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7화
세자와 세자빈 부부가 귀환하면서 나는 미뤄두었던 가족의 잔치를 열었다.
궁궐에서만 살아가는 이들만 부른다면 대비가 아쉬워할 터이고, 그렇다고 정명공주 부부만 부른다면 다른 종친들이 구시렁거릴 터라 규모가 꽤 커졌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이 주인공인 만큼 배석에 유의했다.
“상선?”
“예, 전하.”
나는 마루 밖까지 펼쳐진 잔치를 둘러보고서 일렀다.
“문 좀 닫아주시겠습니까? 슬쩍.”
“예에.”
명령을 받은 최 상선이 살금살금 문간으로 나아가, 미닫이를 은근슬쩍 닫아나갔다.
뜰의 종친들은 이미 술기운에 불콰하여서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삼삼오오 떠들고 웃어젖히기 바빴다.
‘그래, 계속 바빠라.’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나는 질색하고서 늘어졌다.
“이제야 편하게 앉겠네. 고생하셨습니다, 최 상선.”
“아니옵니다.”
“상선도 빈자리에 앉아요.”
“예?”
“나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한 지 오래되었으니 이만하면 가족 아닙니까?”
“제가 어찌 감히…….”
“상선이 합석을 두고 감히, 라 평하신다면 광산부부인께서도 눈치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주상!”
인목대비가 인상을 찌푸렸고,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석에 앉게 된 광산부부인은 그저 허허 태평하게 웃었다.
“왜 언성을 높이십니까? 문 밖 사람들 눈치 보이게.”
“…….”
“제가 광산부부인을 조모처럼 여기고 편하게 앉으시라고 일부러 문을 닫게 했는데, 설마 욕을 보이고자 상선에게 그리 권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가족으로 여기기 때문에 권했지요.”
그러자 대비가 불평했다.
“주상이 아무리 궁인을 귀하게 여겨서 말을 낮추는 법조차 없다지만, 왕가의 주인 된 사람으로서 가족으로 여긴다는 건 별개의 문제요.”
“허어……. 그렇게 트집 잡아서 가족이 아니라고 배격하시면.”
즉위 전후로 대비는 나와 정치적으로 경쟁자였고, 그래서 매우 험악한 관계였다.
그러나 대비가 더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시점에서 나는 적대적인 태도를 거두고 정명공주와 대비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즉위 초반의 관계가 지금처럼 호전된 건 다 그 노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내 자비심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으신 분께서 나조차 세우지 않는 울타리를 대신 치시겠다니…….
“…….”
“…….”
“……뭐요? 마저 말씀하시오.”
“아닙니다. 크흠. 상선, 미안하게도 대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누워만 있어도 피로한 연배에 계속 서 있으셔야겠습니다. 아이고.”
그러자 대비도 눈치가 보였던지 상선에게 일렀다.
“앉으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대가 속히 앉지 않으면 주상께서 나를 더 나쁜 사람으로 몰아갈 거요.”
“망극하옵니다, 마마.”
상선이 멋쩍게 웃으면서, 무릎을 꿇기에 한 마디 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신은 이게 더 편하옵니다.”
“그래요? 처음 알았습니다. 그럼 나도 무릎을 꿇고 있을까…….”
그러니 최 상선도 못 견디겠다는 듯이 편하게 앉았다. 갖은 사양은 다 했지만, 막상 털썩 주저앉고는 살겠다는 듯이 노곤한 얼굴로 쉬는 걸 보니 꼴값 떨어댄 보람이 느껴졌다.
아무튼, 광산부부인도 자리를 옮겨서 대비와 가깝게 앉았다. 밖과 이어지는 문을 굳이 닫아버린 이유다. 광산부부인이 왕족은 아니라는 이유로 말석에 앉았는데 정작 딸인 대비는 왕의 (종법상) 어머니인 만큼 좌석의 서열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비는 나의 이런 배려를 받아놓곤 상선에게 꼬장을 부린 셈이다. 아주 괘씸한 어르신이지.
보는 눈도 없어졌겠다, 대비는 정명공주와 사위 그리고 손주도 가까이 불러서 앉혔다. 그리고 금세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는데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세자야, 너도 이리로 와서 앉거라.”
“예, 아바마마.”
세자는 세자빈과 일별하고서 곁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몇 번이고 한 하례를 또 올렸다.
“승전을 경하드리옵니다, 아바마마.”
“몇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딱지가 않겠구나.”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거듭 경하할 일이거늘 어찌 그러지 않겠사옵니까?”
“되었다, 이 녀석아.”
일가를 이루었어도 아직은 애라는 듯, 뺨을 잡아당기니 말캉했다.
“직접 가 본 전주부는 어떻더냐?”
“한양과는 분위기가 무척 달라 놀랐사옵니다.”
“분위기?”
“성 안팎으로는 한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았으나, 대부분은 남루한 초가에서 살았고 궁핍한 자들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다 기울어진 집에서 기거하였습니다.”
“흐음.”
“그리고 한양과는 다르게 잡인의 출입이 매우 횡행하여서 박수, 무당이나 중, 사당패 따위가 즐비하게 거리를 쏘다녔는데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들도 많이 섞여 있었사옵니다.”
“깨달은 바가 있겠구나.”
“소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조는 넓고, 많은 사람이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데 대부분의 살림은 한양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세자가 직접 전주부를 다녀온 보람이 있구나.”
왕과 세자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궁궐에서 살아간다.
이따금 출타를 하더라도 미복잠행이 아닌 한에야 거리를 돌아다닐 일은 거의 없고 공식적인 외출은 무수한 사람에게 에워싸여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근처를 오가는 게 전부다.
