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55화 (155/380)

인조, 명군이 되다 155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던 장만은, 그새 자신이 잠깐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불안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 걸까?

아무튼 잠깐 졸았던 덕분인지 정신은 말끔했다. 불안도 많이 가신 채였다.

천막을 나선 장만은 서늘한 새벽바람과 함께 동편 하늘을 시원하게 물들어오는 여명을 마주했다.

머지않아 싸움이 시작되겠지.

그에 맞춰, 주변에서는 조금 일찍 기상한 장병들이 긴장한 얼굴로 조식을 옮기고 있었다.

밤새 한양에서 미리 해놓은 밥이다. 차갑게 식어 맛은 없겠지만, 불가피한 조처였다.

‘아침이 되어 시계가 확보된 상황에서 밥 짓는 연기를 풀풀 풍기다간 팔기가 들이칠 테지.’

밥 먹던 중 기마가 진중에 난입하면 어떤 꼴이 되는지는, 장만도 임진년 왜장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광교산 자락에서 8만 근왕군을 모조리 패퇴시킨 사건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기상하셨습니까?”

부원수 이회였다.

“좀 쉬었나?”

장만의 의례적인 물음에 이회가 작게 웃었다.

“소관은 젊으니 승전한 뒤에 쉬어도 됩니다.”

“음.”

장만은 침음을 흘렸다가, 잠깐 조는 사이 눈 주변에 번진 눈곱을 떼어냈다.

“간밤에 문제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이회는 팔기가 우군의 심신을 타격할 목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벌일 수 있다고 우려했으나, 간밤에는 계속 조용하기만 했다.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겠다는 것일까.

‘이쪽도 생각이 있다.’

장만은 이회와 일별한 뒤 조식을 전달받았다. 식은 밥에 식은 국.

숟가락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아 장만은 밥공기를 그대로 국 위에 쏟았다.

떡처럼 한 덩어리가 된 밥이 묵직하게 국으로 들어갔다. 국이나마 따스했다면 금세 밥알이 풀어졌겠지만, 국도 식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일군의 원수 쯤 된다면 전략과는 별개로 특식 정도는 요구할 수 있었다.

고작 밥 한 끼 짓는데 얼마나 연기가 나겠는가.

하지만, 원수가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장병 모두가 태만해진다. 원수 다음에는 부원수. 부원수 다음에는 중군…….

그렇게 전략과는 다르게 온 진영에 밥 짓는 연기가 풀풀 나게 되리라.

‘어차피 고작 한 끼다.’

밥 한 끼 불편하게 먹을 인내심도 없어서야 어떻게 일군의 지휘를 맡을 수 있겠는가.

장만은 숟가락으로 덩이진 밥을 한참 뭉갠 뒤, 그래도 풀리지 않은 밥알을 식어 맛이 증발해 버린 국과 함께 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식사가 종결되고 하늘에만 번지던 여명이 대지를 뒤덮어나가자 장만은 비장의 지시를 내렸다.

“고취를 연주하고 어기御旗를 올려라.”

이회가 꿀꺽 침을 삼키고, 기패관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노추의 수급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울리지 않겠다던 고취다.

비록 왕이나 조선의 군사가 칼을 휘둘러 수급을 취해내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노추는 죽지 않았던가.

변명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았으나 달리 취할 실리가 있다면 다르다.

점차 음량이 커져가는 고취와 함께 왕림을 상징하는 태극팔괘도가 하늘 높이 세워졌다. 붉은 바탕에 금실로 새겨진 태극과 팔괘가 새벽바람에 휘날렸다.

그러나, 이곳에 왕은 없다.

단지 기만술일 뿐이다.

“솥에 물을 올리고 불을 피워라.”

장만이 이어서 지시했다.

병사들은 물만 채운 빈솥을 세우고 아래에 불을 지폈다.

전날.

왕과 부름을 받은 두 수방사 원수가 가장 우려했던 건 팔기의 기동력이었다.

전원 정예 기마병인 팔기의 기동력을 차단하지 못한다면 대부분이 보병인 수방사는 전투의 주도권을 잃고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방대한 한양 성곽마다 수방사 병사를 세우는 건 대책이 되지 못했다. 일만을 뭉쳐 종횡무진할 팔기를 절대로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문을 열어 포위 섬멸하자는 이회의 제안이 있었으나 각하됐다.

적이 수도에 재차 침범하는 것부터가 위신에 중대한 문제가 있을뿐더러,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소개는 촉박한 와중에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으며, 혹여 팔기가 포위망을 벗어나 방화나 난동 따위를 부린다면 매우 곤란해지는 탓이었다.

