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4화
시작은 봉화였다.
함경도와 연결된 아차산의 봉화대에 이어, 의주부와 연결된 무악산까지 연이어서 4개의 봉화를 피어올렸다.
전면적인 침공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왕과 조정은 함경도에서 발생한 침공은 성동격서를 위한 목적의 조공助攻으로 판단했다. 그 뒤를 이은 의주부의 신호는, 곧 주공의 침공이었다.
이에 병조판서 이광정은 소극적으로 제안했다.
수방사를 평안도로 보내 의주부의 북방군을 지원하거나 상황에 따라 안주부에서 새로이 도하를 저지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건 방어를 강화하자는 측면에서 일리는 있었으나 곧바로 논파되었다.
‘혹 압록강을 도하한 후금군이 전장에서 이탈해 곧장 남하한다면 수방사가 사라진 한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좌의정 박홍구의 주장이었다.
홍태주가 제 아비를 닮아 매우 간교하다는 사실은 아파태의 증언과, 함경도로 이목을 끌어 성동격서를 하려던 정황이 증명하므로 중앙군을 가벼이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홍구는 평소 안목이 좋다는 평가와 함께, 주장의 근거가 합리적이었다.
병조판서 이광정 역시 자신의 제안을 강권하지 않았음으로 금세 수방사는 한양을 수호하는 데 집중하기로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불안을 떨치지 못한 것일까.
“후금군이 끝내 압록강을 도하했다고 하옵니다.”
봉화에 이어 의주부에서 치보가 당도하자 이광정의 안색이 금세 파리해졌다.
“역시, 강을 넘었구려…….”
이광정의 질색에 병조참판 이귀가 타박했다.
“저들이 강을 넘어오리란 건 모두가 예상한 바인데, 웬 호들갑이십니까?”
“이번 전쟁은 지난번 아민이 우발적으로 정람기를 이끌고 강을 넘어온 것과는 다르오. 게다가 이번에는 복속시킨 몽골군까지 대동하지 않았소이까?”
“허, 전조 시절 몽골도 아니고 다 망한 북원 찌꺼기들일 뿐입니다.”
이귀가 과도한 자신감을 드러냈다면, 이광정은 정반대로 과한 우려를 드러냈다.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서라도 팔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탓이다.
기실, 수방사를 전선으로 보내 방비를 강화하자는 주장도 그 발로였다.
후금군의 정예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으니 전선이 불안한 것이다. 병조판서로서 책임지고 방어를 강화했음에도 그랬다.
그러한 이광정의 모습에 왕이 생각했다.
‘전시 재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군.’
인간으로서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이다. 침착한 편이 이상했다.
그러나 재상이라면, 국가적인 비상 상황이라도 냉철해야 한다. 조정은 곧 나라의 두뇌. 위기를 맞이한 개인이 두려움에 경거망동하다간 도리어 큰 화액을 맞기 쉽듯, 이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교체는 하지 않는다. 비상 시국이니까.
단지 비중을 줄일 따름이다.
“병조판서께서는 이만 퇴궐하여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왕의 인자한 제안에 이광정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신이……, 어찌…….”
전시의 병조판서다. 이런 상황, 이런 위치에서 회의에서 빠질 것을 종용받는 건 옷을 벗으라는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다.
“추궁하거나 벌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경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려워보여 하는 말입니다.”
“……송구하옵니다.”
푹 고개를 숙은 이광정이 퇴궐과 퇴직 사이를 고미하던, 그 순간이었다.
“전하!”
무관과 환관, 젊은 관리 몇 명이 무턱대고 난입했다.
그러나 모두 사색이 되어 제정신이 아닌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재상들은 돌발행동을 추궁하지도 못한 채, 왕 앞에서 엎드리는 하관들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팔기군이……, 팔기군이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적군이 사라지다니, 땅으로 꺼져 사라졌단 말인가 하늘로 솟아 사라졌단 말인가?
영의정 이원익이 엄히 일렀다.
“진정하고 상세히 말해보게.”
“……펴, 평안도 관찰사가 치보했습니다. 팔기군이 압록강 상류에서 도하했는데, 절반인 1만 가량이 교전에 응하지 않고 곧바로 남하했다고 하옵니다!”
