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3화
둥, 둥, 둥……!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북방군의 절반이 진군했다.
다가갈수록 거세지는 몽골군의 화살비가 살수들의 중갑을 두들겼다.
화살 대부분은 철편을 꿰뚫지 못하고 튕기거나 갑주의 천에 걸려 덜렁거렸다. 그러나 일부는 안면 등 취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윽.”
한 화살은 살수의 안구를 관통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단숨에 시신경 너머 뇌까지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즉사한 살수가 나아가던 그대로 고꾸라졌다.
전사자의 공백은 뒤따르던 후열의 살수가 곧바로 메웠다.
즉사를 면한 부상자들은 풀밭 위에 얼굴을 늘어뜨린 채, 멀어지는 전우들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곧 부상자들은 살수대를 뒤따르던 포수대에 의해 후방으로 구조됐다.
죽은 이들은 당장 거두어지지 못했다.
살수대가 나아가는 자리마다 붉고 푸른 갑주를 입은 시체들이 하나둘 흔적처럼 남았다.
진군과 함께 몽골군의 저항이 강해질수록 북방군의 화력도 강해졌다.
살수대가 나아가며 공간을 확보해 주는 만큼 포수대는 전진 윤방을 펼쳤다. 선두의 포수들이 살수대 사이로 총탄을 쏘아내면, 가장 뒤에 있던 포수가 그보다 앞으로 나와 새로이 총성을 터뜨렸다.
타다다당!
타다다당!
포수대는 무한히 총탄과 총염을 뿜어내며 전진했다. 매 차례 짙은 초연을 헤쳐나와 방아쇠를 당기는 포수들의 등장은 극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포수대 뒤에서 사수대가 시위를 놓으며 전진했다.
활의 장전은 조총의 장전보다 훨씬 단순했다. 사수들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움직인다는, 포수들에게는 사치스러운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지상에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초연 위로 철의 소나기가 쉴 틈 없이 날았다.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진군하는 삼수병三手兵의 기세는, 팔기군을 상대했던 차하르부의 몽골군에게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이따금 섬에서 날아와 작렬하는 포탄에도 북방군의 진군에 거침은 없었다.
살수대가 점차 도하지점으로 다가오며 철과 인의 장벽을 몰아붙이자 강물과 우군의 시체를 방패 삼아 버티던 몽골군도 저들의 최후가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러한 몽골군의 우려는 각자마다 불시에 실현됐다. 총탄이 몸에 박히고, 화살이 파고들었다.
몽골군에게 끔찍한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그들을 지켜주었던 압록강의 강물은 저승으로 인도해주는 사자가 되었다.
신체가 고통으로 마비되어 허물어질 때마다 강물은 비틀거리는 신체를 휘감아 그들이 생의 반대편에 도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몽골군이 앞다투어 죽은 채로, 산 채로 강물에 떠내려가자 남은 이들은 사격도 대응도 포기하고서 강물과 시체에 바짝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다가오는 후금군 선박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불운하거나, 담이 부족했던 몽골군은 산 채로, 죽은 채로 강물에 떠내려갔다.
점차 압록강이 깨끗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후금군 전선들이 귀환했을 때.
압록강의 몽골군은 저들이 당차게 뛰어내렸던 배에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절망을 알지 못하는 몽골군들은, 당장 배에 기어오르는 자들이 그러했듯 당차게 강으로 뛰어내렸다.
오르는 이와 내리는 이가 어지러이 뒤섞이고 부딪쳤다.
어떤 몽골군들은 부딪쳐 함께 추락한 후 다시 두 다리로 서지 못하고 강물에 휩쓸렸다. 배에서 뛰어내리던 몽골군 병사 몇몇은 솜씨 좋은 북방군 포수들에 의해 허공에서 총탄을 맞고 죽은 채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배에 기어 올라온 몽골군들은 독전하는 후금군에게 곧바로 베어졌다.
대혼란이었다.
몽골군을 토해낸 후금군 전선들은 강변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거듭 포격에 노출되어 내구성이 한계에 다다랐다.
때마침 조선군 대포수들도 이미 경험으로 교훈을 체득한 바.
