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0화
후금군의 관심사가 모두 하찮기 그지없는 조선의 원군으로 향했다. 전운의 긴장도 경각도 모조리 흐려졌다.
방심이다.
불시의 기습을 가하기엔 최고의 상황.
기마로 구성된 한 줌 우군은 그들이 첨병에 해당하며, 멀지 않은 곳에 더 많은 원군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이라면 피난하는 백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질서를 잃은 채 중구난방으로 추격하는 것은 무기력한 피난민들에게는 치명적일지 몰라도, 대오를 갖춘 병사들이라면 다를 테니까.
한명련은 호출했다.
“부사!”
……잠시 후.
바깥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한명련은 그나마 체력을 보전한 무관과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출성에 참여할 상태가 아닌 자들은 성곽으로 올려보냈다. 여전히 방어에 집중하는 모습을 가장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목숨을 걸어야 하긴 마찬가지다.
기껏 돌파구를 열어도, 출성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성치 않은 이들이 제때 탈출하기는 힘들 테니까.
한명련은 긴장과 두려움에 젖은 무수한 눈동자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알고 있느냐, 내가 왜란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미천한 신분에 지나지 않았음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분이야 어떻건 몸에 칼이 들어오면 죽기는 매한가지다. 그것을 모두가 절실하게 체감한 마당이다. 북병사의 한때 신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명련이 말했다.
“어쩌면, 너희 중 누군가는 스무 해 뒤에 나와 같은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믿기 어려울 테지. 하지만 나 역시 무수히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왔다.”
왜란 시절에는, 생존보다는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훨씬 쉬웠으니까.
분명 무수한 장정이 고혼으로 전락했으나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한명련은 본인이 증거였다. 이번 전투라도 다를 건 없다.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마!”
한명련은 편곤을 치켜들고서, 성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삐걱대는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성문이 개방됐다.
한명련은 곧바로 박차를 가했다. 병마절도사라는 위치가 일반적으로 돌진의 최선두에 설 자리는 아니나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선두로 달려나간 한명련은, 이편이 자신에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충신처럼 대군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건 처음부터 과욕이었다. 사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경악한 여진족의 면상이 편곤을 맞고 찌그러졌다.
휘두르고, 찌르고, 후려쳤다. 편곤은 한명련에게도 익숙한 무기였다. 그는 도리깨가 낱알을 수확하듯 후금군의 생명을 편곤으로 수확했다.
후금군은 저마다의 무구로 날아드는 편곤을 막으려 들었으나, 그럴 때마다 편곤 끄트머리에 걸린 자편子鞭이 원심력을 받아 고리를 타고 옆머리를 후려쳤다.
그렇게 한 대 얻어맞고서 일순 황망해지는 사이 목숨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한명련은 전투에 심취했다. 사방이 적이었으므로 쉬운 일이었다.
함께 내달린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변이 여전히 시끄러운 걸 보니 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순 시야에서 스쳐 지나자간 온성 읍성이 꽤 멀었다. 한명련은 자신이 그새 후금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렸음은 물론, 나아가 마저 적진을 잠식해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이미 내던진 목숨이었다. 따지자면 지금 난동을 부리는 자신의 여명은 덤인 셈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한명련은 이 모든 것이 재미있어졌다.
이성이 깜빡거리는 와중에 한명련은 어느샌가 자신이 안개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해가 중천이었거늘 이렇게 짙은 안개가 끼다니 이변이었다.
시야에서 안개에 가려진 회색 인영들이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어지러이 뒤엉켰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명회는 불쑥불쑥 달려드는 후금군의 골통을 모조리 깨버렸다.
어느샌가 자편이 고리에서 달아나버린 참이었으므로 한명련은 편곤을 철봉처럼 휘둘렀다. 그래도 살상에는 문제가 없었다. 정수리에 쇠를 두른 몽둥이를 맞고도 살아남는 오랑캐는 없었다.
다만 무수한 인영이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안개 속에서 한명련은 잠시 의심했다. 과연 자신은 여전히 지상에서 후금군과 싸우는 중인가, 혹은 저도 모르게 죽어 수라도에 떨어지고도 분간하지 못한 채 살육을 이어나가는 중인가?
그러나 한명련은 금세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오랑캐들을 때려잡는 것에 집중했다.
* * *
기이한 일이었다.
한명련이 결사대를 이끌고 출성한 직후 동편에서 짙은 안개가 날아들었다.
안개가 순식간에 전장을 뒤덮었으므로, 온성부의 백성들은 기상이변에 압도되면서도 이 기적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결사대는 놀라운 기세로 포위망을 뚫어버렸고 단절된 적의 양편을 화마처럼 잠식해가는 중이었다. 그 사이는 전장과는 외딴 구석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언젠가 합을 맞추기로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서 안개를 헤쳐나갔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건 쉬웠다. 양편에서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으므로, 그것을 피해가는 것이 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성의 백성들이 안개를 헤치고 나왔을 때, 그들은 조선군을 마주했다.
그때 여타 육진에서 차출되어 만들어진 원군은, 느닷없이 발생한 기상이변에 온성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는 앞서 온성을 다녀온 첨병들의 보고였다.
적의 숫자가 근 2만에 달하므로, 저마다의 변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여타 육진에서 한 줌씩 내어 만든 원군으로는 구원을 기약할 수 없던 참이었다.
이에 지휘관들은 기상이변으로 전장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고 병사들의 사기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일단 진군을 멈춰세운 뒤, 퇴각의 여부를 논의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온성의 피난민들이 온성과는 제법 떨어진 원군의 주둔지에 등장했으므로 모두가 깜짝 놀랐다.
