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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46화 (146/380)

인조, 명군이 되다 146화

“한이시여.”

홍태주가 궁궐 내부의 처소로 돌입했을 때, 누르하치는 황제의 양식으로 장식한 어좌에 앉아 있었다.

등받이의 좌우는 다섯 개의 발톱이 강조된 용이 양각되었고, 방석은 다양한 문양이 수놓아진 금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명이 제국으로서 군림해온 지난 세월과는 이질적인 복장만 제외하면, 얼핏 어좌에 기댄 채 불청객을 마주한 누르하치를 영락없이 황제처럼 여길 법했다.

“반역이냐?”

누르하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위축되지도 않았다. 사패륵의 반란이 예상 밖이긴 했다. 하지만 패륵과 다른 아들 중 누구라도 칼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해온 견제였다.

결과적으로는 별 실효 없었을 뿐.

“실책이었습니다.”

“…….”

“조선에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됐습니다.”

황제 즉위식의 건으로 조선을 시험하자는 계락은 본디 홍태주의 제안이었다.

누르하치는 그 점을 지적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입을 여는 대신 팔짱만 낄 따름이었다. 그런 무심함이 홍태주에게는 훨씬 맹렬한 추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각오한 홍태주였다.

“늦기 전에 거병해야 합니다.”

“그게 반역의 명분이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대안이 없습니다.”

“우습구나.”

누르하치의 일축에 홍태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성공한 반역이었지만, 도저히 성취감이 들지 않는 결과였다.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홍태주는 한족 궁인들이 기꺼이 길을 비키는 동안 피딱지가 말라버린 칼을 늘어뜨리고서, 옛 한에게 나아갔다.

그렇게 홍태주의 칼끝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 누르하치가 말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하여 조선이 먼저 쳐들어오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몇 번 안 보았을 텐데 그새 압도되었구나. 너를 조선으로 보낸 것이야말로 실책이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질타하는 옛 한의 모습에 홍태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옛 한은 패기를 다 잃어버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무의미한 회한과 함께 홍태주는 늙은 몸에 칼을 박아넣었다.

누르하치의 두 눈에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그러나 신음은 없다. 대신, 그는 제 가슴팍을 향해 뻗은 홍태주의 팔을 놀라운 완력으로 잡아당겼다.

흠칫한 홍태주가 끌려오자, 누르하치가 침을 흘리면서 일렀다.

“한심한 놈……!”

홍태주는 저항하듯 물러났다. 그리고 칼을 비틀어 뽑았다. 강건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으나, 연로한 신체는 한계를 극복해 내지 못했다.

“으음!”

패륜아에게 만족스러운 죽음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누르하치는 절제된 신음만을 남기고서 늘어졌다. 칼이 뽑혀나간 자리에서 붉은 핏물이 번져나갔다.

“그대보다는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것이 대금의 미래에 이로울 거요.”

홍태주는 두고 보라며 덧붙일 생각이 들었지만, 굳게 입을 닫았다. 너무 구차한 꼴불견이다. 행위로 결과를 증명하면 될 따름이다.

그는 자신과 동행하여 한위 승계의 증인이 된 친위병들에게 명했다.

“대금의 옥새를 가져와라. 방해가 될만한 인간들을 치워야겠다.”

* * *

가노의 전언에, 시비를 양편에 끼고서 잠들었던 대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의 호출이라고?”

대선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 너머를 흘겼다. 구름 짙어 별빛조차 없는 밤이었다.

“으음…….”

대선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막 함께 일어나 눈치를 보던 시비들을 밀어냈다.

시비들은 대선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적당히 한과의 대면을 위한 차림새가 갖춰지자, 대선은 미리 기상하여 대기하고 있던 친위병을 대동하고서 출타했다.

곧, 대선은 궁궐에 이르렀다.

수문장에게서 유난히 긴장이 느껴졌다. 대선은 의아하게 여겼으나, 곧바로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다. 한의 처소다. 별일이야 있으랴.

친위대를 떼어놓고서 궐 내로 진입한 대선은, 문득 혈향을 느꼈다.

“……!”

자다 깨어 비몽사몽한 정신이 일시에 각성했다. 한을 쫓아 전장을 전전해온 대선이다. 피의 냄새를 모를 리 없었다. 원정에서 귀환한 뒤 몇 달 간 맡아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쉽게 분별할 수 있었다.

한의 처소에서 나야 할 냄새는 아니었다.

긴장한 대선이 움찔, 멈춰서자 언제부텨였냐는 듯 사방의 담장과 출입구에서 병사들이 등장했다.

대선은 개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채상. 홍태주 정비의 오빠이자, 측실의 부친. 그의 등장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홍타이지가 드디어 미쳤느냐? 가만히 있어도 한위에 올랐을 터이거늘.”

그러니 반란을 꾀할 이유가 없었다.

대선이 생각하기에는.

채상이 답했다.

“한이 되신 분이오.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

“또한, 한께서는 대금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리셨소. 조선을 도발한 뒤 태만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건 후환이 되는 길이요.”

“조선을 시험하는 건 홍타이지의 발상이 아니었더냐?”

“그러고 내버려 두는 건 계획이 아니었을 뿐이요. 이제, 대패륵께서도 사정은 아셨으니 이만 가시오.”

“무모한……!”

대선의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다. 일제히 날아온 화살들이 그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대선은 단말마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등장한 이는 삼패륵 망가퇴였다.

망가퇴는 채선과 대담하지 않았다. 다만 대선의 이질적인 혈향을 느끼기 무섭게, 뒤편의 궐문을 향해서 외쳤다.

“쳐라!”

저를 후계구도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제 어미를 처단한 망가퇴였다. 저를 숙청하고자 계략을 벌인 인물이 제 부친이건, 혹은 누군가이건 얌전히 죽어줄 인물이 아니었다.