동행한 하관들이 뒤따라 말했다.
“소신은 안주부사의 지시로 달려왔는데, 보고사항은 동문이옵니다.”
“……신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의 지시를 받았는데, 마찬가지이옵니다.”
치보는 역참마다 말을 갈아타면서 질주해, 봉화 다음으로 빠른 소식통이다.
그런데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평안도의 각 요충지에서 전한 치보가 동시다발적으로 닿았다는 건, 팔기군이 치보에 상응하는 속도로 무자비하게 남하했다는 뜻이다.
“허, 허어…….”
그 의미를 깨우친 중신들 사이에서 탄식과 경악이 퍼졌다.
분명하게, 팔기군은 한양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이원익이 재차 물었다.
“가장 남쪽의 고을에서 온 자가 누구인가?”
“…….”
“황해도에서 온 자가 있는가?”
이에 남루한 행색의 한 무관이 주변을 잠깐 돌아보고는 나섰다.
“소관이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에서 왔습니다.”
“적군을 직접 목격했나?”
“예, 멀리서부터 아주 요란하게 다가왔으므로 군수와 함께 백성들을 이끌고 월하산月下山 자락……, 그러니까 읍치 근처의 산자락에 피신해 있었는데 그때 보았습니다.”
“적의 행태가 어떻던가?”
“갑주를 잘 차려입은 기병이 대략 사백여명 마다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서 대로를 연이어 질주하였는데, 대강 그 무리가 스물 몇 번을 지나가므로 적의 수효가 일만 가량 된다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이에 이광정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무리의 규모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으나 거의 사백이 맞을 것입니다. 그것이 팔기군의 최소 편제 단위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후금군은 이를 니루, 화살이라고 불렀다.
이광정이 물었다.
“군기는 보이지 않던가? 팔기라고 모두 동등한 조직은 아니어서, 서열에 따라 지휘관과 병력의 정예함이 다르네.”
“……적들이 크고 작은 깃발을 휘날리며 내달리기는 하였으나, 부대기로 식별되는 깃발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각기 황색, 백색, 청색, 적색을 바탕으로 용이 그려지거나 그려지 않은 게 팔기의 부대기일세.”
이광정의 부연에 치보 온 무관이 고개 저었다.
“그런 깃발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광정과 다른 중신들이 부복한 이들을 돌아보았으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는 전투가 급박한 의주에서 팔기가 펼친 기만술을 알리지 못한 탓도 있으나, 팔기가 군기를 지참하지 않고 남하하는 건 기만술 이외의 목적도 있었다.
통제.
팔기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니루는 한 지역에서 사는 혈연적, 사회적 집단이기도 했으므로 소속감과 정체성이 강했다.
이는 니루들이 모여 구성된 각 팔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팔기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군기를 쥐어주었다간, 군기를 중심으로 찬탈자인 홍태주에게 반하는 정서가 모여 명령 불복종이나 투항, 극단적으로는 독단적으로 귀국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홍태주는 북방군을 기만할 목적 외에도, 팔기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자 군기 없이 강을 건너게 했다. 특히 간교했던 점은 기만술이라는 실리적인 전략이 각 팔기에서 군기를 회수할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군사 작전으로 정치적 이익까지 달성한 셈.
이역만리의 조선 조정은 이러한 사정까지는 짚지 못하고, 다만 적의 실체가 식별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으음.”
이광정이 침음을 흘리자, 이원익이 팔기의 식별 문제를 일축했다.
“가장 중요한 건 적들이 정확히 어떠한 부대로 구성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1만 여에 달하는 정예한 기병대가 수방사 외에는 의지할 데 없는 한양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외다.”
적들의 실체가 더 자세히 식별된다면 다른 전략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군기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신경을 쓰는 건 심력의 낭비일 따름이다.
이원익은 용상을 향해 아뢨다.
“적들이 계속 대로를 타고 남하했다면 봉산군 이남의 고을에서도 치보가 도달했겠으나, 아직 그렇지 않았으니 이는 적이 휴식을 취했다는 뜻이옵니다.”
“저들도 먹고 쉴 쉬간은 필요하겠지요.”
