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7화
동북東北이라 칭해지는 함경도에도 동북은 있다.
육진六鎭.
세종대왕 시절 사군四郡과 함께 조선의 역사로 편입된 조선반도 최북단 지역이다.
육진은 동서북 삼면이 자연국경인 두만강과 맞닿고, 그 너머 여진족 세력과도 접경하며, 또 두만강 이북에서 조선반도로 진입한다면 육진을 통해야 했으므로 일대의 군사적 가치는 매우 중요했다.
함경도의 순변사인 한명련이 육진과 그 일대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이유였다.
육진에서도 최북단에 속하는 온성부穩城府의 읍성 성곽에서.
한명련은 두만강 너머를 주시했다. 유난히 안개가 짙게 낀 날이었다. 안개가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문득 성첩으로 발소리가 다가와 지척에서 멈췄다.
“아버지.”
“……윤이냐.”
한명련은 몸을 돌려 아들을 맞이했다.
한윤.
정처 없이 임지를 횡행하는 부친을 쫓아 수발하는 효자였다.
한명련은 아비 된 심정으로는 아들이 이만 독립하여 제 관직을 지내기를 바랐으나, 또 이런 수발이 고마운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여긴 어인 일이냐?”
“선전관이 방문했습니다.”
“……선전관이?”
“예. 아버지께 전달할 교지가 있다고 합니다.”
교지는 곧 왕의 전언이다. 미뤄둘 일이 아니었으므로, 한명련은 곧장 한윤과 함께 객사로 귀환했다.
동헌 마당에는 온성부사가 긴장한 얼굴로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온성부사의 인사에 한명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 뒤이어, 부사와 함께 있던 무관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순변사십니까.”
“그렇네.”
“교지입니다. 받드시지요.”
한명련은 선전관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왕이 계실 곳을 향해 사배를 올렸다.
왕의 전언을 맞이할 예의를 마치자 선전관이 교지를 펼쳤다.
“교한다. 아조는 노추가 발호한 이래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는데, 근래 사세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천하의 정세가 위태로워졌다. 오직 경험 많고 유능한 인재만이 대비할 수 있어 순변사 한명련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제수한다. 즉각 부임하라.”
선전관의 일독에 한명련은 내심 놀랐다.
왕의 과분한 평가도 의외였으나, 군대를 조련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순변사는 어디까지나 중앙에서 파견된 임시직이다. 군무에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병마절도사는 다르다. 품계는 달라지지 않았으나, 한명련은 개의치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즉각’ 부임하라는 다그침이다. 또한, 왕은 교지에서 정세의 악화를 강조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임란 이래 육진과 함경도는 그간의 중요성과는 대조적으로 외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디, 두만강 너머는 갖은 여진족이 이합집산하여 조용할 날이 없었다. 때로는 강성해진 세력이 과감하게 조선의 변경을 노리기도 했다. 임란 직전 발생한 니탕개의 난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후금이 발호하여 일대를 평정한 뒤로 두만강 이북은 심하게 조용해졌다.
명나라 공략과 요동의 안정에 집중하는 후금에 있어 개발도 부족하고 인구는 적으며 이질적인 야인여진이 분포한 두만강 이북은 관심사가 아니었던 탓이다.
조선과 후금의 외교가 위태로워질 때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돌입하는 평안도와 달리 함경도는 조용했던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거겠지.’
긴장과 함께 묵은 숨을 토해낸 한명련은 남쪽을 향해 재차 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같은 천민 출신 무장인 정충신의 행적은, 평안도와는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함경도에도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한명련은 더더욱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정치적인 면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대적對敵이라는 방면에서는 정충신만 못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한명련이었다. 그래서 미천한 출신에도 불과하고 오늘날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던가?
자신을 병마절도사에 제수한 왕의 안목이 옳았음을 증명할 때였다.
* * *
한명련이 경성으로 질주하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의 발병부發兵符를 인수하고서 며칠 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던가?
과연 그러하다는 듯 한양을 오가는 관리들의 입소문을 탔는지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흉흉한 풍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 흔히 퍼지는 붕 뜬 헛소문이 아니었다.
후금에서 내홍內訌이 일어나 유망한 후계자였던 홍태주가 부친을 베고 한위를 차지했으며, 황제를 참칭했다. 무언가 일을 벌이기 위함이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이에 한명련은 북병영北兵營이 위치한 경성에서 장정들을 징발한 뒤 지휘부를 부령부富寧府로 옮겼다.
경성은 육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위급한 상황에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한명련의 판단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급하게 옮겨진 지휘부가 채 안정되기도 전에 다섯 줄기 봉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 * *
아차산峨嵯山에서 다섯 개의 봉화가 피어올랐다.
함경도의 봉화와 연결된 아차산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또한 아차산과 마찬가지로 봉화가 함경도와 연결된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의 목사 역시 봉화가 올랐다는 소식을 급하게 치보했다. 혹여 기상이 나빠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철저함이었다.
덕분에 빠르게 경각심을 일깨운 한양에서는 중신들이 소집됐다.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왕을 불렀다.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한 탓이었다. 최고 결정권자가 회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주어야 했다.
“서둘러 평안도에 적의 침공을 알려야겠습니다.”
“평안도에, 말이옵니까?”
“함경도와 그 이북은 조선과 후금 모두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고, 또한 평안도와 달리 후금은 함경도의 지리를 거의 알지 못할 텐데 주력 군사를 그쪽으로 보냈겠습니까?”
“이목을 끌기 위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이란 말이옵니까.”
“내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혹, 다른 생각이 있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이에 병조판서 이광정이 나섰다.
“압록강 근방은 북방군이 주둔하고, 최근 방비도 크게 강화되었으니 이를 우회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것이 지식이 전무한 지형으로 대군을 밀어넣을만한 사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금의 전략이 강행돌파라면 더욱 그렇지요.”
