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3화
궁궐에서 보고를 마치고 귀환한 이귀는, 들러붙는 가솔을 모두 물리치고 사랑방에 퍼질러졌다.
지극한 지위를 가진 사대부의 품위에는 맞지 않는 행위였으나 이귀는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양에서 귀로에 오른 이래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못한 채 한양까지 달려야 했으니까.
후금 땅에서는 저들이 기습을 위해 뒤늦게 살인멸구할 가능성을 우려해야 했으며, 압록강을 건넌 다음에는 선전포고나 진배없는 위급한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임무를 다한 지금 이귀는 녹초가 되어버렸다.
눈을 감기 무섭게 수마가 밀려들었다.
* * *
꿈 속에서 이귀는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을 지내고 있었다.
임진년, 세자 시절이었던 광해군과 동행하면서 군사를 징발하는 역할이었다.
보통 분조가 적지를 들쑤시기는 했으나 거동은 비교적 전화가 덜 미친 곳에서 이루어졌다. 세자와 고관들의 안위를 적에게 상납할 수는 없었으니까.
당시 군사는 왕의 안위를 위해 평안도 국경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조는 오직 최소한의 호위만을 대동했다.
그래서 이귀는 필사적이었다.
참상이 덜한 지역을 오가는 동안 이귀는 삼도소모사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대개 병화를 피해 피신한 가족이 많았으므로, 분조의 한 줌 병력을 이용해 장정들을 납치하듯이 징발했다.
한 순간에 타지에서 저들을 지켜야 할 가정을 잃은 어미와 아이들이 절규했다.
그래도 이괄은 이게 최선이고 정의라 여겼다. 왕의 안위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징발한 군사는 대부분 의주로 보내졌다. 분조와 함께 두기에는 사기가 너무 흉흉했다.
그다음, 이귀는 삼도선유관宣諭官이 되었다.
장정들에 더불어 명군을 먹일 식량까지 확보하는 역할이었다.
이귀는 가장은 물론, 가정이 소유한 식량과 재산까지 강탈했다. 하루아침에 굶게 된 아녀자가 저항했고 아이들은 울었다. 이귀는 그들이 매질 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당시의 그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다 왕과 종묘사직을 위해서였다.
그가 병사들과 함께 한바탕하고 난 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을 돌보는 건 세자의 역할이었다.
파탄 난 무수한 가정이 공허한 말로 위로될 리 없었다. 그래서 세자는 지쳐 있었다. 그때 이귀는 알지 못했다. 세자가 그저 육체적인 피로와 부왕에 대한 염려에 찌들었다고만 여겼다. 그래서 이귀가 건네는 위로는 보통 이러했다.
전쟁이 수습되고 나면 조금은 쉴 수 있을 거라고.
이게 부왕과 종묘사직을 수호하는 최선이라고. 세자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훗날 세자가 비뚤어져 왕도를 잃고 폭정을 일삼자 이귀는 배신에 치를 떨었다.
어찌하여 난 중에도 수행하며 충성한 신하의 마음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고작 유배 가는 친우를 배웅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준다는 말인가?
배신이 치에 떨렸던 만큼 보복의 원념도 깊어졌다. 이귀는 배소에서 원한을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그리고 세상에 나왔을 때, 먼저 반정을 기획한 자들이 접촉하자 이귀는 기꺼이 응했다. 삼여 년을 벼려오기만 한 증오를 드디어 휘두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귀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다 끝나고 한참을 지나서 생각해보니 세자는 이귀에게 충성을 받은 적이 없었다.
“…….”
비몽사몽하던 잠기운이 달아나자 이귀는 지금이 한밤중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침침한 눈으로 어색한 방구석을 짚어 부시쌈지를 찾아냈고, 손을 휘휘 저어서 촛대를 잡았다.
이귀는 질끈 반개한 눈으로 초 끄트머리에 부싯깃을 뿌리고 부싯돌에 부시를 쳤다.
잠시 귀 따갑고 눈 따갑더니 온화한 불길이 방을 밝혀왔다.
이귀는 질린 얼굴로 부시쌈지를 정리한 다음 구석에 내던졌다. 그리고 피로에 찌든 얼굴을 닦았다. 마저 잠들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경이 후금 땅에서 본 것을 알려주세요.”