전적으로 왕의 반박이었다.

이에 따르면 전적으로 수방사가 성 밖에서 팔기와 맞서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한양을 점령하고 왕만 붙잡으면 되는 팔기군이 수방사가 걸어오는 야전에 응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은, 인지하지 못했으나 홍태주와 펼친 것과 유사한 기만술을 제안했다.

고취가 시끄럽게 이어지는 가운데 태극팔괘도는 높은 하늘에서 펄럭였고 솥들은 힘차게 김을 뿜어냈다.

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유혹이다.

하물며 시간의 제약이 아주 촉박한 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두두두두두…….

‘역시나.’

무수한 말발굽이 지축을 울려댔다. 팔기의 등장이다.

장만이 외쳤다.

“속히 진형을 갖춰라! 내 당장 오랑캐들을 모조리 주륙하고 뜨거운 밥을 먹어야겠다!”

장병들이 호응하듯 환호하며 군영을 빠져나갔다.

* * *

“하찮기 짝이 없는 광경이구나!”

동구어부洞口魚夫가 감탄했다.

옛 한의 사위인 그는, 동시에 오래전부터 홍태주가 거느렸던 양백기의 부지휘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한 경력으로 찬탈한 홍태주에게서 숙청의 칼날을 맞는 대신 그가 강 너머로 보낸 또 하나의 비수를 맡았다.

그의 역할은 팔기 1만을 이끌고 조선의 수도로 질주해 곧장 그들의 수도와 왕을 확보하는 것.

그래서 한양 최후의 수비군 주둔지에서 갖은 유혹이 뻗어오자 동구어부는 저항하지 못하고 즉각 공격을 명했다.

그리고 조선군에 다다라 동구어부가 마주한 건 단창과 소재불명의 흉갑만 걸친 잡병의 대오였다.

질주하는 팔기 앞에서는 말마따나 하찮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모조리 쳐죽여라!”

동구어부가 환희에 차서 외쳤다.

약해빠진 조선군의 무수한 수급에 더불어, 사로잡은 왕을 개처럼 끌어다 새로이 즉위한 한에게 바친다면 자신의 권세가 얼마나 불어날까?

상상만으로도 떨쳐내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실현이 식은 죽을 먹는 것처럼 아주 쉽다면 더더욱…….

동구어부의 시야에 조선군의 파리한 면상이 지척까지 다가운 순간.

콰과과과광!

양측이 격돌했다.

철기와 부딪친 조선군은 맥없이 뒤틀리고 꺾인 채 피를 토해내며 튕겨나갔다.

동구어부와 팔기는 이 정도로 저들 저지할 순 없다는 듯 마저 질주해 나갔다. 그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단창을 내세운 조선군의 방진들 사이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고작 이 따위로…….’

단창 따위 철기 앞에서는 버들잎에 불과했다. 말이 본능에 따라 날을 피하긴 하지만, 철기가 대오를 갖추어 진격하면 어줍잖은 방진 따위 말발굽에 뭉개질 따름이다.

동구어부가 그렇게 치부한 순간이었다.

타다다다다당!

총성과 초연이 전장을 뒤덮었다.

동구어부가 무적을 자신하던 철기는 영거리에서 쏟아지는 탄환에 이리저리 꿰뚫려 낙마했다.

총탄을 피한 기수들도 몇몇은 놀란 말에 의해 내던져졌다.

명군을 거듭 상대하면서 화약무기의 위력은 상당부분 소음이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금군이다.

그래서 미리 말의 귀를 멀게하여 대처했으나, 그럼에도 코앞에서 창날이 번쩍이고 화염이 폭발하며 영거리에서 터진 총성의 파공이 피부를 때리자 귀가 먼 말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낙마한 팔기의 기수들은 곧장 몸을 웅크렸으나, 창날을 앞세워 뭉친 방진들 사이로 주인 잃은 말이 달아날 길은 많지 않았다.

곧바로 무수한 말발굽이 웅크리며 신과 기적을 찾는 팔기의 기수들 위로 작렬했다.

방진들 사이로 피와 살점의 길목이 만들어졌다.

쏟아지는 총탄에도, 놀란 말에도, 주인 잃은 말이 달려들어 부딪쳐도, 많은 팔기의 기수들은 끝까지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몰살을 당하기에 팔기는 정예했다.

