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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56화 (156/380)

인조, 명군이 되다 156화

신하들이 입을 모아 천세를 외쳐댔다.

십중팔구는 이미 임진년 왜란을 겪은 인물들이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중신들이 환호하는 건, 왜란을 극복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겠지.

천하의 대명마저 어쩌지 못했던 후금이다.

더욱이 최근 후금은 몽골 부족 중 가장 강성한 차하르부를 복속시키고, 원나라 황실의 옥새까지 확보하며 체급을 부풀리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을 조선이 격퇴해 냈다.

지난 왜란과 같은 치부도 없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국경까지 도망치거나, 구차하게 후계자를 대신 적지에 내보내거나, 무고한 백성들을 화살받이로 삼고 그들에게 전쟁을 떠넘기거나, 공신을 숙청하지도, 이국에 원조를 구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신들은 그런 치부를 지난 전쟁에서 생생하게 겪었던 탓에 더욱 기뻐하는 거겠지.

‘……나 역시.’

사명을 완수했다.

아민이 침공해 온 1차 의주 전투가 정묘호란을 대신한 꼴이라면, 이번 2차 전투는 병자호란 꼴이다.

시기는 크게 일렀으나 홍태주가 황제로 즉위한 직후 기세를 몰아 조선을 침공했다는 구도는 동일했다.

원래 역사에서, 병자호란은 희대의 무능하고 비열한 군주가 역사에 오점만 남겼던 사건이다.

선조가 갖은 추태는 다 벌였으나 전쟁에서는 끝내 이겼으니 망정이지 인조는 이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왕이 되어서는 안 됐을 자로 여겨왔는데, 그런 생각을 시험하듯 반대로 시험을 당했다. 내내 호란에서 인조처럼 실패하면 어쩌나 근심해 왔는데 이번 결과가 증명해주었다.

인조는 그냥 병신이었다고.

* * *

밤이 되어, 서궐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본디 세자가 아닌 내가 서궐을 사용하는 건 지양했으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만류했다.

백관이 모여 하례를 드리려는데 경운궁은 좁다고.

‘이전까지는 없던 불평을 다 하고 말이지.’

이제는 서궐을 써도 좋다는 뜻일까?

서궐 존치 문제는 이미 세간에서 일단락되었으나 내게만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지켜야 할 명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 서궐에 입성했다.

더는 명분 문제로 문제를 삼지 않을 거라는 용인이자, 동시에 승전으로 나의 권위가 더 강해졌다는 증명이었다.

“승전을 경하드리옵나이다,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새삼스럽게 하례를 올리자, 좌우의정 박홍구와 의상의는 물론 이하 육경과 당상들이 함께 잔을 받쳐들었다.

“경하드리옵나이다.”

다들 왕이 한 마디나마 해주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내가 오늘날 같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나 한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대들이 평소 힘써주어 보좌해주었기 때문이고, 또 전장에서 장병들이 필사적으로 분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이 감격스러운 낯으로 끄덕였다.

“그러니 지금 들어올리는 잔은, 우리 모두와 이 자리에는 없으나 각자의 자리에서 힘써준 모두의 승리를 위해 듭시다. 대조선국 천세.”

“대조선국 천세!”

일제히 술잔이 기울었다.

중신들이 편한 분위기로 왁자하게 떠들며 각자의 수저를 놀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특히 영의정 이원익.

가까운 자리에 있다보니 더 눈에 띈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도 나름 불우한 역사가 있는 사람이다.

‘이괄의 난에 정묘호란까지 일만 있으면 매맞는 개새끼처럼 도망다니는 인조 따라 공주에서, 강화도에서 갖은 지랄은 다 받아줬으니.’

여든의 연배에 그 고생은 다 하고, 숙원이던 대동법은 끝내 실현하지 못한 채 병자호란 직전 졸했다.

그러니 조선이 또 반쯤 망하는 꼴은 안 본 셈이지만, 설마 이원익이 병자호란과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주 편치 못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거다.

“……전하?”

이원익이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영상.”

“예, 전하.”

나의 호명에 이원익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차마 다른 사람들이 불쌍해서 승전의 치하를 모두의 앞으로 돌렸지만, 사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 데는 영상이 공이 조금 더 큽니다.”

“과찬이시옵니다.”

이번 역사에서는 천명이 다하더라도 자신이 등진 뒤의 조선을 향한 근심은 없겠지.

그래서 걱정이 들었다.

근심이 심해도 사람이 일찍 죽지만, 근심이 너무 없어도 사람이 일찍 죽기 때문이다.

“영의정.”

“예에.”

“아조가 당장은 큰 고난을 넘어섰지만, 갈 길이 구만 리이니 계속 고생해 주세요.”

“전하께서 써주신다면 어찌 성심을 다해 따르지 않겠사옵니다.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이원익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지라 장난기가 돌았다.

“……그래요? 그럼 내가 경을 반 백년을 더 쓰고자 하는데 응해주시겠습니까.”

이원익이 일순 숨을 들이키더니, 웃음기를 머금고서 답했다.

“신의 몸뚱이가 신의 뜻을 따른다면 반 백년이 아니라 반 천년이라도 따르겠으나, 과연 몸뚱이가 버틸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근성으로 어찌 안 되겠습니까?”

“하하…….”

나는 고개를 돌려 우의정을 보았다.

이상의는, 왜 저를 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우의정이 원래는 오늘까지 살아있기 어려운 관상이었습니다.”

이상의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의정으로 기용하고 싶어 계속 살아있으라고 하니, 팔자까지 이기고 오늘날 의정에 올라 나를 보필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상의가 농담조로 답했다.