적선을 큰 과녁으로만 여기고서 무작정 맞추는 대신 수면과 닿는 흘수선을 타격해 침수와 좌초를 유도했다.
그렇게 많은 후금군 전선이 강변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막 압록강으로 뛰어내린 병사들은 지원이 끊긴 채 고립되었다는 사실에 당혹했고, 가까스로 갑판에 올라 만주인 병사마저 베어버리며 탈출을 도모하던 이들은 절망했다.
그런 그들의 위로 불화살이 쏟아졌다.
* * *
강변에 좌초한 후금군 전선들이 땔감으로 변모하는 동안, 기세를 완전히 잡아버린 북방군은 잔존한 몽골군을 일방적으로 소탕해나갔다.
정충신은 몽골군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베풀었다.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그 와중이었다.
“부원수 영감…….”
중군中軍 김준룡이 긴장한 얼굴로 정충신을 불렀다.
“알고 있네.”
몽골군조차 데려오지 않은 말의 발굽 소리가 울려왔다.
‘팔기군. 관찰사가 얼마 버티지 못했구나.’
당연한 결과였다. 속오군의 실체는 그저 군적에 이름만 올라간 민병에 불과했다. 규율도 훈련도 부족한 이들이 전장에서 밥을 먹고 안장 위에서 잠을 자는 팔기군을 당해낼 리 없었다.
그 팔기군이 머지않아 후방에 등장하겠지.
“걱정말게. 우리 뒤는 도원수께서 지켜주고 계시니.”
북방군의 절반은 여전히 고지대를 점거한 채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다. 팔기가 아무리 정예하고 맹렬한들, 북방군은 그러한 팔기와 대적하기 위해 창설된 정예군이다.
‘……하지만, 2만이라고 했나.’
북방군의 정원에 맞먹는 숫자다. 도원수는 그 절반만을 이끌고 있으니,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끝내고 합류한다.”
* * *
‘2만이라고 했던가.’
김충선은 회고와 함께, 세월로 누렇게 변색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충선은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기패관에게 물었다.
“관찰사의 전령은 분명 팔기 2만이 강을 건넜다고 했지?”
“예.”
“나의 눈에는 저들이 2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자네 눈에는 어떠한가?”
“소관 눈에도 그렇습니다.”
몽골군과의 합동 공격을 위해서인지,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짓쳐드는 팔기의 규모는 전령의 증언과는 다르게 얼추 1만 정도로 보였다.
그것이 김충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관찰사나 전령이 당황해서 적의 규모를 오인했을까?”
김충선의 물음에, 기패관은 자신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으며 답했다.
“아닐 것입니다.”
강을 건너온 적의 규모가 2만이 맞았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1만의 팔기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군대의 분할.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나간 팔기의 절반이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만은 한양으로 갔구나.’
우려한 상황이 실현되고야 말았다.
‘위험한 놈.’
김충선은 홍태주를 생각하며 그리 평가했다.
군대의 지휘와 전장의 흐름 파악에 가장 중요한 기물인 군기를 그저 걸어만 두는 과감한 기만술. 대치 상황에서 화살받이 명인과 몽골군을 몰아치고 주력인 팔기는 모조리 우회시켜 버린다는 유연함.
거기에 대규모로 대포와 군선을 동원한다는 변칙성과 준비성까지.
과연 명나라와 조선 양국에서 국적으로 여겨지던 노추의 후계자다운 재주다.
‘……강을 건너왔으면 반드시 죽여 버렸을 터이거늘.’
홍태주는 여전히 강 너머에서, 순식간에 세워버린 웅장한 옥좌에서 전장을 주시하고 있다. 그 거만함이 딱히 대역을 세운 것 같지도 않았다.
김충선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방포하라!”
고집스럽게 고지대를 지켰다.
팔기가 금세 후방으로 들어올 것을 알았기에 북방군의 절반은 남겨두었다.
저들이 마주해야 할 건 모조리 등을 돌린 채 앞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뒤통수들이 아니라, 비탈을 모조리 포수와 살수들로 채우고서 끊임없이 총탄과 화살을 쏟아내는 인간과 강철의 벽이다.
“거창!”
김충선이 엄히 호령했다. 시끄러운 총성마저 압도하는 노장의 일갈에 살수들이 장창을 늘어뜨렸다.
