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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48화 (148/380)

인조, 명군이 되다 148화

다시 찾아온 온성부의 풍경은, 한명련이 북병사에 제수되어 경성으로 향하던 때와는 크게 달랐다.

척박한 농지에서 어렵사리 줄기를 틔운 작물들은 모조리 쓰러져 진창과 뒤섞였고, 성 밖 남루하고 협소한 가옥들은 모조리 폐허로 전락해버렸다.

여진족들은 그 너머에서 위태로운 읍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미 수 차례 공방이 오간 듯, 성벽 바로 아래에는 시신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당장은 소강 상태.

여진족 무리는 새로이 등장한 한명련의 북병영 군대에 긴장하면서도, 물러나지는 않은 채였다.

온성은 원군의 등장에도 환호할 기력은 없다는 듯 성첩에 세워진 소수의 병력만이 지친 얼굴로 근방에 멈춰 선 북병영의 군대를 주시했다.

삼각의 구도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안개에 실린 피비린내와 탄내만이 자욱하게 감돌 따름이었다.

“즉각 적과 교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령부사가 권하자, 막 전장을 파악한 한명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적은 많은데 온성부의 병사들은 매우 지쳐 있으니, 협공은 기대하기 어렵고 도리어 포위당할 위험이 있소.”

“하지만, 저들은 거듭된 공성으로 지치지 않겠습니까? 쉴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부령부사 불안한 목소리로 채근하자 한명련은 손가락을 뻗었다.

“후미의 놈들이 보이시오?”

“……예. 보입니다.”

“겉모습이 오랑캐치고는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이까?”

“……으음.”

“예비대를 편성해둔 것인지, 혹은 공성전 투입에 순번이 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군사가 있다는 뜻이요. 일부나마 병력이 체력을 보전한 수적 우위인 적에게 가벼이 달려들어서는 안 되겠지.”

부령부사는 입술은 물론 수염까지 만 채로 적진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저들에게 휴식 시간을 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합니다. 저놈들이 모두 기력을 회복한다면 지금보다 더 불리안 상황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사의 말씀이 옳소. 그러니 저놈들이 아예 편하게 쉬지는 못하게 만들어야지.”

한명련은 일대를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역시 대포를 설치할 장소로는 이곳이 가장 좋겠소이다.”

전장을 돌아보기 좋은 장소다. 이는 즉 고지대이면서도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포가 활약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다만 그 전에 목책부터 세우고 거마작을 조립해서 진입로를 차단합시다. 대포를 먼저 설치하면 오랑캐들이 달려들 수 있으니.”

“예. 그런데, 놈들이 달려들지 않고 대포의 사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대로도 좋은 일이요. 포위를 물리게 된다는 뜻이니.”

부령부사가 생각해보니 과연 그러했다.

고개를 끄덕인 부령부사는 기수를 돌려 물러났고, 북병사의 명령이 전달되자 무관들은 병사들을 채근했다.

적을 마주한 상황이었으므로 전군이 무턱대고 진지공사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

과반의 병력이 노출된 언덕 경사면에서 적과 대치하는 동안, 재수없이 차출된 병사들은 언덕 너머에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흩어졌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나, 언덕 전면으로 나무 말뚝이 세워지기 시작하자 후금군의 군영에서 소소한 동요가 일었다. 조선의 원군이 면전에서 진지를 구축할 줄은 몰랐다는 투다.

곧 후금군에서 기마병력이 차출되어 접근했다. 이미 망가진 밭이 말발굽에 재차 짓이겨졌다.

“동요하지 마라! 고작 견제일 뿐이다!”

한명련은 일갈과 함께 사수들을 내보냈다.

양측은 몇 번 화살을 교환했고, 대오를 갖춘 사수들의 화력 밀집도를 능가할 수 없었던 여진족 기마궁수들은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서 물러났다.

접전은 짧았으나 진지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사수들이 사상한 전우를 이끌고 물러나자, 진지의 진입로에는 기병 돌입을 차단하는 거마작이 이중으로 세워졌다.

“아버지.”

한윤의 부름에 한명련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소자는 부상자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래.”

부친이 부상당할 때를 대비하여 의술도 익힌 한윤이었다.

그간에는 부친의 수발을 든다고 반쯤은 부관처럼 치부되어 온 한윤이었으나, 지금은 규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

공인된 직책이 없는 한윤이 북병사의 후광에 기대 월권을 행사하기보다는, 어렵게 배운 기술을 발휘하여 진중의 사기를 돌보는 게 옳았다.

접전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이 비명과 신음으로 사기를 흔들고 있었다.

“후방에 천막을 세우고 부상자들을 수용해라.”

“……천막은 두 겹으로 할까요?”

그편이 소리가 덜 새어나가리라. 한명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윤은 곧바로 물러났다.

부상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이 뒤편으로 멀어졌고, 이를 대신하겠다는 듯 언덕 꼭대기에 대포가 세워졌다.