그러니 만기萬機를 다루더라도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나라의 실체는 알지 못한 채 종이에 쓰인 먹물로만 막연히 인지할 따름이다.
“전주부는 뭇 고을과 비교하여 매우 부유하고 인구가 많아 개국부터 감영이 설치되어 전라도의 중심으로 기능하였고, 이래로 여러 관찰사가 거듭하여 부윤을 별도의 관리에게 맡기기를 거듭 청원하였을 정도로 번화하다.”
세자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전주부가 한양과 비교하면 성세가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한양이 왕이 기거하는 나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가장 발전한 곳일 수밖에 없지.”
“…….”
“이러한 한양과 비교하면 전라도에서 가장 번화하였다는 전주부마저 그러할진대, 만약 다른 고을이라면 실상이 어떻겠느냐.”
“많이 부족할 것이옵니다.”
“세자가 대로를 타고 전주부를 오가는 동안 열읍의 읍치를 거쳤겠지만, 치소와 대로에 멀리 떨어진 마을들의 실상은 또 어떻겠느냐.”
평소 번화한 한양, 그중에서도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중건한 서궐에서 살아가는 세자에게는 폐허나 다름없을 것이다.
“세자가 새삼 깨달았다는 방대한 조선의 영역 대부분, 인구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조선의 실체는 그저 지도 위의 점에 불과할 한양이겠느냐, 한양 밖이겠느냐?”
“한양 밖일 것이옵니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세자가 워낙 똘똘한 녀석이고, 또 딴에는 충격을 많이 받았을 터인지라 도리어 잊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왕 세자가 외방을 다녀온 참이므로 몇 마디 했다.”
“예.”
또 세자빈이 배가 불러서 거동이 편치 않았을 텐데 익숙치 않은 먼 외방을 다녀왔으니 특히 고생이 많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 점은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인 만큼, 알아서 잘할 터였다.
‘세자빈이 그리 상태가 나빠 보이지도 않고…….’
원래 역사에서는 전주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청나라까지 다녀왔던 세자빈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잘 낳았으므로 체질은 정말 타고난 셈이다.
그래도 역사가 달라진 만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세자에게는 의술을 익히게 했다. 시대의 한계가 분명한 만큼 의서라고 다 맹신하지 말고 잘 분별하라 당부도 해뒀다.
“아바마마?”
“말하거라.”
“소자가 잠시 고민해 보았사온데, 외방은 궁핍하고 학문이 발달하지 못해 의원도 수가 적고 배움도 깊지 못할 듯하옵니다.”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걸까.
“백성이 가난하여 병을 얻어도 의원을 부르기 힘들고, 또 의원을 부르더라도 의원이 배움이 깊지 못하여 오래된 의서를 맹신하거나 오독하여 처방한다면 효용은 없이 해만 끼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겠구나.”
“……소자가 오래전부터 어의와 소문난 명의, 산파들을 불러 가르침을 받고 유명한 의서들을 구해 익혔는데 저마다 취하고 버릴 것이 있어 매우 난잡하였습니다.”
세자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소자가 그간 익힌 바를 정리해 하나의 책으로 낼까 하옵니다. 그렇게 효용과 실리만을 추려내어 많은 사람이 익히게 한다면, 무수한 인명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뜻은 가상했으나 무턱대고 허락하기 전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의술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학문이니까.
그러나 세자는 위험하거나 검증되지 않고, 미신에 불과한 처방은 알아서 걸러냈을 거다.
내가 당부한 바를 명심하고서 오롯이 세자빈을 위해서 의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자의 진심과 정성이 부족하지 않다는 증거는 이미 나와 있었다.
“수방사 부상자들의 회복률이 기적적으로 높다더구나.”
세자가 그간 수방사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돌보며 세워놓은 대원칙 덕이었다.
내가 여기의 침투로 쉽게 설명한 감염의 원리를 이해하고서, 시술자의 손과 의복 그리고 도구를 철저하게 소독하게 한 것이다.
미생물의 존재를 알지 못하여 감염에 대한 개념도 희박한 시대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조처다.
“뜻대로 하거라.”
당부한 바를 곧장 제가 익힌 의술로 실천하겠노라 나서는 걸 보니, 이미 전부터 해왔던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가상하구나.”
가상한 세자의 정수리를 두들겨준 뒤, 이어서 등도 두들겨주고 밀었다. 눈길이 슬쩍슬쩍 세자빈을 향하는 게 보여서였다.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편히 쉬어라.”
세자는 훌쩍 일어나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망극하옵나이다, 아바마마.”
칭찬을 들은 게 기뻤을까. 세자는 밝아진 얼굴로 물러나서는, 세자빈과 중전 사이에 끼어들어 더 밝아진 얼굴로 담소를 나눴다. 아비의 칭찬보다 부인의 곁으로 돌아간 게 더 좋은 모양이다.
괘씸한 녀석.
중전은 세자의 난입에 몇 마디 어울려주더니, 금세 물러나 나의 곁으로 왔다.
세자와 세자빈의 괘씸한 염장질이 눈꼴시려운 건 나만이 아니었다.
“더 가까이 오세요, 중전.”
세자와 세자빈 부부가 알콩달콩 설치고, 광산부부인과 대비 그리고 정명공주와 영안위 부부가 저마다 정신이 팔린 채였으므로 나는 눈치 보지 않고 다가온 중전을 끌어안았다.
“크흠.”
* * *
의주와 한양에서의 대승은 단순히 신민의 감정적인 고조를 넘어, 불필요한 수준의 과신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적인 북방군과 수방사를 압록강 너머로 보내 요동을 평정하고 후금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한양에 번져나갔다.
“전쟁은 이겼으나, 이 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렀다.
“가장 강대한 적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