지난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팔기군의 규모가 우군과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보병이 동수의 기병과 맞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기병의 기동성과 충격력은 보병이 아무리 정예한들 흉내낼 수 없으니까.
일반적으로는.
찰나의 순간 늘어뜨린 장창과 기창이 교차했다.
콰과과광!
폭음과 진배없는 파열음이 사방에서 터졌다.
무수한 창이 부러지고 꺾여 사방으로 파편을 토해내고,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팔기의 기수와 북방군 살수들이 날고 튕겨졌다.
죽은 말, 주인 잃은 말, 산 사람, 죽은 사람이 어지러이 전열에서 뒤섞였다.
장창을 잃은 살수들은 반만 남아버린 창대를 버리고 환도를 뽑아들었고, 팔기의 기수들은 말을 잃고 혼미한 와중에도 시체들을 넘어 달려들었다.
난전 위로 총탄과 화살이 교차했다.
유시에 적중한 포수와 살수가 쓰러지고 비탈을 굴렀다.
살수조는 난전에 묶인 전우들을 두고 물러나서 다시 장창을 겨누었다. 냉혹하지만 냉정한 판단이었다. 낙마하지 않고 말을 회수해서 물러났던 철기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지축을 때리는 철기의 말발굽이 생사와 인마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렸다. 먼저 난전을 밀어버린 철기가 또 한 번 장창방진을 때렸다. 다시 한번 생사와 인마가 뒤섞였다.
철기는 난전을 남기고서 재차 돌격을 위해 물러났다. 후열의 팔기들은 총탄과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시체 몇을 남기고 철기들이 물라난 자리에는 오가는 발굽에 짓이겨진 최초의 난전이 드러났다. 대지에 생명의 형상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다채로운 색상의 살점과 뼛조각 그리고 흩뿌려진 핏물만이 흔적처럼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도 고역스러운 광경.
김충선이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동요하지 마라! 우리가 이기고 있다!”
사실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원수의 군대가 몽골군을 쳐부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우리 바로 뒤에 우군이 있다!”
병사들에게는 위안이 되는 소식이다.
절반의 북방군으로 당장 팔기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이때, 나머지 절반의 북방군이 합류한다면 전세는 어떻게 될까.
김충선이 재차 외쳤다.
“명한다! 부원수는 즉각 응원하라!”
도원수의 엄명에 북방군은 이미 원군이 당도한 것처럼 함성을 내질렀다.
서로가 서로의 용기를 북돋으면서, 잠시 참상에 흔들리던 병사들은 참상을 외면하지 않고도 외면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재차 돌입한 철기들은 접전 이전보다 도리어 사기가 더 올라간 팔기에 기세가 위축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몽골군의 협공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버린 정충신의 북방군이 강변을 마저 정리해 버린 뒤 전장에 합류하고 있었다.
* * *
굳은살 박힌 두꺼운 손가락으로, 홍태주는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팔기의 우회를 인지한 북방군은 반분하여 절반은 상륙하는 몽골군을 차단하고 다른 절반으로는 고지대를 수비했다.
홍태주는 그것을 교만이라 여겼다.
북방군의 절반이 상륙한 몽골군을 처단하더라도 군선은 계속해서 몽골군을 수송할 테니까.
예상이 깨진 건 북방군이 생각보다 빠르게 상륙한 몽골군을 제압하고 군선들을 모조리 좌초시켰을 때였다.
뒤이어 지축이 울리며 언덕 너머에서 팔기가 돌입했으나, 홍태주는 이미 의주 전투에서 패배를 직감한 뒤였다.
북방군의 최후로 여겼던 각개격파를 도리어 당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승리를 자신할 수 있을까.
홍태주는 눈을 감았다.
‘……잘 싸우는군.’
그러나, 의주 전투의 향방은 정해졌더라도 전쟁의 결과는 아직 미지수였다. 한양으로 달려간 팔기의 절반이 왕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면 의주 전투의 결과도 무색해질 테니까.
성공을 직접 쟁취하지 않고 뒤에서 기원하는 건 제 성향과는 맞지 않았으나 홍태주는 그저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도, 조선의 왕도 모두 만만찮은 상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