평안도에서는 낙서포라는 신식 대포가 도입되면서 퇴물로 밀려나버린 소홍이포였다.

그래도, 그간 예산과 우선순위의 문제로 최근까지 총통과 불랑기포를 혼용한 함경도에서는 충분히 신무기 축에 속했다.

‘그건 너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의주를 침공한 정람기의 행색은 전해들어 알았다.

개중에서도 정예병의 상징이 금속성 광택으로 빛나는 수은갑인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후금군에게서는 그 같은 위용이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은 정예가 아니다.’

북병영군도 북방군은 아니지만, 함경도로 쳐들어온 후금군 역시 팔기는 아니었다.

저들이 소홍이포의 위용은 알고 있을까? 미지수다. 그러나, 맞기 시작하면 분명한 생각이 들리라.

“북병사 영감! 소홍이포의 방포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느새 귀환한 부령부사가 고했다.

“시작하게.”

“예!”

전언과 함께.

소홍이포의 포구가 화염과 함께 쇳덩이를 토해냈다.

긴장한 낯으로 대포를 마주하던 한 여진족의 면상이 그대로 사라졌다.

콰직!

포탄에 적중한 목책이 박살났고, 파편이 비상했다. 매섭게 튀기는 나무조각과 돌 파편이 여진족 병사들의 신체를 파고들었다. 몇 개의 천막이 무너졌고 몇 명의 병사들이 쓰러졌다.

“계속 방포해라!”

한명련의 일갈과 함께 포수들이 난사를 시작했다. 장전을 마치는 대로 곧장 불을 당겼다.

천지를 강타하는 폭음이 연쇄하는 동안 여진족의 주둔지가 실시간으로 무너져나갔다.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날선 일갈과 호통이 방황하는 군마와 병사들 사이로 교차했다.

소홍이포의 화력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무식한 쇳덩이일 뿐이다. 적중한다면 필살이나 대포의 개수도, 방포하는 속도도 한정되어 있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대응하지 못할 공격은 아니다.

그러나, 한명련의 추측이 옳았다.

저들은 그저 금金의 군기만 들었을 뿐 명을 위협한다는 후금군의 악명에 걸맞지 않았다.

거듭 소홍이포에 얻어맞은 후금군 언저리들은 내부 통제에 끝내 실패했는지 패잔병이 되어 주둔지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말의 고삐를 붙잡아 무작정 내달리거나, 채 그러기도 전에 다른 패잔병에게 말을 빼앗겨 밀쳐지고는 또 다른 말을 빼앗으러 방황했다.

“한심한 모습이군.”

한명련은 실소를 머금고서 부령부사에게 물었다.

“화약은 얼마나 남아있나?”

부령부사도 알지는 못했는지, 잠시 수군대는 소리가 있고서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열 번 정도 더 방포할 수 있다고 하옵니다.”

“마저 쏘게. 방포를 멈추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예.”

난사를 명해두었으므로, 따로 전달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화약을 마저 다 사용한 뒤 포성이 가라앉았을 즈음 온성을 위협하던 여진족들은 파괴된 주둔지와 다수의 부상자들을 내버려둔 채 모조리 혼비배산한 뒤였다.

그리고 그제야 온성에서 환호가 울려퍼졌다.

한명련의 북병영 병사들은 구원군이자 개선군이 되어 온성에 입성했다.

온성의 백성들은 병사들에게 기꺼이 식사와 방을 내어주었고, 병사들은 어깨와 코를 잔뜩 높이고서 배를 불린 채 침소에 들었다. 격전은 없었으나 대치만으로도 진이 빠지기엔 충분했다. 지친 백성과 병사들은 찾아온 밤하늘 아래 잠들었다.

소란이 재개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 * *

야심한 시각.

“적이다!”

고함과 함께 북소리가 적막했던 온성을 때렸다.

놀란 병사와 백성들이 모조리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즉각 기상한 한윤은 동헌의 마당을 돌아보다가, 부친이 머무는 객사를 쳐들어가듯 방문했다.

“아버지!”

그곳에서 한명련은 굳은 얼굴로 갑주의 끈을 고정하고 있었다.

꼴깍, 침을 삼킨 한윤은 더 호들갑을 떨지 않고 부친에게 나아가 갑옷의 고정을 도왔다. 손이 벌벌 떨려서 쉽지 않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너는 나가서 부사와 무관들을 집결시키고, 병사와 백성들의 동요를 진정시켜라.”

“아, 알겠사옵니다.”

한윤이 손끝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기습적인 적의 등장에도 놀라워하지 않고 침착한 부친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받겠다는 듯, 한윤은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서 진정을 되찾았다.

“물러가겠습니다.”

“한결 보기 좋구나. 나는 성벽 누각에 올라가 있겠다.”

“서둘러 찾아가겠습니다.”

한윤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먼저 객사를 빠져나갔다.