지리가 밝혀지지 않은 전장에서 대군의 기동이란 맹인이 손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둘러 한양을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더 먼 길을 돌아가며 그 같은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을까?
“병판의 의견을 묵살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후금은 평안도의 방비가 얼마나 강하되었는지 병판만큼은 알지 못할 겁니다.”
강 너머에서 많이 지켜보았을 테고 여진족 유민을 가장해여 간자도 다수 파견했겠지만 당사자만큼 실정을 알 수는 없다.
병조판서는 국경의 방비 강화를 총지휘한 당사자로서 실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후금이 이를 회피할 가능성을 더 높게 점친 것이다.
“내가 평안도에서의 침공을 성동격서라 판단한 근거는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이옵니까?”
“후금은 버릴만한 패가 많고,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금에는 실전 상황이 유예되면서 식충이로 전락했을 차하르부의 전사들이 있고, 또한 두만강 이북에는 끝내 만주족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군소한 야인여진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조선이 당장 기동 가능한 유의미한 병력은 수방사뿐이다.
“속오군은 그저 군적을 채우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이들로는 정예한 후금군을 감당할 수 없어요. 전장으로 내몬다면 무수한 인명을 팔아 적의 침공을 잠시 지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으음…….”
이광정은 군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속오군을 향한 냉정한 평가에 침음을 흘리면서도,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실체는 병조판서로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함경도에서 발생한 상황에 한 눈이 팔려, 유의미한 예비대를 낭비하거나 뒤이을 평안도에서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후금으로서는 전략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셈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옵니다.”
“내가 바라는 이견은, 함경도에서의 침공이 성동격서가 아닌 주공의 침공일 실리적인 추측입니다. 병조판서의 주장은 그 궤에서 벗어나진 않았으나, 우군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분명해서 외부 세력의 판단 근거로는 과한 점이 있지요.”
후금이 국경의 방비를 좀 강화했다고 지레 겁 먹을 놈들이 아니기도 한 탓이다. 궁극적으로는 산해관으로 진입로를 틀어막은 대명을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신 역시 함경도에서 발생한 침략의 실체는 성동격서를 위한 기만술이 아닐까 하옵니다. 그러니 치보가 당도하여 분명한 상황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는 대신 전하의 분부대로 평안도에 일러 적의 침공을 방비케 함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제신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논의된 바를 돌이켜보면 이편이 합리적이었다.
“공론이 나의 의견에 부합하니, 지체하지 말고 평안도에 방비를 전지함이 좋겠습니다.”
금세 지필묵이 대령됐다.
일반적으로는, 왕이 내리는 명령일지라도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나 이번에는 상황이 급했으므로 친필했다.
대보와 각종 인신은 왕이 세자에게 일러 미리 가지고서 피신케 하였으나, 왕명을 공인할 때 사용하는 시명지보는 여전히 왕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지에 차질은 없었다.
“도승지?”
왕이 완성된 친서를 건네자, 도승지 이덕형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받들었다.
“즉각 전하겠사옵니다.”
“그러세요.”
도승지가 물러나고, 왕은 병조판서에게 일렀다.
“수방사 역시 즉각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겠사옵니다.”
“일전에 천민 속오군을 수방사에 편입하게 했는데, 잘 적응하고 있는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여 그간 따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만 미리 짚어두어야겠습니다.”
“그 부분은 염려치 마시옵소서. 원수와 부원수가 그간 엄중히 조련해왔고, 편입된 속오군 역시 열의를 가지고 훈련에 임하였으므로 적절한 규율과 기강이 갖춰졌사옵니다.”
왕은 수방사에 편입된 천민 속오군에게 현실적인 속량을 보상으로 내걸었다.
천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사노비를 제외하고도 대개의 천민은 가진 땅이 없어 유랑하거나 산비탈 따위에 움막이나 진배없는 집을 짓고 살아갔다.
승려, 사냥꾼, 무당과 박수, 광대와 사당패 따위가 그렇다.
예외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서 살아가는 백정이라도 모두가 예외는 아니었다. 천민을 향한 세간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은 관계로, 자유롭게 쓰지도 못할 부를 마냥 축적할 바에야 차별받지 않는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백정도 많았다.
이러한 신세에 병작반수竝作半收라는 가혹한 소작세가 없는 농지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농민들과는 달리 그간 농사를 지어본 적이 경험이 전무하여 소출이 형편없을 게 분명했으므로 더더욱 그렇다.
“병사들이 힘써 임해준다니 매우 가상합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개중에도 공을 세우는 자가 나타날 텐데, 임진년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군공을 세우는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겠다고 공표하세요. 장사들이 더욱 기세를 얻을 것입니다.”
북방군 부원수라는 좋은 모범이 있다.
출신이야 어떻건 능력만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위치에 임명하겠다는 약속과 그 증거가 함께 제시된다면 유능한 사람은 더욱 불타기 마련이다.
“실전을 앞두었으니, 타고난 신분이 천민이라 하여 편입된 군사들을 차별하는 등 사기를 낮추고 내홍을 유도하는 만행은 더더욱 엄중하게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원수와 부원수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재차 전달해주기 바랍니다.”
“받들겠사옵니다.”
왕은 눈을 감았다.
이만하면, 봉화로 전달된 소식에 부족하지 않은 대응이리라.
함경도는 혹 그쪽이 주공이라는 소식이라도 날아든다면 모를까, 당장의 싸움은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다.
북병사로 임명한 한명련이 다른 역사에서도 보여주었던 재주를 이번 역사에서도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왕과 조정이 함경도를 당장 돕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던 그 시각.
한명련과 그의 병력은 적들에게 포위된 온성부 지척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