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4화
“세자에게서 피신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왕의 의사는 충분히 확인했다. 남은 일은 대비였다. 세자가 왕에게 받았다는 명령은 그 일환이었다.
“예. 내가 세자에게 중전과 세자빈을 데리고 피신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준비는 하고 있던가요?”
“……예, 다만 세자가 의문을 드러냈사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세자가 분조를 이끌고 백성들을 직접 위무했는데, 자신은 세자가 되어서 부왕을 돕지 못하고 일신의 안위만 챙기게 되었으니 민망하다고 하였사옵니다.”
광해군의 치세는 흑역사가 되었지만, 그가 모범적이었던 순간마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자는 오늘날의 국난에서 자신 역시 당시의 광해군처럼 세자로서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왕에게 모든 위험을 떠넘긴 채 가족과 피신하는 건 비겁하게 보인 것이다.
왕의 생각은 달랐다.
“세자는 나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입니다. 미래가 이미 세자의 몫이거늘, 어찌하여 지금의 부담까지 세자에게 전가하겠습니까?”
이에 김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한 분뿐이시고, 세자는 다시 세울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간만에 점수나 따고자 한 소리였다. 근래 왕의 눈에 거의 들지 못한 탓이었다.
적절한 발언은 아니었다. 왕은 세자를 총애했으니까.
“세자를 다시 세우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혹여 안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를 감히 말씀드렸을 뿐이옵니다.”
“공판께서 나와 세자 중에, 누가 안위에 문제가 생길지 정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식겁한 김류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옵니다. 신이 감히 어찌…….”
꼬투리 잡기에 가까운 압박이었으나, 대처는 불가능했다. 후계 문제는 언제나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신하로서는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그나마 이런 주제를 당당하게 받아칠 수 있는 별종이라면 이귀뿐일까.
그런 생각에 김류는 슬쩍 이귀를 의식했으나, 그는 오늘 기운이 영 없었다.
좌중이 긴장한 가운데 왕이 일렀다.
“자식을 화살받이로 여기는 아버지라면, 신하는 물론이고 나라와 백성까지 그리 여길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명나라의 도움마저 불투명하지요. 왕이 비겁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존립을 시험받을 것입니다.”
왕의 하교에 제신은 일제히 선조를 떠올렸다.
“영의정.”
“분부하시옵소서.”
“세자가 차질 없이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에.”
“목적지는 전주입니다.”
제신이 일제히 놀라워했다. 세자가 왕은 아니지만, 한반도에서 군주가 전라도로 피신한 역사는 고려가 마지막이다.
“전주보다는 강화도로 보냄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한양에서 지척이면서도 바다를 건너야 하니 이편이 피신의 실리를 취하기 좋사옵니다.”
“내 생각엔, 벌판에서 말이나 타고 다니는 오랑캐들이라고 해서 갑판에 올라타는 재주가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때문이다.
이때 강화도가 함락된 건 강화도의 수비를 전담한 강화유수 장신張紳과 강도검찰사 김경징이 모두 무능했던 탓이 크다.
오판과 패주를 거듭하면서 단 하루조차 청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으니까.
이런 결과나 책임소재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상황만 보면, 청은 해도海島인 강화도의 공략을 어렵지 않게 시도했다.
‘이 시점에서 후금은 병자호란 당시의 청처럼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강화도의 공략 시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모문룡 숙청 후 그의 부관들이 청나라에 투항해 수군을 만들어준 역사가 배제되었다고 해도 그렇다.
‘병자호란 당시 청 수군이 강화도를 공략할 수 있었던 건, 일대 여진족 수부水夫들이 물길을 알려준 덕이니까.’
후금이 발호하면서 축출된 부족들의 피난민 다수가 조선으로 유입됐다.
배척받는 오랑캐 외지인인 만큼 이들 대부분은 노역만이 필요한 직종에 종사했는데, 그중 하나가 뱃사공이었다.
이들은 호란과 함께 청군이 내침하자 곧장 침략군과 결탁했다.
‘후금군이 상륙을 도와달라고 한다면, 이번 역사에서도 여진족 유민들은 기꺼이 배를 빌려주고 노잡이를 자처하겠지.’
강화도가 물 위에 있다고 무적이 아닌 이유였다.
“내가 세자를 전주로 보내는 이유는, 정말 최악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후금군이라면 사력을 다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곧바로 한양에 들이쳐 내게 항복을 받아내고자 할 텐데, 강화도는 너무 가깝습니다.”
혹여 강화도가 원 역사처럼 함락되어 세자와 다른 왕실 일가가 포로로 사로잡힌다면 큰일이었다.
‘그리고 최악에는 세자가 나주를 거쳐 제주도라도 가야 한다.’
강화도에서는 이런 도주가 어렵다.
“또한 경기와 충청의 천민 속오군은 수방사 군대에 편입시키고, 평안과 황해의 천민 속오군은 북방군에 편입시키세요.”
이에 이광정이 물었다.
“모든 속오군이 아니라, 천민 속오군을 고집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공을 세우는 자는 속량하고, 내수사의 토지를 무상으로 경작할 권한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오군은 양민과,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일부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천민을 속량하는 건 신분에 예속된 계급을 해방하겠다는 목적도 있고, 토지를 무상으로 경작시키는 건 실질적인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누군가의 재산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천민 계급의 일방적인 해방은 나가 죽으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악질적인 주인이 늙고 병든 노비를 부담없이 처분하는 방법이다.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천민이라면 농사도 거뜬히 해낼 테고, 한동안 지대 없이 무상의 소작을 지으면서 재산을 축적하면 금세 땅과 집을 확보할 수 있겠지.