이귀가 귀환한 당일, 어전을 방문해 전한 약식 보고만으로 한양은 경천동지했다.
많은 사람이 우려만 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후금과의 전쟁.
전언의 내용은 선전포고가 아니라, 누르하치의 황제 즉위식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으나 조선으로선 그게 그거였다.
황제의 존재는 천하에 오직 하나.
명 황제가 버젓이 군림하고 있거늘, 감히 오랑캐가 소싯적 제국의 옥새를 얻었다 하여 감히 황제를 참칭할 수는 없었다.
원리적인 입장을 떠나 후금의 황제 즉위식 참여는 외교적으로도 중대한 문제가 된다.
자화자찬에 불과한 오랑캐의 가짜 즉위식이다. 여기에 사절을 보낸다는 건 공인의 의미가 있다. 천하의 지배자인 황제는 양립할 수 없다. 이는 곧 대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셈이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형조판서 이서가 주먹을 움켜쥔 채 외쳤다. 기세가 마치, 면전에 누르하치가 있으면 당장에 턱을 돌려버릴 정도다.
“그러하옵니다.”
과격함은 이서만 못하나 영의정 이원익 역시 잔잔하게 찬동했다.
이어서 좌의정 박홍구와 우의정 이상의, 호조판서 김신국과 병조판서 이광정, 공조판서 김류 등 조정에서 존재감 있는 모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응했다.
“절대로 사신은 보낼 수 없사옵니다.”
20세기 초반,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이 일제에 맞서 펼친 국공합작처럼 북인과 서인이 하나가 됐다.
왕이 사신을 보내고자 하여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
그러나 왕도 사신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후금의 의도가 명료한 탓이다.
‘대놓고 한 판 붙자고 드는데 고개를 숙인다고 안 맞을까.’
재차 지금 같은 도발을 일으켜 어떻게든 전쟁을 일으킬 게 뻔했다.
이런 흐름을 억지로 부정해봐야, 신하와 백성들 사이에서 인망만 잃어버리고 일어날 일은 일어날 따름이다.
이미 각오는 한 상태.
그래서 세자를 불러 피신을 권유하지 않았던가.
왕이 말했다.
“아민과 정람기를 토멸한 뒤, 그동안 후금은 유화적인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차기 한이라 봐도 무방한 홍태주를 거듭 파견했고, 아파태가 수작을 부렸다고는 하나 환심을 사기 위해 거금을 보낼 정도였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이유라면, 원의 옥새와 함께 몽골인 병력을 얻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럴 것이옵니다.”
“하지만 나는 저들이 고작 그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는지 의아합니다.”
후금이 권위와 함께 더 많은 군사가 생겼어도 조선은 여전히 강하다.
더군다나 아민이 침공했을 때와 달리, 의주와 압록강의 섬들은 성곽을 수축하고 대포까지 비치해두었다.
그건 강 너머의 후금 땅에서도 보일 터.
“병조참판.”
호명과 함께 이귀가 한 발자국 나섰다.
“예.”
조금은 어색한 등장이다. 평소의 이귀였다면, 후금의 이 같은 도발에 길길이 날뛰었을 테니까.
왕과 제신은 그저 이귀가 막 귀환하여 아직은 피로하구나 짐작할 따름이었다.
“짐작가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왕의 물음에 이귀는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듯 곧장 답했다.
“노적이 싸움을 통해 릭단 칸을 거꾸러뜨리고 원의 옥새를 얻었다고는 하나, 저들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릭단 칸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서 십만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서 떠났으며, 칸의 지위는 노적이 아닌 릭단 칸의 아들이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는 노적이 릭단 칸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는 의미이옵니다.”
후금은 릭단 칸의 독립을 저지하지도 못했으며, 몽골 대칸의 지위를 빼앗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만약 후금이 내리막을 걷는다면 일시적으로 복속했을 뿐인 차하르부는 얼마든지 배반할 수 있는 상황.
이렇게 성긴 복속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귀가 말했다.
차하르부를 온전히 흡수하기엔 벅차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목민 특유의 방대하면서도 흐릿한 영토 문제도 있다. 통제하기 어려운 땅을 억지로 확보하려 들었다간 투메드부와 오르도스가 어중간한 국경을 계속해서 잠식하겠지.
