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5화
“시명지보施命之寶와 유서지보諭書之寶를 제외한 대보와 나머지 인신印信을 모두 가져가라.”
시명지보는 관리 임명과 왕명 하달에 사용하는 도장이고 유서지보는 군사 지휘권자를 임명할 때 사용한다.
전쟁 상황에서 필요한 도장들.
나머지 인신은 그렇지 않다. 짐에 불과하고, 혹여 적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피곤해지기만 할 따름이다.
대보와 함께 세자가 가져가는 게 맞았다.
그러나 세자는 이 같은 명령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대보를 받쳐 든 두 손이 덜덜 떨리더니 거의 놓칠 지경이 되어서는 혼미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되옵니다. 소자가 어찌 감히…….”
세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옛 교훈을 상기해 줄 때였다.
나는 흘러내리기 직전인 대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한결 숨 돌린 세자 앞에 들었다.
“세자에게는 이것이 왕위를 증명한다고 생각하느냐?”
정통성이 되는 상징은 분명 중요하다.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수록, 확고한 증명을 소유할수록 행보에 차질을 덜 빚으니까.
하지만 정통성과 상징이 전부는 아니다.
“대보가 왕위를 증명한다면, 대보에 줄을 묶어 개에게 걸어주면 그 개가 곧 조선의 왕이겠구나.”
극단적인 예시를 들었지만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무 어중이떠중이가 대보를 가진다고 조선의 왕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왕이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는 왕이야말로, 진정으로 왕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보가 세자의 손에 들어간다고 내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니게 되느냐?”
“……아니옵니다.”
“세자가 왕의 인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세자가 왕이 되느냐?”
“아니옵니다.”
“내 일전에 이미 어좌를 어좌로 만드는 건 왕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좌를 어좌로 만드는 건 용 장식과 화려한 비단 방석이 아니다. 왕이 앉기 때문에, 그저 사치스러운 의자에 불과한 사물이 어좌라 불리는 것이다.
“당장 내가 앉은 이 어좌도, 길거리에 내다 놓는다면 그저 값비싼 의자에 불과하다. 누가 앉더라도 한때의 어좌에 앉았다 하여 조선의 왕을 참칭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대보와 인신들도 마찬가지다. 노적이 왜 구차한지 아느냐?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대원의 옥새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권위를 의심받지 않는 자라면, 그런 짓을 벌일 필요도 없었겠지.”
“그러하옵니다.”
세자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대보와 인신을 가져가라.”
“예, 아바마마.”
대보를 원래 있던 상자에 넣어두고서 밀어내니, 세자가 공손하게 받쳐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께서 다시 가져가실 때까지 잘 보관하겠사옵니다.”
“그래. 그것이 맞다. 세자가 많이 깨우쳤구나.”
“예. 대보도 결국에는 사물에 불과할 뿐인데, 감히 사물에 아바마마의 권위를 투영했으니 소자가 짧은 안목으로 불충을 저지른 셈이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명심하겠나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최 상선을 보았다. 그는 적잖이 감명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조와 광해군을 오래 상대해 온 사람이라 그렇다.
“세자에게 인신을 가져다주세요.”
“예에, 전하.”
“세자야.”
“예.”
“또 보자.”
“예.”
그렇게 세자는 최 상선과 동행하고서 물러났다.
* * *
머나먼 북방에서.
홍태주는 생각했다.
조선이 극구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를 대서라도 황제 즉위식에 사신을 보내올 거라고.
그러나 자신감이 차고 넘친다면 요청을 무시할 거라고.
만약 후자의 경우처럼 조선이 기고만장하다면 전쟁을 일으켜 미리 찍어놓는 게 맞았다.
어떻게 될지는 홍태주도 반신반의했다.
조선은 분명 강성해졌지만, 전쟁에는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어떤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놀랍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여러모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여겼을 따름이다.
손해 볼 게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태만했을지도 모른다.
원정에 동행한 조선의 신하가 귀국한 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조선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사신을 보낸 것도 아니고, 초청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참석의 제안을 받지조차 못했다는 듯 무시로 일관할 따름이다.
