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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51화 (151/380)

인조, 명군이 되다 151화

적막했던 산골짜기 오솔길을 내달리는 기수들이 있었다.

선두는 한윤이였다. 순변사였던 부친을 쫓아 육진 일대를 전전해온 그다. 주변 지리라면 떠돌이 보부상들보다 더 익숙했다.

푸르르릉!

한윤의 말이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위태로운 오솔길을 내달리는 동안 말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졌고 호흡은 가팔라졌다. 흐르고 식기를 반복한 땀 자국이 피부 위에서 허옇게 번들거렸다.

한윤은 입술을 말았다.

박차를 멈추지는 않았다.

부친의 안위를 생각하면 말을 걱정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아버지……!’

한명련은 세상에 존재하는 아버지들보다 조금 더, 자식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아들이라면 누구나 제 부친을 우상처럼 여긴 때가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존재다. 만능이고 무적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아들의 환상은 조금씩 흐려져간다. 부친도 평범한 한 사내에 지나지 않음을 체감하면서다. 자신 역시 아버지가 되면 부친을 향한 존경심이 생겨나지만, 이는 어렸을 적의 환상과는 크게 다르다.

평범한 한 사내가 자신을 위하여 이룩하고 헌신해온 모든 것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초인을 향한 동경은 당연히 궤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윤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부친은 한없이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났다.

신분의 제약은 벗어날 수 없는 제약보다는 그저 자신의 삶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천민이 평민에게 무시당하고 양반을 선망하는 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었다.

한명련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간에서 한명련은 거의 밥을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숨을 쉬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실재하는 초인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들이 살아가면서 부친을 향한 막연한 환상은 떨쳐가는 것과 다르게, 한윤은 성숙해갈수록 아버지를 더욱 동경하게 됐다.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천재를 선망하고 영웅을 동경한다.

한윤에게는 그 천재와 영웅이 모두 아버지일 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아버지가 곧 온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봐!”

일갈과 함께 한윤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

“정신차려라!”

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가 내달리던 골짜기의 좁은 오솔길은 어느새 넓어져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환했다.

평상시라면 맞은편에서 백성이나 보부상 따위를 마주했겠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한윤과 첨병들이 향하는 온성은 후금군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였다.

계속 흙바닥을 두들기며 질주했다간 백성이나 보수상이 아니라 청군을 마주할 수 있다.

“……죄, 죄송합니다.”

이미 박차를 그쳤던 한윤은 고삐를 살살 잡아당겨 말을 느리게 했다.

안장 위의 주인이 상념에 빠진 동안 정신없이 질주한 말은, 이제 투레질할 기력도 없다는 듯 눈이 충혈된 채로 입에서 거품만 뚝뚝 흘러내렸다.

잘 훈련된 군마가 아니었다면 진즉 주인을 내동댕이치고 도망쳤으리라.

“……미안하다.”

한윤이 사과와 함께 말의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혹사당한 군마는 건들지 말라는 듯 거칠게 투레질했다.

푸르릉!

그래도 이 정도면 온순한 반응이었다.

다른 기수들도 앞장서서 내달리는 한윤을 뒤쫓느라 말을 많이 고생시킨 상태였다. 무리는 곧 사람이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나아갔다.

“……조용하군.”

기수 중 한 사람이 중얼대자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괜히 적을 불러들일 수 있는 주문은 자제하는 게 좋았다. 일행은 곧 침묵한 채로 나아갔다.

그래도 너무 조용하긴 했다.

의도적인 적막일까, 혹은 정말로 아무도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일까.

한윤과 첨병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나아가다, 빈 마을이 나타나자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동리 외곽에 말과 몸을 숨기고서 인원을 차출해 빈 마을을 수색했다. 잠시 뒤 마을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보고했다.

“식량과 일부 가재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그대로더군.”

“뒤진 흔적은 없던가?”

“몇몇 집이 지저분하긴 했지만, 피난하던 중에 뭘 챙긴다고 어지럽힌 거겠지. 오랑캐라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니까.”

악명 높은 오랑캐라면 멀쩡한 가구도 박살내고, 애꿎은 장독은 깨뜨리며, 화룡정점으로 마을에 불까지 질렀으리라.

“너무 이상한데. 오랑캐들이 전부 하늘로 솟았나, 아니면 땅으로 꺼졌나?”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속도를 좀 올려서 온성까지 달려보자고.”

“그럴까.”

말들도 충분히 쉬었겠다, 한윤과 첨병들은 몇 개의 빈 마을을 지나쳤다.

그리고 읍성에 거의 다다라서 일행은 다시 속도를 낮췄다.

비릿한 냄새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살갗마다 닭살이 오르고, 기수들은 저마다 동개를 매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누군가는 미리 활을 빼 들었다.

그리고 읍성에 도착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장은 마치 싸움이 끝난 시각에 그대로 박제되어버린 듯했다.

우려했던 후금군의 기습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후금군은 모두 파편이 되었거나, 전장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첨병들이 쉬이 다가가지 못하자 한윤이 먼저 박차를 가했다.

즐비한 후금군 시신으로 인해 몇 없는 조선군의 것이 더욱 눈에 띄었고, 장수의 갑주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전장에 이르러 한윤은 안장에서 뛰어내린 다음 죽은 조선군 장수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펴나갔다.