이미 명과 조선이라는 만만찮은 세력과 국경을 맞댄 채로 새로운 경쟁자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차하르부를 완전 지배하는 대신, 완충지대의 용도로 반쯤 풀어놓은 것이리라.
이귀가 덧붙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후금이 막 편입한 몽골인 병력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원래 소속한 차하르부가 건재하니까.
“그렇다고 차하르부로 돌려보낸다면 후환이 되기 쉬우며, 명과의 전쟁에서 투입하자니 혼란 중에 가까운 차하르부로 도주하기 쉽사옵니다.”
“그래서 아조를 상대로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뜻이군요.”
“노적과 홍태주는 이미 이 같은 계획을 원의 옥새를 확보하기 이전에 세워둔 듯하였사옵니다.”
아파태 역시 조선과 후금의 충돌로 어부지리를 바랐으므로, 이귀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가감없이 알려주었다.
오랑캐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못 믿을 이귀였으나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었다.
“노적이 어부지리를 노린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조가 대응을 잘해서 몽골인 부대를 토벌하고도 전력이 남아 반격을 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귀를 대신해 답한 건 영의정 이원익이었다.
“아조가 강을 넘어간 전례가 없으니, 그것을 믿는 게 아닌가 하옵니다.”
왕이 생각해보니 과연 그러했다. 아민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도 조선은 반격을 꾀하지 않았다.
대신 이후 후금의 적극적인 교섭 시도에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응해주었으니, 후금이 조선을 실질적인 전투력과는 별개로 호전성을 낮게 취급할 근거는 존재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지.’
굳이 강을 넘어가서 정복 활동을 벌일 이유가 없기 탓이다.
점령지로서 가치가 있는 요동 지역은, 압록강 이북의 어느 땅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명이 일방적인 지배 명분을 소유하고 있다.
한때 후금이 빼앗아 거느렸다고 해서 조선이 명의 눈치를 보지 않고 꿀꺽 삼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려가 간섭기를 탈피하면서 옛 원 제국의 땅 일부를 흡수한 건, 원나라가 멸망해서 그렇고…….’
눈치 볼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그리할 수밖에 없다.
금싸라기가 화수분처럼 터져 나오는 요충지가 아닌 한에야 수백 년간 명의 영토로 존재하면서 명의 문화권이 골수까지 스며든 땅을 명과의 전쟁까지 각오하고서 굳이 차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억지로 강을 넘어봐야 남 좋은 일만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후금이 보기에 조선은 건드렸다가 역으로 줘터지더라도 후환이 두렵지 않다는 거지?’
왕은 인상을 굳혔다.
‘괘씸하네. 머리는 제법 잘 굴렸어. 딴에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으니까.’
만약 차하르부의 몽골인 병력이 대거 몰살하더라도, 차하르부에 대한 지배력을 후환 걱정없이 강화함으로써 전화위복이 가능하다.
혹여 조선에 중대한 타격을 입히면 뒤이을 명과의 전쟁에서 후방 걱정 없이 집중할 수 있다.
몰골인 병력과 조선 모두 양패구상하게 된다면 후금으로서는 두 배로 즐겁다.
그러고도 밑지는 게 없으니 질러버리는 것이리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후금의 의도야 어떻건, 몽골인 병력만으로 대뜸 조선을 침공할 수는 없다.
양패구상을 바라는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을 희석하고, 또 몽골인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후금 역시 저들의 병력 상당수를 강 너머에 투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바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파태.
그가 반역을 모의하기엔 가장 좋은 상황이다.
압록강 같은 큰 강은 말머리만 급하게 돌린다고 건널 수 있는 지형지물이 아니다.
만약 몽골군 병력에 더불어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후금군 병력까지 다수가 조선 땅에서 발이 묶인다면, 아파태는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래. 어떻게 손해보지 않는 전쟁이 있나.’
영향권 내부에서 경쟁하는 집단의 군사력을 국외로 보내 손해 없이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겉으로만 천재적인 이 발상은 후금이 최초가 아니었다.
고작 한 세대 전만 해도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 상대로 저질렀던 짓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요토미 정권이 어떻게 됐냐고.’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왕은 곤란할 따름이다. 명나라가 알아서 망해가기에 전전긍긍했는데, 이제는 후금도 알아서 망하겠다고 열의를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