금세 사정을 전해듣게 된 원군의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리고서 물러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싸움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과반의 피난민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대적과 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군중들 사이에서 한명련이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도술을 펼쳤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수만의 후금군이 운집했다는 온성부는, 빠르게 퍼져나간 증언과 소문을 타고 금지禁地의 낙인이 찍혔다. 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리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금군이 뭘 하고 있는 거지?’
피난민들의 존재로 인해 온성부의 함락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두만강을 넘어온 후금군의 최종 전략적 달성 목표가 고작 온성부의 점령은 아닐 것이므로, 응당 적들의 진격이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부령부에서 부사가 고을의 모든 장정과 여진족 유민을 일시에 징집하여 경계와 방비를 강화하고 여타 육진의 수령들 역시 군사를 집중시키고서 일대의 정찰을 확대했음에도 후금군의 동향은 드러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불안해할 즈음.
부령부에 남병사南兵使와 관찰사의 군대가 당도했다. 적의 수효가 매우 많았으므로 시일이 다소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상당한 수의 우군이 확보되자 부령부사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두 상관을 마주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병마절도사 영감. 관찰사 영감!”
이에 남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사께서는 온성에서의 전투에 참여했다고 들었소만?”
“예, 비록 북병사의 결사대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백성들을 피신시킬 때까지는 온성을 지켰습니다.”
“……흐음.”
남병사가 다소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부령부사가 제 발을 저리듯이 덧붙였다.
“아, 소관이 결사대에 참여하지 못한 건 출성 이후 결과에 따라서 최후까지 저항하거나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때 지휘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저라고 염치가 없었겠습니까…….”
“되었소, 그보다 중요한 건 후금군의 동향이요. 놈들의 소재는 파악하셨소?”
“……아뢰기 송구하오나 성의 수비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여 적의 소재는 파악해두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수비를 강화했다는 말이외까?”
부령부사는 유구무언이 되었으나, 입을 열자면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부령부는 온성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고을이다. 응당 후금군이 온성 다음으로 노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후금군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부령부사 역시 의아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군으로 온 두 상관에게 거창한 반박 따위를 할 수는 없는지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다급하게 나선 건 남병사와 동행한 한윤이였다.
“출성의 결과를 지켜보셨다면, 아버지께서 어떻게 되셨는지 알고는 계시겠지요?!”
거의 추궁에 가까운 투였으나 사정을 아는 부령부사는 그저 곧이곧대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북병사께서 출성한 직후 안개가 자욱하게 몰려왔다네. 백성들을 데리고 피신할 때까지도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부령부사는 차마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에 남병사는 잇소리를 내고서 일렀다.
“어쩌면 북병사께서 후금군을 쫓아내셨을 수도 있겠구려.”
“……예에, 어쩌면.”
부령부사는 그다지 자신은 없다는 듯 답했다. 분명 북병사의 무위와 용맹은 뛰어났으나, 천하장사라 하들 한 손으로 천 개의 손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후금군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개중에는 한이 직접 이끈다는 정람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홍태주가 일으킨 내홍의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팔기의 정예함과 악명을 귀뿐만 아니라 두 눈으로도 목도한 부령부사다. 만에 하나를 가정하더라도 승산을 가정하기 힘들었다.
그런 반응에 달아오른 건 한윤이었다.
“어쩌면 북병사께서 진정으로 후금군을 쫓아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군사를 거두어서 다시 읍성으로 귀환하여 아직도 공방이 오가는 중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한윤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남병사와 관찰사를 돌아보았다.
“북병사 영감께서 어떤 상황에 처하셨을지 모르는데 그저 넋 놓고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정찰을 보내셔야 합니다!”
이에 남병사가 답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네.”
“하, 하지만……!”
“이건 전쟁이야. 섣부른 선택이 무수한 인명을 낭비할 수 있네. 북병사 영감께서는 무고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결사를 각오하셨는데, 그대는 계속 호들갑만 떨 것인가?”
한윤은 눈이 벌게져서 입술을 씹었다.
“그래도 정찰이 필요한 상황인 건 맞네. 부령부사의 판단도 무조건 그릇됐다고는 할 수 없지.”
십중팔구는 후금군이 곧장 부령부로 몰아칠 게 분명했으므로, 수비에 집중한 것이 하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부끄럽습니다.”
부령부사의 민망해하는 대답을 뒤로하고, 남병사는 관찰사를 돌아보았다.
적의 대군을 맞아 군사를 합쳤으나 병마절도사와 관찰사의 품계는 상하의 분별 없이 동일했다. 각자의 영역을 분명하게 갈라 전권을 따로 행사하는 게 아니라면, 결정에는 합의가 필요했다.
합의 없이 지시를 남용한다면 반드시 분란의 소지가 될 것이므로.
관찰사는 고개를 끄덕여 응했다.
“날랜 기병들을 선발해서 온성부의 상황을 돌아보게 하지.”
“저도 끼워주십시오.”
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전 같은 흥분은 보이지 않았으나, 남병사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고 끝에 답했다.
“대신 경거망동하지 말게.”
“예.”
부친이 진솔한 감정까지 내비쳐가며 살려놓은 목숨이다. 그렇다고 어떠한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한윤은 가벼이 죽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속으로 결의할 따름이었다.
만약 오랑캐들이 부친에게 일말의 해라도 끼쳤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그들 족속에게 최대한의 복수를 안겨주겠다고.
그래서라도 쉬이 죽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