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49화
홍태주가 버릴 수 있는 패는 서방에서 데려온 대초원의 몽골인 전사들이나 극동의 배척받는 야인여진 족속들만이 아니었다.
본디 그를 따르지 않았던 팔기군들 역시, 역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약화할 필요가 있었다.
정황기는 누르하치가 양황기와 함께 직접 지휘한 팔기였다.
또한 정황기의 기주는 누르하치가 어려서부터 직접 거두어 자신의 친병으로 길러냈고, 후금의 개국공신이기도 한 호이한扈爾漢이 맡고 있었다.
홍태주는 찬탈과 함께 호이한 역시 베어버렸으나 정황기에는 여전히 누르하치의 영향이 깊게 배어 있었다.
역반란을 우려하던 홍태주에게 정황기가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지 않은 정황기의 병사들은 분명 홍태주의 우려대로 옛 한에게 깊은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대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잘게 쪼개져 이합집산과 반목만을 거듭했던 만주의 부족들을 일통해 하나의 국가로 엮어낸 영웅이기도 했다.
더욱이 최근의 원정을 통해 여전한 실력과 모든 기마민족의 우상과도 같았던 대원제국의 옥새까지 물려받은 참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즉위식만을 앞둔 상황에서 후계자로 유망하던 자식에게 배신당해 극적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여전한 존재감을 가졌으며 치세가 그리 오래지도 않은 누르하치에게 대단한 향수를 느끼는 건 꼭 정황기만의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홍태주가 반란과 함께 각 팔기의 수뇌부를 신속하게 처단 및 숙청한 관계로, 정황기의 군사들은 일단 명령을 따라 함경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변경을 지키는 조선군에게, 팔기의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대한 조건을 내건 이유였다.
“항복하라!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는다면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은빛 금속 갑주를 걸친 정황기의 병사가 외쳤다.
조선의 최북단에 세워진 성은, 그간 적절한 개축을 받지 못했는지 무척 성벽이 낮고 조악했다.
미개한 야인여진 창궐하는 이곳 극동 변경에서는 이만한 성이라도 제 몫을 해냈겠지만, 요동을 정복한 후금군 앞에서는 그렇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조선군이 성이랍시고 의탁한 것은 실상 돌담에 불과하였으므로 항복의 권유는 이례적인 일이 맞았다. 홍태주가 찬탈을 일으켜 군중이 뒤숭숭해지기 이전 같았다면, 일언반구 없이 공격하여서 성 안팎의 모든 생명을 베어버렸을 테니까.
성문 위 누각에 자리한 조선군 장수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서 활과 화살을 빼들었다.
* * *
반 각 전.
“저놈들이 뭐라 지껄이는 건가?”
한명련이 눈살을 찌푸리고서 물었다.
양측이 대치한 가운데, 정황기로 보이는 후금군 기병 하나가 나서서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시끄럽게 짖어대었다.
한명련은 그 저의는 대강 짐작하였으나 불쾌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오랑캐들 아니랄까 봐, 이놈들은 기본이 안 되어있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눈치라도 발휘해서 대강 때려맞추라는 말인가?”
한명련의 빈정에 동행한 무관들이 피식피식 실소했다. 목숨이 경각에 이른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약간의 농담은 더욱 각별한 법이었다.
한명련은 주변의 반응이 만족스러워,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내가 때려맞출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한명련은 곧장 활과 화살을 빼 들었다.
왜란 시절, 무려 도원수에 달하는 권율이 직접 한명련의 전공을 왕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왜적이 크게 쳐들어왔을 때 별장 한명련이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쏴 죽인 왜구의 숫자가 거의 이백여 명에 달한다고.
천민이 신분제 사회에서 병마절도사에 오르는 방법은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일당백의 딱 두 배.
그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면, 미천한 신분일지라도 능히 재상에 준하는 관직을 꿰어찰 수 있다.
그러니 정황기 기병은 한명련이 활을 뽑아드는 모습에 놀라 서둘러 고삐를 돌린 건 별로 의미 없는 행위였다.
정황기 기병의 고개가 채 다 돌아가기도 전에 화살이 면상의 한중간에 틀어박혔다.