한명련은 마저 갑주를 고정한 뒤 투구를 눌러썼다. 그라고 적의 등장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한명련은 적의 기습보다도 주간에 화약을 모두 사용했다는 게 걸렸다. 싸움이야, 임진년 때부터 질리도록 해왔으므로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었으나 불리한 싸움을 강제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무장을 마친 한명련이 객사를 나서자 부령부사와 온성부사가 질색한 얼굴로 마당에 나와 있었다.

각기 무장이 되어있지 않고, 자다깬 그대로 나와 있었는데 한명련은 일순 꼴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유시라도 날아와 처박힌다면 어찌 되려고 이런다는 말인가?

“적이 어느 방향에서 등장했나?”

“저, 저쪽입니다.”

온성부사가 어둠 속 어딘가를 향해 손끝을 가리켰다.

“두 사람 모두 무장하고서 찾아오게.”

한명련은 무심하게 일렀다. 실망스러운 모습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뺨을 갈겨버려 정신을 일깨우는 충격요법도 생각해보았지만, 다들 정신이 굳건하지는 못했으므로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게 휘하 장수들의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질책은 상황이 끝난 다음 해도 무방한 것이다.

“나는 먼저 가 보지.”

“아, 예……. 예에.”

한명련은 허억,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두 부사를 뒤로하고서 온성부가 가리킨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바깥을 보니 두만강이 있는 자리에 무수한 횃불이 모래알처럼 퍼져 있었다.

“부, 북병사 영감…….”

함께 누각에 선 병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렀다. 의지할 구석이 절실하게 필요한 기색이었다.

“적이 야습하지 않고 접근을 부러 드러냈으니 이는 저들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냥 두려워 말라!”

한명련의 말에 병사는 그나마 지푸라기라도 쥐었다는 듯, 창대를 움켜쥔 채로 숨을 토해냈다. 그 호흡마저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전보다는 덜했다.

그러나 한명련의 긴장은 속에서부터 더해갔다.

주간에 후금군이 무기력하게 패퇴한 건 소홍이포 덕분이었다. 그러나 화약은 그때 모두 써버렸고, 몇 번의 공성전을 치렀던 온성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저들이 소홍이포를 겁내 허장성세를 펼치고 있지만, 만약 그 대포가 쇳덩이에 불과한 현 온성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곧바로 달려들지 않겠는가?

‘……난처하구나.’

한명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여러 발소리가 다가와, 한명련이 이미 목도한 광경을 마주하고서 숨을 삼키자 한명련은 말단 병졸들은 모두 물리고서 아들을 마주했다.

“아직 적이 성을 포위하지 않았으니 소식을 바깥에 전할 수 있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라에서 녹을 받은 적이 없으니,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병사에게 적의 재침을 알려라.”

“아, 아버지…….”

엉성하게 갑주를 갖춰 입은 온성부사와 부령부사의 안색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러나, 당상의 위계를 앞둔 종삼품 도호부사가 되어 구차하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한명련이 한윤에게 ‘너는 녹을 받은 적이 없으니’ 하고 일렀으므로 두 부사가 구차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성을 탈출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저 오늘이 제삿날임을 직감할 뿐.

그러나 두 부사와는 대조적으로 한윤은 성을 나서기 싫어 비통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시옵소서. 나라에 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찌 소자뿐이겠습니까?”

“너는 나를 오랫동안 보필하여서 일대 외관들이 병마평사兵馬評事와 진배없이 여기니 전언을 신뢰받을 수 있다. ……아니면, 이 아비가 너의 억지를 들어서 자식이 함께 죽는 것을 감내하기를 바라느냐?”

한명련이 답지 않게 아들을 살려 보내고픈 마음을 고백하니, 한윤도 차마 억지를 더 부릴 수가 없었다.

“가라. 내 비록 목숨은 걸어야겠으나 질 생각을 하고서 싸움에 임하지는 않는다.”

운이 좋다면 살아서 재회하리라.

한윤은 그런 부친의 뜻에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두 부사와 제장 모두의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한윤이 떠나고도 주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이에 한명련이 말했다.

“그대들은 나의 각오를 듣지 못하였는가? 나는 분명 질 생각으로는 싸움에 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응당 모두와 마찬가지로 싸움에서 이겨 당당하게 생환하기를 소망하고, 또 그러할 각오이니 그대들 역시 마땅히 그리하라.”

“……예.”

성문이 잠깐 열리고 닫혔다.

그동안 무수한 횃불은 읍성의 지척에 이르렀다. 뒤이어 동편에서 박명이 밝아오므로, 횃불의 불빛도 별 의미가 없어지고 번져오는 서광이 일대를 까마득하게 채운 후금군의 대오를 드러냈다.

군세의 과반은 여전히 남루한 모습을 한 여진 부족민의 모습이었으나, 그들 후방의 삼분지 일 즈음은 규율을 갖춘 채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로 한명련이 오전에 의식했던 은빛 수은갑이 무기와 함께 볕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곳곳에서 펄럭이는 군기에는 황색 바탕에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한때 누르하치가 직접 이끌었던 두 팔기 중 하나, 정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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