“예. 그러나, 적들이 아조의 강토로 매우 깊게 들어왔으니 충분한 휴식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속전속결이 중요하니까.
“저들이 언제쯤 한양에 당도하겠습니까?”
왕이 물었다. 이원익이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적도 한 번 쯤은 수면을 취해야 할 터이므로 이른들 명일이겠으나, 늦어도 익일을 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익일까지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원익이 허리 숙여 긍정했다.
이미 한순간에 평안도를 주파하고 황해도로 침투한 팔기군이다.
더욱이 이들 1만 정예 기병대는 지방군이 막아내기엔 턱없이 벅차다. 계란으로 굴러오는 바위를 막아내지는 못한다.
애초에 팔기가 어울려주지도 않겠지만.
대안은 없다.
내일, 한양에서 결판을 짓게 되리라.
왕이 명했다.
“수방사의 두 원수를 불러오세요. 적을 처단할 계책을 들어봐야겠습니다.”
* * *
순식간에 퍼진 소식으로 한양의 백성들은 내려앉은 밤자락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때 새로운 치보가 속속들이 전해졌다.
팔기의 남하가 재개됐다는 소식이었다.
팔기 역시, 전속력으로 대로를 따라 질주하고 있었으므로 자다가 깬 왕과 조정의 중신들은 이게 뒷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의 팔기는 이미 한양 근방에 도착해 있었다. 문제는, 언제 저들이 준비를 마치고 싸움을 걸어올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과 중신들은 언제 개시될지 모르는 싸움을 기다리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수방사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수방사 부원수 이회가 보고했다.
대로를 타고 각 군현에서 파견한 기수들이 정신없이 한양으로 입성했으므로, 그 분주하고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에 병사들이 모두 잠에서 깨버린 채였다.
수방사 원수 장만 역시 그러한 기류를 읽었다. 싸늘한 밤공기를 타고 장병들의 불온한 우려와 불안한 호흡들이 전해지는 듯했다.
장만이 물었다.
“어떻게 대처해야겠나?”
장만은 자신이 결단력도, 판단력도 부족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한양으로 귀환해 무용담 팔이에 몰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상 그가 전장에서 해낸 일은 없었으니까. 모조리 정충신의 공적이었다.
그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자신을 세뇌하기 위해 스스로를 영웅이자 맹장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적을 마주한 이 상황에서까지, 차마 그러한 거짓을 가장할 수는 없었다.
부원수는 어쨌거나 그 유명한 충무공의 조카가 아닌가. 반쯤은 양자나 진배없기도 했다.
“……소관은.”
“말씀하시게.”
“전쟁을 지금의 위치에서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
“소관은 무엇이 제장의 불안을 다스릴 최선의 방법인지 알지 못합니다.”
장만이 가볍게 침음했고, 이회가 물었다.
“도원수께서 명을 내려주신다면 성심으로 받들겠습니다.”
“……좋아. 대신, 들어보고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른다면 바로 말해주게.”
“예.”
“내가 생각하기엔 당장 팔기가 쳐들어오지는 않을 걸세.”
“……어째서입니까?”
“이미 팔기는 치보와 함께 근방에 도착했을 테지. 하지만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네.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뜻이야.”
이회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팔기는 공략을 서둘러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잠시나마 적에게는 불안을 주입하고 저들은 편하게 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겠나?”
“……음.”
“또한 기습과 공격은 완전한 야간보다는, 아침에 다다라 시야가 확보되면서도 수비측은 수면을 취하고 있을 아침 직전이 가장 유리하네.”
장만은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대면서도, 다소 불안했던 듯 덧붙였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유일세. 당장은 공격이 없으리라는. 부원수 생각은 어떠한가?”
“들어보니 대감의 분석이 합당합니다. 일어난 병사들은 다시 재우게 하고, 다만 적들이 우군의 심신을 괴롭히고자 소규모 유격전을 벌일 수 있으니 경계는 강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것도 그렇군. 그렇게 해주시게.”
“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회가 절도있게 예를 표하고서 사라지자, 장만은 가만히 눈을 감고서 묵은 숨을 토해냈다.
동요하는 장병들에게는 마저 휴식할 것을 주문했으나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경험도, 세월도 많이 입은 자신마저 조금씩 죄여오는 운명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