“전하의 명이 우선이거늘, 어찌 하늘의 부름이라고 미뤄두지 못하겠사옵니까?”

“우의정이 참으로 충신입니다. 영의정도 우의정을 본받아, 부디 오래도록 나의 곁을 지켜주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원익은 다만 손만 모을 따름이었다.

지킬 수 못할 약속은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걸까. 아쉬울 따름이다.

이원익의 건너편에는 좌의정 박홍구가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나와 이원익 사이에 오가던 잡담을 엿듣다가 시선을 받자 눈이 동그랗게 됐다.

이내 눈살이 호선을 그린 박홍구가 말했다.

“신은 충신이니 명해주신다면 반백년도 더 살아보이겠사옵니다.”

“그래요? 기대하겠습니다.”

“망극하옵니다.”

삼의정과 다 잡담을 나눈 다음에는 그 너머에 자리한 육경을 둘러보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비변사 운영을 배제하고 의정부 중심의 체제를 유도해 왔기 때문에 크게 강조되지 못한 상황들이다.

특히 육경 중 인사권을 가져 막강한 존재감을 가져야 했을 이조판서는 내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고…….

그나마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는 시국이 시국이라 유능한 인물을 기용하고 많은 일을 맡겼다.

평소에는 일처리가 깐깐하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멘탈이 많이 흔들리는 이광정.

그리고 쓰레기 같은 안목을 가진 인조조차 십여 년을 넘게 호조판서로만 푸욱 우려먹은 김신국.

판서직이란 본디 수시로 바뀌는 게 일상으로, 반나절만에 갈아치워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두 사람은 나의 즉위 이래 병조와 호조의 판서만 맡아왔다.

원래 재무와 병무는 각기 내정과 외정의 근간이면서도, 막대한 자금과 방대한 물목을 관리한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일은 회계와 설계에 유능하고 경험도 많은 사람이 맡아줘야 한다. 구멍이 크게 나면 깔끔한 수습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광정과 김신국은 괜찮은 인선이다.

엮이는 게 많은 서로의 일도 잘 알고.

공조판서 김류도 그런대로 일인분은 하는 사람이다.

간신배답게 못난 면도 크지만, 내가 주도권을 확실하게 가져가니 눈치껏 꼬리를 말고서 지금은 적당히 처신하는 중.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이다.

그런 김류의 대원칙은 고분고분 따를 테니 저를 버리지 말고 끝까지 데려가서 의정까지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스스로 대원칙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우의정 정도는 내어줄 만했다.

이런 권력구도가 되었음에도 환상인지 자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서인 정권의 주인의식을 가지고서 일인분은 계속해 낼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정에 용과 호랑이만 있을 수도 없는 법이고…….’

어느 조직이 다 그렇듯이 미꾸라지도 몇 마리는 끼기 마련인데, 김자점 같은 폐기물보다야 김류가 낫다.

“예조판서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남이공.

“예판이 비록 참석은 못 하였지만, 머지않아 명나라에도 전해질 승전보를 접하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자축할 것이옵니다.”

이원익이 위안해주듯이 말했다.

……하기야, 이역만리 타지에서 조선의 후금의 대대적인 침공을 당했다는 소식만 덜렁 접했을 남이공이다.

그간 가슴을 졸이면서 근심했을 텐데, 조선이 역으로 후금의 정예군을 몰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아주 하늘까지 뛰어오르겠지.

그리고 그 기쁨과 드높아진 조선의 위세를 국외에서도 여실히 체감하고, 또 행사할 거다.

‘명나라가 1차 의주 전투에서 재고했을 조선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재고해봐야 할 테니까.’

아마 융숭한 대접을 받지 않을까.

“그만하면 남이공에게도 충분한 보상은 되겠습니다.”

“예, 염려치 마시옵소서.”

남이공에 대한 걱정은 그치고, 육경들 너머에 자리한 당상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은 본디 나도 이름만 알았던 자들이었다.

그래도 몇몇은 눈에 들어오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병조참판인 이귀와 공조참판 김육이 그러했다.

전자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미친개고, 후자는 장차 김신국과 함께 나라의 근간을 경영할 인재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별별 사람이 다 모였군…….’

왕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나라에 한결같은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있고, 정치적인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암군에게 줄을 섰다가 된통 죽다 살아난 사람도 있다.

조용히 제 몫만 다하는 사람이 있고, 티 내면서 제 몫을 다하는 사람이 있으며, 시끄러운 게 제몫인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

모두가 최선은 아니고, 최악도 아니다.

‘승전의 공로는 모두 이들에게 돌렸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머리지.

어떤 역사에서는 이들을 데리고서 모든 것에 실패만 한 왕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역사에서는 그 왕이 실패만 한 모든 것을 성공한 왕이 있으니까.

‘이 정도면…… 명군 아닌가?’

* * *

“경하드리옵나이다, 아바마마!”

대보와 나머지 인신을 가지고 피신했던 세자가 돌아왔다.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전황이 좋지 않게 굴러간다면 삼도에서 근왕군을 징발해 한양으로 나아갈 생각까지 했던 세자다.

그러나 그런 열의도 무색하게, 몽골군과 팔기의 절반은 국경에서 각개격파를 당하고 몰살되었으며 한양의 지척까지 다가와 수도와 옥체를 위협한 팔기의 나머지 절반도 수방사의 진법과 신무기에 전멸했다.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대승리.

지난 왜란에서는 조선이 죽만 쑤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어린 자신마저 그럴진대 직접 왜란을 겪어본 세대는 어떠할까?

온 한양이 축제 분위인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거리를 헤치고 경운궁을 방문한 세자도 벅찬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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