그는 당황한 얼굴을 한 그대로, 면상 한복판에는 대살을 처박아놓은 채 후금군의 대오를 돌아보았다.
그때 기병의 말이 죽은 주인이 당긴 고삐의 의미를 적당히 해석하고서 제 자리에서 돌았다.
그리 급한 회전이 아니었으나 시체는 원심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장에서 흘러내렸다.
툭!
선두에 선 후금군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땅바닥에 처박히는 기병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놀란 얼굴이 되어 다시 누각을 올려다보았다.
한명련은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을 향해 말했다.
“또 죽고픈 놈이 있느냐? 나오라.”
정황기의 대오 가운데서 고함이 터졌다.
그 일갈과 함께, 충격에서 헤어나온 야인여진인들이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명련은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기꺼이 화살을 한 발씩 날려주었다. 일발필중에 모조리 즉사였다. 기교를 과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음데도 그러했다.
하지만 달려드는 적이 너무 많았던지라, 성첩의 병사들이 한명련을 도와 화살을 날려대어도 적들은 순식간에 성벽에 달라붙었다.
“이건 너무 열성적인데! 이것들이 다 뒈지고 싶어 몸이 많이 달아올랐던 모양이구나!”
한명련은 긴장한 무장들 사이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태평한 오만에, 격돌을 앞둔 무관들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곧장 환도를 빼들었다.
* * *
“정황기가 강을 넘었습니다.”
친병의 보고에 홍태주가 어좌에서 일어났다.
숙청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신하들은 새로운 한의 거동에 몸을 떨었다.
불순분자를 섞어내는 과정은 공개적이었다. 간밤에 호출을 받아 주인이 달라진 어좌 양편에 시립한 신하들 사이로, 지목된 자들이 끌려 나와 모두의 앞에서 목이 베어졌다.
그 처형식에 천성 사나운 여진인들조차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마룻바닥에는 채 닦아지지 않은 핏자국이 흥건했다.
신하들은 그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의 전교를 각오할 따름이었다.
홍태주가 일렀다.
“군사들을 준비해라. 친정하겠다.”
* * *
함경도에서의 싸움은 조선이나 후금에도 전초전에 속했다.
사정은 후금이 더 좋았다. 비록 이목을 끌기 위해 내던진 패라고 한들, 일만을 상회하는 야인여진인 전사와 더불어 정황기가 함께했다.
정황기는 오래도록 군림했던 지휘부가 교체되어 조직적인 면에서는 이전과 비하지 못하였으나, 개개의 무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야인여진인들과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성을 오르는 정황기 병사들은 언제나 요주의 대상이었다.
“물러서라!”
한명련은 주저하는 병사를 밀쳐내고 막 성첩에 올라던 정황기 병사에게 향했다.
적 역시, 한명련의 존재를 뇌리에 각인한 참이었으므로 곧바로 상대를 알아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챙!
두 자루 칼이 맞부딪쳤다. 이가 깨지며 불똥이 튀었다.
힘싸움 끝에 정황기 병사가 곡도를 빼내며 물러났다. 환도가 곡도를 쫓아오며 카르륵 칼날을 긁어왔다.
딱!
일순 둔탁한 소리가 나며 곡도가 반 토막 났다. 정황기 병사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서둘러 토막난 곡도를 치켜 들며, 반대편 손으로 허리춤을 짚었다. 예비용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스칵!
한명련이 빨랐다. 환도의 끝이 정황기 병사의 목을 그었다. 무수한 전장을 전전하며 검게 그을린 피부에 혈선이 새겨졌다.
“컥!”
정황기 병사는 치명상에 질려 재차 날아오는 환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칼끝이 목을 쑤욱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갔다.
정황기 병사가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그를 뒤로하고, 한명련은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아갔다.
혈전은 반 시진가량 이어졌다.
그리고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조선군은, 미처 물러나지 못하고 성벽에 버려진 후금군 부상자들을 찾아 죽여나갔다.
그래도 성벽 밖의 후금군은 여전히 위협적인 규모였다.
“북병사 영감…….”
부령부사가 피칠갑을 한 채로 한명련을 찾았다. 급하게 닦아낸 흔적인지, 얼굴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말씀하시오.”