망가퇴는 곧장 날아드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밖에서 그의 명령을 받든 망가퇴의 친위병들은 곧바로 칼을 빼들고 궁궐로 향했다.

사태 파악이 덜 된 대선의 친위대는 급작스럽게 벌어진 싸움에 반사적으로 무장을 빼 들었다.

망가퇴의 친위대나 대선의 친위대나 피차 궐내에서 벌어진 상황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이내 내편이 아니면 모두 죽인다는 분별 없는 난전이 펼쳐졌다.

느닷없는 교전에 물벼락을 맞은 건 선양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끌려 와 궁궐과 관청의 건설, 방어시설의 개보수 등 수도 천도의 모든 노역을 전담해야 했던 한족 노예들은 동경에서 그러했듯 이번에도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만주족 주민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자라면 분별없이 무장을 휘둘러 거리마다 피를 뿌렸다.

어딘가에서 붙기 시작한 불로, 후금의 새로운 수도에는 잿가루가 진눈깨비처럼 휘날렸다.

번뜩이는 화마를 등진 무수한 검은 인영들이 서로를 죽여댔다. 모두의 모두를 향한 학살이었다. 총체적인 광기에, 안정적인 세력을 갖춘 일부만이 친병을 이끌고 수도를 탈출했다.

아파태도 그중 하나였다.

* * *

“아니, 뭔데?”

의주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겉봉이 예전과 달리 적색으로 염색되어 보통 비상한 소식은 아니리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아파태가 전한 소식은 예상을 압도했다.

홍태주가 반란을 일으켜 누르하치와 그간 한위의 경쟁자들이었던 대패륵 대선과 삼패륵 망가퇴를 모두 처단하고 직접 황제에 올랐다는 것이다.

‘얌전히 있을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만…….’

끝내 대명을 패망시키고 중원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유력한 후계자인 상황에서 찬탈을 일으켰다니?

어지간해서는 시도는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않을 만행이다.

‘……하지만 홍태주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미친짓을 벌여도 분명 이유가 있는 놈이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태반의 헛소리로 치부할 못 믿을 사람이 있고 소수의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데 홍태주는 후자에 속한다.

분명 호전적인 인물이나, 찬탈이라는 과욕이 불러들일 후폭풍을 간과할 정도로 무모하거나 멍청하지 않다.

그것은 그가 역사에서 보여준 행보가 증명한다. 위업과는 별개로, 정치력 역시 뛰어난 자다.

누르하치는 생전 강력한 세력을 갖춘 제 자식들을 견제할 겸, 후금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한의 선발 및 퇴진과 국정운영을 소수 패륵들의 합의를 통해 결정하게 했다.

홍태주가 한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자신의 운신을 속박하는 이 유지를 파훼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야만적이지 않았지. 복잡하지도 않았고.’

홍태주의 파훼법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그저 국정운영의 결정권을 가진 특권층을 대거 임명했다.

권력이라는 글자에는 무게추라는 의미의 권權이 들어가 있다.

무게추란 무엇인가?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이는 힘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의 발언은 무게를 갖게 된다.

홍태주는 다수에게 같은 권력을 부여했다. 저울의 양편에 동등한 무게추가 실린다면, 이는 의미가 없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방법으로 홍태주는 누르하치의 유지를 거스르지 않고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교를 보여준 사람이 무턱대고 찬탈이라니 말도 안 되지. 명확한 이유와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이게 진실이라고 보는 게 맞다.

‘다르게 말해보면, 홍태주는 찬탈의 후폭풍을 감수할 정도로 당장 국가 원수의 권한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무엇이 문제일까.

후금의 최근 행보는 회복기로 점철되어 있다. 안산 공방전 이후 수도를 옮겼으며, 새로운 궁궐을 짓고 원정을 떠나 군사적 위업과 함께 대원 옥새의 확보를 동시에 실현했다.

딱히 모날 게 없는 행적이다.

‘……그리고 조선에는 황제 즉위식에 참여를 요구했지.’

감이 좋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간 조선은 요구에 무응답으로 일관하면서 변방의 방비를 강화하고 새로운 중앙군을 신설 및 육성했으며 신무기까지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보를 다 두 눈으로 감지하지는 못했겠지만, 드러난 것만으로도 홍태주는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여긴 것이다.

‘하기야, 내가 먼저 국경을 넘지 않을 의사를 보이고 조선의 상황 역시 그편이 유리하다고는 해도…….’

황제 즉위식을 통해 제국을 천명한 후금이다.

그리고, 인접한 소국마저 존중하지 않는 자칭 제국만큼 비참하고 하찮은 것도 없다.

제국에 굴종하지 않고 매사 기고만장할 조선은 신생 제국에 반드시 껄끄러운 존재다. 붙어 있으니 피할 방도도 없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혓바늘인 셈이다.

더욱이 만에 하나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벌이는 중 조선이 이때다 싶어 강성한 군대를 이끌고 강을 넘는다면, 후금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망국도 각오해야겠지.

‘영원히 눈엣가시로 남느냐, 가장 위태로울 때 뒤통수를 맞느냐…….’

어느 쪽이라도 감내할 수 없는 위협이긴 하다. 중원의 평정조차 불확실하니 더욱 불안했으리라.

그러니 홍태주는 최소한 제국의 위신이라도 세우기 위한 표면적인 굴종이라도 바랐겠지만, 조선은 대판 깨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고개 숙일 나라가 아니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다.

‘그게 홍태주를 반란까지 일으키게 만들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상황은 대강 알았고 홍태주가 급발진한 이유도 파악했다. 그가 곧바로 보일 행보가 명확하니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전쟁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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