만약 조선의 왕이 전대의 인물이었다면 홍태주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나약한 겁쟁이가 불만이 가득할 때 그러듯이, 전대의 조선왕이 무시로 일관하는 건 저들의 무능과 유약함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려는 발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 왕은 어떠한가?
전대 조선 왕이 그저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을 뿐인 양의 무리를 지금 같은 상태로 변모해낸 인물이다. 이유 없이 조용할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홍태주는 불안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기 어려울 정도로.
벌떡 일어선 홍태주가 처소를 나서자, 일대에서 대기하던 친위병들이 곧장 뒤따랐다.
“어디로 행차하십니까?”
그나마 측근이라고 할 만한 사내가 말을 붙여오자 홍태주가 짧게 답했다.
“한을 뵈러 간다.”
측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하 하나를 불러 먼저 보냈다. 미리 한의 입궐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홍태주는 지체하는 일 없이 궁궐에 입장할 수 있었다. 친위대는 바깥에서 대기했다.
선양의 궐내는 새로운 주인에게 뼛속까지 충성을 맹세한 비굴한 한인 궁인들로 즐비했다.
개중에는 홍태주 본인이 심어놓은 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홍태주는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궁인들을 모두 물리쳤다. 궐내의 구조는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추종자만 동행하면 되었다.
혹여 궐내에서 암살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믿을만한 소수의 궁인을 대동한 홍태주는, 한의 처소에 이르렀다. 방문 의사를 재차 전달하니 윤허가 떨어졌다.
무기 소지를 검사받은 뒤 입장한 처소에서, 한은 깊은 곳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부자父子의 만남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홍태주가 나아가 예를 다하자 한이 일렀다.
“무슨 일이냐, 사패륵.”
“조선이 한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으니, 이는 거부와 같습니다. 속히 거병하시어 불령한 무리를 다스리시지요.”
“끝내 저들과 전쟁을 하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누르하치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나의 즉위식을 미루고, 조선의 반응을 떠보자고 했던 건 너 사패륵의 주청이었다.”
“예.”
“조선의 신하를 귀국시키고, 또 저들이 논의하고서 다시 사신을 보내 응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터이거늘, 이제 와서 갑자기 전쟁을 서두르자는 말이냐?”
“논의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부터 조선의 불령함을 증명합니다. 어쩌면, 진즉 상의를 마치고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르하치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지금까지 그의 여정이 짧지는 않았다. 그러나 체감하는 굴곡은 최근이 심한 편이다. 자식 문제가 특히 그러했다.
한의 권위를 위한 원정이었다.
그래서 대원의 옥새를 얻어 황제로 즉위하려는 이때, 후계자로 점찍어둔 사패륵마저 한의 뜻을 손바닥 뒤집는 정도로 여긴다.
누르하치로선 불쾌할 일이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녀석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 컸다는 걸까?
“거병은 서두르지 않는다. 내가 황제의 즉위식을 앞두고 충분한 인내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온 천하가 내가 조선을 공격하고자 일부러 응하지 못할 즉위식에 불렀다고 규탄할 것이다.”
“한이시여…….”
이미, 만금으로 산 화친을 도발로 사실상 깨버리지 않았던가? 지금 신의를 신경 쓰는 것도 우습기만 할 따름이다.
즉위식은 아직 행해지지도 않았거늘 벌써 황제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홍태주가 내심 불만을 품는 동안 누르하치는 고압적으로 일렀다.
“내게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게 할 셈이냐?”
“……아닙니다.”
홍태주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한의 시야가 닿지 않은 곳에서 미간을 굳혔다. 불안이 한 층 강렬히 엄습한다.
조선왕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누르하치는 대조적이다. 원정을 마친 뒤 귀환한 그는 부쩍 늙어버렸다. 한때의 패기를 모두 상실한 채 정체해 버렸다.
“물러나겠습니다.”
“가라.”
누르하치가 권태롭게 손을 휘저었다. 그 축객에 홍태주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몸을 돌려서 어전을 빠져나갔다.
