덧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그런데 어의들은 이런 데 철저하지 못했으니.’
어의들은 의과에 합격한 만큼 배운 바가 많아 가진 지식이 방대하고 깊었으나, 정작 이 간단한 절차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생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의 스승은 대개 손을 씻고 도구를 소독하는 과정을 가르쳤다.
환자를 다루기에 앞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과에 합격하면서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일까?
대개는 이 절차를 그저 입문자가 마음가짐을 다잡는 의식, 제자 단계에서 스승의 도구를 준비하는 행위로만 여겼다. 그러니 어의에 이른 저들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가장 많이 배운 자들이 정작 가장 확실한 과정을 생략해 왔으니…….’
세자는 마뜩찮았다.
당장 함께 부상자를 돌보는 의원들에게는 소독 절차를 따르게 했지만, 과연 그들이 미래나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이행할지는 미지수였다.
자신이 부왕과 산파들에게서 익힌 나름의 근거를 대어도 그랬다.
왕이 거론될 때는 정말로 그런가, 싶어하던 의원들이 산파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질색했기 때문이다.
‘산파가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을지언정 생명을 다룬 경험은 어의들조차 따라잡지 못할 텐데도 그렇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부왕께서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줄지언정 직접 의술을 익힌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산파와는 별개로 어의들이 오직 권위만을 보고 받아들이고자 했으니 이것 역시 문제였다.
여기가 건강을 해치며, 상처에는 특히 쉽게 침투하는 성질이 있다는 건 통찰을 넘어 검증된 지식의 단계에 이르렀지만, 만약 아바마마께서 검증이 불가능하고 실효성조차 없는 가르침을 내리더라도 맹신해야 하는가?
불효한 발상이지만, 이는 그릇된 행위였다.
‘……효심으로는 환자를 살리지 못하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도 방법이 옳아야 의미가 있다.
아픈 사람에게 그릇된 시술을 정성껏 행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태만 정성껏 악화할 뿐이다.
‘……의술에는 권위나 도리보다는 합리가 필요해. 그것이 사람을 살린다는 의술의 본질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세자는 생각했다.
다종다양 난립하는 지식과 그저 막연하게 쌓이기만 한 경험을 자신이 체계적으로 검증하여 새로운 의서를 써내는 건 어떨까, 하고.
‘의서를 집필하는 게 세자의 역할은 아니겠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수호할 수 있다면 잘못된 행동은 아니겠지.’
어차피 수방사에서는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부상자가 쉽게 발생하는 훈련 시간마다 자리를 지키고는 있으나, 매번 부상자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대기하는 시간에 의서 집필에 전제될 지식과 경험을 취합하고 정리한다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어차피 익혀야 할 지식이고, 행해야 할 검증이었다. 그 결과물을 종합하여 책으로 엮는 건 백성들의 건강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배움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아직은 과학적 방법론의 개념이 취약한 시대.
어쩌면 의술은 물론 조선 땅의 모든 학문이 천지개벽할 각오였으나 세자는 대수롭지 않게 상념을 마쳤다.
그 직후,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제 발로 걸어왔다면 큰 부상은 아니겠네.’
세자는 그리 생각하며 새 의료도구를 준비했다.
“여기 앉아서 상처를 보여주게.”
“저하.”
“응?”
다소 가녀린 목소리에, 세자가 몸을 돌렸다.
입구에는 부상자가 아닌 내시가 서 있었다. 서궐에서 보이는 자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서 부르셨습니다.”
부왕은 세자의 일과를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급작스레 내시를 보내 전언할 정도라면, 사소한 일은 아니리라.
과연 그러했다.
세자가 입궐해 인사하자, 왕이 가타부타 없이 말했다.
“네 어머니와 세자빈을 데리고 멀리 나가 있어야겠다.”
후금이 다음 표적으로 조선을 점찍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