“화살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적에게서 회수한 화살도 많지 않습니다.”
부령부사의 화살집에는 이질적인 양식의 화살이 몇 개 꽂혀 있었다.
정황기와 야인여진족이 지녔던 화살이다.
성첩에서 육박전을 벌인 끝에 전사한 자들에게서 회수한 만큼, 화살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화살깃이 정련되지 않은 건 오히려 보통이었고 피가 튀겨 무게중심이 어긋난 화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재고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런 화살이라도 날릴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수량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온성부사는 보이지 않는군.”
“……음.”
한명련과 두 부사는 각기 다른 방향의 성문을 맡았다.
소강상태가 되었음에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한명련이나 부령부사는 각자의 짐작을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다.
총체적으로 가혹한 상황이었다.
비장의 무기인 소홍이포는 고철에 불과했고 화살은 적에게서 노획한 상태 안 좋은 것이 몇 움큼이다.
적을 차단할 수단은 제한적인데 육박전을 벌일 병사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부상은 육박전에서 큰 장애가 된다.
‘원군은…….’
한명련은 가능성 낮은 기적을 떠올렸다.
본디 북병사영이 위치한 경성만 해도, 육진과는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다.
남병영을 포함해 여타 지방관이 군사를 모아 원군을 보내려면 하루 이틀로는 불가하다.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부령부사.”
“예.”
한명련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후금군이 입성하면 백성들은 살아남기 힘들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비록 싸움은 열세였으나 분명 조선군은 분전했다. 많은 출혈과 인명을 강요했으므로, 후금군은 여전히 우위에 놓이고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승리를 거두는 대로 반드시 보복을 시도하리라. 원래 그러기로 악명 높은 족속이다.
“포위를 뚫으면 백성들을 탈출시킬 수 있겠나?”
부령부사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포위를 뚫는다는 것도 불확실한 가정이었으나, 설령 그리되더라도 피신은 어려운 일이었다.
후금군은 무수한 기마를 대동했다.
잠시 포위망이 파훼될 수는 있을지언정, 날랜 기병들이 백성들이 줄지어 도망치는 광경을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어쩌면 부사 본인의 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터였다. 부사의 지위로 필마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테니 퇴로가 열리는 대로 무작정 내달리면 그만이다.
“……어렵습니다.”
부사는 이실직고했다.
“적들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적의 기병이 너무 많지요.”
“역시 그런가.”
한명련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부령부사는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포위망을 뚫은 자신은 있으셨습니까?”
“그건 일도 아니지.”
부령부사는 실소로 답했다. 북병사의 활 실력이 비상하긴 했지만, 활을 잘 쏜다고 포위망을 파훼할 수는 없었다.
들떴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전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백성들을 살려보내기 위해 죽음을 감수하고 싶어도, 의미가 없었다. 사소한 변수라도 발생하지 않는 한 타개책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변수가 발생했다.
“영감!”
대로를 타고 기병이 달려왔다.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한명련은 허리를 낮추고서 급히 말을 세우는 기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원군입니다!”
“원군?”
“예!”
한명련은 곧장 누각에서 내려와, 기병의 말을 타고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우군? 남병사일까? 가능성은 있다. 한윤을 내보낸지는 오래지 않았으나 적침은 그보다 일찍 알려졌다. 남병사가 진즉 원군을 파견했다면 모를 일이었다.
갖은 상념과 함께 내달리며 도착한 읍성 반대편에서.
“……하, 하하!”
한명련은 원군의 실체를 마주했다.
다 합쳐서 오십은 될까?
조선 군복을 걸친 기병들이 멀리 동떨어진 언덕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관보다는, 한 줌의 병력으로는 감히 개입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하하하…….”
남병사의 원군은 당연히 아니었다. 함경도 관찰사의 군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대 육진에서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기병 무리겠지.
우군인 한명련이 보아도 지극히 하찮은 원군이었다. 성 주변을 포위한 후금군은 더욱 그렇게 느끼리라. 경각심 따위는 조금도 없는 잡담과 비웃음이 읍성 주변에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수백의 기병이 서둘러 고삐를 돌리는 조선군을 쫓아 내달렸다.
한명련은 깨달았다.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