이러한 기회를 천민 속오군에게 제공하는 건 전의를 드높이기 위해서다.
북방군과 수방사는 사실상 조선의 유이한 정예군이자 상비군으로, 열의 없는 시정잡배를 그저 머릿수나 충당할 요량으로 밀어넣어봐야 기강만 문란해질 따름이니까.
당근이 확실한 천민 속오군이라면 그나마 머릿수만 채우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주겠지.
“늘어난 비용은 내가 충당할 테니, 병판과 호판은 각 군대가 예산을 방만하게 허비하지 않도록 잘 감시해 주기를 바랍니다.”
“예에.”
이광정과 김신국이 허리 숙였다.
* * *
조회를 마친 뒤에는 즉조당으로 돌아와 최 상선의 보고를 받았다.
그동안 내수사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축적했으며, 군량으로 가용할 수 있는 식량은 얼마나 있는가.
수 해 전, 나는 이괄을 제거하면서 독살의 혐의를 만들어냈고 이를 흥안군에게 뒤집어씌웠다.
원래 역사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서로 결탁했던 자들이다. 모략을 연쇄하고 부산물을 재활용하여 두 사람을 함께 치워버렸으니, 차도살인으로 일거양득을 이뤄낸 셈이다.
흥안군은 이괄의 아들인 이전에게 도살을 당했지만 이것으로 모략이 끝나지는 않았다.
공개된 흥안군의 혐의를 이용해 종친들을 압박하여, 선조가 이들에게 살포한 궁방전을 몰수해낸 것이다.
만성적인 기아 상태에 놓인 정부 재정으로 인해 휘청거리는 북방군 유지비에 보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나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종친 매수에 사용했다.
능력으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으니 헐값으로 나라의 미래를 팔아넘긴 셈이다. 그것을 돌려받았다는 건, 나라의 미래를 되찾았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수사의 양곡 비축량이 삼십만 섬으로 늘어났군요.”
이외에 토지와 귀금속 등으로 비축된 재산은 어림잡아 열 배에 달했다.
“전하께서 사치와 방만을 멀리하셨으므로 전반적으로 재산이 늘어났고, 특히 양곡이 늘어난 이유는 전하께서 사재를 풀어 군사와 백성을 먹이셨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했다는 말이군요.”
“예.”
장부를 검토해보니, 살포되었던 궁방전을 환수하고도 양곡이 보관성 좋은 재산으로 환전되는 절대값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게 아예 정지되지 못한 건 양곡 보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겠지. 과연 유지비 명목으로 지출이 늘어났다.
이따금 검토해온 장부다. 이 같은 변화를 미리 거론하지 않은 건 방향성이 옳았기 때문이다.
“북방군과 수방사 남창南倉으로 삼만 섬씩 보내세요.”
남창南倉은 일반적으로 군량미 창고를 뜻한다. 남쪽에 위치한 창고라는 보통 명사가 이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건 곧 동궁東宮이 세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리라.
“나머지 양곡도 미리 운송하기 편하게 옮겨두세요. ……그렇다고 평안도나 경기도 일대에 너무 집중시켜도 안 됩니다. 후금군이 쳐들어왔을 때 방화나 노략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다소 애매한 명령이라는 건 인정했다. 축약하면 ‘잘’ 해보라는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지시였다.
그러나 나는 물류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상황에서는 짧은 식견으로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내리기보단 경험 많은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최선이다.
“받들겠사옵니다.”
왕을 대신해 내수사를 오랫동안 총괄해 온, 물류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최 상선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정녕 괜찮겠사옵니까?”
최 상선이 지극한 우려와 함께 상자를 바쳤다.
그간 어딘가에 놓아두지 못한 채, 내가 장부를 검토하는 동안에도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있었던 상자다.
그만큼 내용물이 귀한 탓이다.
나는 상자를 서안에 얹어놓고서 이중삼중의 포장을 풀었다.
평상시에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는 내용물이다. 왕에게 도장은 상황과 용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도장의 종류가 다르다.
그러니 존재만으로 왕의 재위를 증명하는 도장도 따로 있다.
개중 하나가 명나라에서 하사한 대보大寶다.
명나라의 공인이 왕의 정통성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조선왕위의 특성 상, 명의 공인을 증명하는 대보는 그 이름처럼 커다란 보배다.
“전하.”
밖에서 내시가 불렀다.
“세자 입시하였사옵니다.”
“들라고 하세요.”
덤덤한 윤허와 함께, 낯빛이 잔뜩 상기된 세자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입장했다.
영의정을 통해 피신에 항의하였으나 묵살되고서 전주행이 확정된 세자다.
그래서 서궐이 특히 바빠진 참에 불려왔으니, 머리 좋은 세자라면 나의 호출 사유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걸 짐작했을 거다.
과연 서안에 놓인 대보를 보고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대경실색하더니, 금세 침울해지는 세자였다.
“이것을 직접 보는 건 세자도 처음이겠구나.”
“……예, 아바마마.”
“와서 앉아라. 당분간 네가 맡아야 하니 생김새 정도는 눈에 익혀둬야지 않겠느냐.”
세자는 입술을 만 채로 다가와 서안 맞은편에 무릎을 꿇었다.
대보를 건네니, 세자는 떨리는 손으로 받쳐 든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아바마마…….”
“만약을 위해서일 뿐이다.”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각오하지는 않았다. 단지, 놈들은 필사적으로 전격전을 펼칠 것이 예상되므로 말했다시피 만약을 대비할 뿐이다.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만에 하나의 경우로 최악이 실현된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왕이어서는 안 된다.
대보를 미리 세자에게 전달하는 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