홍태주가 궐문을 나서자 곧장 친위병들이 따라붙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한 홍태주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서일까. 친위대는 긴장하면서도, 감히 말을 붙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처소로 귀환한 홍태주는 곧바로 자신의 세력을 불러모았다.
본래 외가로는 예허부를 등에 업었으며, 처가로는 일찍이 후금에 굴복한 몽골 분파 코르친부를 업었다.
여기에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유력해온 만큼, 홍태주의 세력은 원정의 종결과 함께 퇴물이 되어버린 한의 세력을 능가했다.
간만의 소집이었다.
홍태주가 이처럼 강대한 친위 세력을 공공연하게 소집하는 건, 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니까. 내실을 과시하지 않은 이유다.
홍태주의 정비 철철哲哲의 오라버니이자, 측실 포목포태布木布泰의 친부이기도 한 채상寨桑은 집결한 측근들을 돌아보고서 말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채상은 소집의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홍태주가 한의 눈치를 보느라 기피해 온 소집이다. 그것을 실천했다는 건 결심을 품었다는 뜻이다.
그 결심이 무엇이건, 부족과 가문의 명운을 모두 홍태주에게 건 채상이다. 의문을 가지는 대신 그저 따를 따름이다.
홍태주가 말했다.
“대금은 한계에 직면했다.”
산해관을 넘지 못했고, 차하르부는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으며, 그들 너머로는 투메드와 오르도스가 재기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요동에서는 안산 공방전과 동경에서의 내란, 그리고 피난과 같은 천도로 기세를 얻은 한인들이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켰으며 차하르부에서 어부지리할 목적으로 대동한 몽골인 병력은 우악스럽게 식량과 재물을 축내는 중이었다.
이 문제를 타개할 방법은 하나다.
조선을 무력으로 평정하거나, 그들의 굴종을 얻어 내치와 명나라 공략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은 칼을 뽑아 든 채 뒤숭숭한 분위기만 만들 뿐, 무엇도 베려고 하지 않았다.
패기를 잃어버린 이 늙은 한이 황위에 올라 현재에 더욱 안주해버린다면 대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홍태주는 묵과할 수 없었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강건한 대금을 쟁취해야 했으니까.
몰락한 폐물이 아니라.
그래서 홍태주는 결심했다.
“황위에는 내가 올라야겠다.”
* * *
홍태주는 재차 궁궐을 찾았다. 친위병을 대동한 채였다.
궐문을 지키는 수문장은 홍태주가 대동한 병력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패륵들은 저들의 안위를 위해 항상 호위병을 대동했으니까.
다만 방문한 시각이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늦은 밤이었으니까.
“야심한 시각인데, 어인 일이십니까.”
“한을 뵈어야겠다. 비켜라.”
“한께서 호출하신 것이 아니라면 지금 시각에는 궐을 안내해드릴 수 없습니다.”
수문장이 경직된 어조로 답했다.
홍태주는 몇 걸음 당당하게 나아갔고, 이내 수문장은 홍태주의 절제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코에서 흘러나오는 얕은 한숨.
수문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장차 한이 될 사패륵과의 신경전은 파멸의 예고와도 같다. 하지만 당장의 한은 누르하치다. 물러난다면 그를 배반하고 당장의 파멸을 맞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오를 되새긴 수문장에게 홍태주가 말했다.
“충성스럽구나.”
“그것이…….”
수문장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홍태주가 파고들었다. 갑주의 틈을 파고든 칼날에 수문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홍태주의 친위대 사이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궐문 앞을 지키던 몇 사람의 얼굴마다 두어 발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끄윽!”
홍태주가 칼을 뽑아내자, 수문장은 쓰러지며 몸을 말았다.
“미련하게도.”
반역을 결심한 홍태주에게, 대금의 한은 이제 자신이었다. 수문장은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지 몰랐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
홍태주가 최초로 친위대를 대동하고서 궐로 입성하자, 한족 궁인들이 숨을 삼키면서 물러났다.
누구 하나 한을 위해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의 이동을 직감적으로 깨우쳤다. 그만한 눈치가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한족임에도 그간 누르하치의 수발을 들어 온 것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새로운 주인이 등극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