그러나, 전장을 자욱하게 메운 초연은 정예병의 시야를 가렸고 동서남북은 물론 그 사이에서까지 여덟 방위로 터지는 총성들은 귀를 막았다.

만약 군기가 있어 초연 너머로 혼란한 팔기군이 집결할 위치를 알려주었다면 전투의 전개는 달라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동구어부의 팔기는 그렇지 못했다.

그저, 천지사방을 장악한 대혼란 속에서 의지할 데 없이 무작정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낼 따름이었다.

기세를 잃은 기병은 아무리 정예해도 쓸모가 없고, 판단력을 잃은 군대는 아무리 강대해도 끌려다닐 따름이다.

동구어부의 팔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수방사가 펼쳐놓은 방진의 덫에 제 발로 들어와 갖혀버린 팔기군은 하나둘 무기력하게, 혹은 하찮은 저항 끝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거나 말발굽에 짓눌려 압사했다.

* * *

총성이 멎고 초연이 흩어졌을 때.

조선군과 그 너머의 한양을 향해 호기롭게 질주하던 팔기군은 그 박력이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스러져 있었다.

전투의 종결과 함께 방진을 해체한 수방사는 전장을 정리해 나갔다.

후금군 팔기는 본디 정예하고 맹렬한 자들이었고, 또한 수도와 더불어 왕의 안위를 노렸던 죄과가 있는 만큼 자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조선의 입장과는 달리, 몸뚱이가 관통되고 사지가 짓이겨진 채 혼미한 정신으로 극통을 호소하던 대개의 팔기군에게 죽음은 자비로운 처분이 되어주었다.

멀리 달아나 제 주인과 달리 성벽이나 숲 외곽으로 피신한 팔기의 군마들은 의외의 수확이 되어주었다.

수천 필 강건한 군마가 확보되었으므로, 그간 조선의 정예군에게는 사치처럼 여겨지던 기병의 편제에 현실성이 생겨났다.

압도적인 승리와 전리품.

그것이 장만과 이회가 쟁취한 것이었다.

대가는 잔혹했다.

수방사에 일시적으로 편입되었던 천민 속오군은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 기존의 삶을 걸어야만 했다.

팔기군을 방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취약한 무장, 취약한 진형으로 철기와 격돌했던 그들 대부분은 사상死傷을 면치 못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오직 극소수만이 다치지 않고 살아남아, 철기의 무수한 말발굽에 짓이겨진 전우들 사이로 황망한 채 방황하거나 주저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장만은 다른 수방사 병사들에게 일러 그러한 생존자들을 군영으로 이끌게 했다.

모두가 마땅한 대가를 치렀으니.

남은 건 합당한 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뿐이다.

* * *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병조판서 이광정이 눈물마저 글썽이며 외쳤다.

한양을 지척에서 위협하던 홍태주의 간악한 비수가 수방사의 정예함과 두 원수의 책략에 부러졌다.

내심 만에 하나를 걱정하고 있던 이광정이었다. 그에게 의주부의 전황은 아직 미지수였으나 팔기의 절반은 몰살한 데 반해 수방사는 건재했으며 두 원수는 증명해 냈으니 패전은 이제 만의 하나에도 들지 않았다.

“경하드리옵나이다, 전하.”

감격한 이광정을 따라 삼의정과 육경 이하 중신들이 일제히 허리 숙였다.

그들이 내심 내린 결론 역시 이광정과 마찬가지였다.

그간 조선의 하늘 같았던 대명마저 위협해 온 후금이다.

그러나 홍태주가 친정을 행하고, 수만의 몽골군과 팔기군이 강을 건너왔음에도 조선은 견뎌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홍태주가 악독한 계략을 연이어 펼친 건 그만큼 압록강의 방비가 튼튼하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이미 한양과 함경도에서 홍태주가 마련한 계략을 모두 분쇄하였으니, 의주부에서 도원수와 부원수 역시 쉽사리 승전을 이뤄내지 않았겠사옵니까?”

미지수지만, 어째 이원익은 2차 의주 전투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이었다.

“전하.”

한 무관이 위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등장했다.

모두의 앞에 부복한 무관은, 분명 피로에 찌들고 더러운 몰골이었으나, 대조적으로 밝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의주에서 몽골군과 1만의 팔기를 모두 격퇴했사옵니다.”

“……오, 오오.”

이원익은 짐작했던 바가 곧장 사실로 드러나자 반색한 낯으로 얼빠진 감탄을 흘려댔다.

그 직후, 우의정 이상의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주상 전하 천세! 대조선국 천천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