대개는 면식이나마 있는 사람이었다. 순변사인 부친을 쫓아 육진 일대를 횡행하다가, 부친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후에는 북병영의 무관들과도 면식을 새길 일이 있었던 덕이었다.

그들 모두와 친하지는 않았으나 생기 가득한 얼굴로 잡답이나마 나누던 이들이 새파랗게 변한 채 굳어있는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한윤은 무관들의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어지러이 일었다.

상실감…….

그리고 안도.

한윤은 죽은 무관의 얼굴을 살피고, 엎어진 시신을 뒤집을 때마다 숨을 삼켜야 했다.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해도 문제였으나, 발견해도 문제였다.

어느샌가 그러한 감정에 압도된 한윤은, 더는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졌다.

누구나 일생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끝에 다다라서는 쉽사리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듯이…….

한윤은 내심 짐작한 결과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한윤이 깔고 앉은 전장보다도 냉혹했다.

한윤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흠칫 떨었다. 그 정체도, 의도도 확인되지 않았으나 한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무한히 절망했다. 그래서 어깨에 손이 얹어졌을 때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어깨에 얹힌 손의 주인이 말했다.

“찾았네.”

* * *

수복된 온성에서.

“지금 놓인 상황만 보면 다른 결론은 내리기 어렵군.”

남병사의 발언에, 그와 동행한 함경도 관찰사와 부평부사, 그리고 다른 육진의 수령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병사의 결사대가 후금군을 패퇴시켰네.”

비현실적인 성과다.

북병영은 육진을 포함해 두만강과 인접한 열 개의 읍에서 수령과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가졌다.

작다고는 하지 못할 권한.

그러나 육진은 군사적인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된 고을일 뿐, 실질적인 인구는 적은 편이며 그만큼 동원 가능한 병력의 숫자도 작다. 육진에 비하면 존재감조차 없는 군소 고을들의 사정은 더욱 심하다.

북병영의 실체가 이러했으므로 그간 조선 조정에서는 양계갑사兩界甲士를 선발하여 국경지대의 부족한 물리력을 충당하였으나, 임란 후 갑사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사정이니, 북병영이 지닌 군사적 중요성이나 권한의 범주야 어떻건 실제 보유한 무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온성에서 후금군과 맞닥뜨렸던 북병사의 군대는 경성부와 부령부 그리고 온성부에서 이미 공방으로 지친 병력이 전부였다.

“북병사께서는 범인凡人으로서는 해내지 못할 위업을 세우셨네. 그건 내가 장담하지.”

남병사가 한윤에게 말했다. 한윤에게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 그는 부름을 받아 다른 수령들과 함께 배석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호출.

남병사가 건넨 위안에 한윤은 입술을 씹으며 감정적인 동요를 드러냈으나, 곧 침을 삼키고는 담담하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북병사의 전공은 내 반드시 소상히 작성하여 전하께 상주드릴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

“예.”

남병사는 막 부령부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라진 한윤의 기색에 부담감을 느끼고는, 육진의 부사들에게 일렀다.

“적들이 비록 패퇴했다고는 하나 아직 많은 수가 살아 있을 테니, 언제 병력을 규합하여 다시 변경을 노릴지 모르네. 다들 원래의 임지로 돌아가 방비와 강변의 순찰을 강화하고, 적이 나타났을 때 즉각 알려서 곧바로 힘을 합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시게.”

“명심하겠습니다.”

부사들이 일제히 허리 숙였다.

“온성부사는 전사했으니, 이곳은 내가 임시로 맡아 지키도록 하지. 다들 해산하시게.”

그렇게 수령과 무관들은 예를 올리고서 물러났으며, 동등한 품계로 군령권을 지닌 함경도 관찰사는 자리에 남아 남병사와 논의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때 먼저 한윤이 남병사에게 나아갔다.

“영감.”

“말씀하시게.”

“입대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오장伍長이라도 성심을 다해 맡겠습니다.”

오장은 말단 병졸 다섯을 이끄는 최하급 분대장이다.

“……북병사를 보필한 자네에게 고작 오장을 맡길 수는 없지. 듣기론 이런저런 재주를 익혔다던데.”

한윤이 부친의 직무를 거두고자 유용한 잡기를 익혔다는 건 남병사도 알고 있었다.

“내가 적당한 자리를 생각해볼 터이니 물러나 있게.”

“예. ……원수들을 베어버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자리라도 좋습니다.”

한윤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가 사라진 곳을 향해 남병사가 짧게 침음했다.

“음.”

* * *

함경도에서 후금군의 침공이 수습되는 동안.

새로운 싸움이 압록강에서 시작했다.

친정親征을 천명한 홍태주는 친병으로 팔기의 절반을 이끌고 직접 국경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했다.

화포를 얹은 조잡한 함선들이 조선군이 점유한 섬으로 몰려들었고, 조선군은 성곽과 돈대에 의지해 후금군과 싸웠다.

선봉은 가장 날카로워야 하지만, 이번 도하에서 후금의 정예인 팔기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뗏목에 포탄이 작렬하고 요란하게 파열음이 터지자, 강물에 휩쓸린 후금군이 만주어도 몽골어도 아닌 한어로 지껄여대며 떠내려갔다.

요동 점령지에서 강제 징발된 명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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