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58화
“홍태주는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했습니다.”
지금쯤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겠지.
“황급히 내부수습에 돌입했을 겁니다.”
홍태주에게는 올인이었던 원정이다.
화살받이로 내몰았던 요동의 명인들, 몽골과 연해주에서 끌어 평안도와 함경도로 밀어 넣은 무수한 전사들.
심지어는 후금을 일개 부족에서 오늘날의 제국으로 만들어준 근간, 팔기마저 절반이 이역만리에서 전멸당했다.
“더는 무력을 외부로 표출할 수 없겠지요.”
남의 집 안방에 쳐들어왔다가 북방군과 수방사라는 원투 펀치에 이빨을 모조리 발치당한 셈이다.
“더 분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후금이 상실한 병력 모두가 홍태주의 충성스러운 수하만은 아니었지요.”
홍태주가 이번 원정으로 손해만 본 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건 개평일 따름이다. 가져온 판돈을 모조리 잃었는데, 국밥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남았다고 이득은 아니니까.
홍태주의 원래 목적은 후방의 불안요소인 조선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업적과 권위를 세워 찬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내부의 불안요소들을 확실하게 자신의 밑으로 거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태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다가 모두 놓쳤다.
원정에 실패한 그에게 당장 남은 건, 덮지 못한 찬탈자의 오명과 반 토막이 난 팔기뿐이다.
‘잔존한 팔기조차 협조적이지는 않을 테지.’
기껏 찬탈하길래 뭐라도 있는 줄 알았을 텐데, 결과가 이러니까.
후금판 인조가 된 셈이다.
“그러니 강을 넘기에는 적기 아니옵니까?”
병조참판 이귀가 물었다.
이전부터 오랑캐라면 학을 떼었던 자다. 후금이 전쟁을 일으키자 몸소 홍태주를 베겠노라, 전장으로 보내주라고 억지도 부렸다.
“…전쟁은 이겼으나, 이 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가장 강대한 적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이 일제히 당혹감을 드러냈다. 적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의문에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또한, 요동을 위협하는 건 후금의 목숨줄을 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군사들은, 일단 살고 보자며 의기투합한 후금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닥치겠지요.”
북방군에 수방사를 더해도 수적으로는 잔존한 팔기보다 적다.
“또한, 우리의 군사가 열세의 병력으로도 싸움에서 승리한 건 인재와 전략, 사기 등 여러 요소가 있겠으나 지형에서 거둔 이점 또한 작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후금군 주공이 공격한 의주와 압록강은 방어선이 단단히 강화되어 있었고, 또 강을 넘어온 팔기의 절반은 정직하게 대로를 거쳐 한양으로 당도했다.
덕분에 북방군과 수방사는 전투를 앞두고 충분히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역으로 강을 넘어가자는 건, 이러한 이점을 적에게 부여하고서 싸우자는 것입니다.”
“…….”
“물론, 나의 군사들이 자멸로 나아가는 후금군과 싸워 패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란 말이옵니까?”
“요동을 차지한 다음입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명분이지요.”
명나라는 개국 이래로 지금까지 요동을 두 세기 반이나 지배해왔다.
요동이 탈환되면 반환을 요구할 텐데,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요동을 차지할 명분이 부족하다.
‘역사적으로는 고려말에 왕이 잠깐 심왕瀋王을 겸한 적이 있는데…….’
성씨마저 다른 과거의 왕조가 이미 멸망한 오랑캐 제국에 예속된 상태로 잠시 겸한 작위가, 가까운 두 세기간 지배하다가 십수 년 전 빼앗겼다는 것 이상의 명분이 되어줄 수는 없다.
“명은 오랑캐를 감당하지 못하여 요동을 잃었고, 조선은 오랑캐를 감당하여 요동을 차지했다면, 하늘과 천하가 곧 조선이 요동을 경영할 자격을 공인하는 셈 아니옵니까?”
“후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올바른 명분이 되어주지 않는다.
“…물론, 명분만이 전부는 아니지요. 두 번째 문제는 실리입니다.”
명분 이상의 명분이 바로 실리다.
그러나, 요동은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불합격이다.
“후금에 점령된 이래로 지금까지 잔혹하게 유린만 되어온 요동입니다. 민생은 붕괴했고 민심은 무너졌지요.”
군벌이나 마찬가지인 후금이 요동에서 후퇴하는 직후, 도적과 반란군이 화수분처럼 양산될 거다.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어그러져, 통치하고자 해도 주춧돌부터 세워야 할 판이지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당장 조선만 해도, 명나라와 비슷한 시기 개국하여 반도를 두 세기 반이나 다스려 왔으나 내부의 이질적인 권력 집단을 축출해 내지 못했다.
토관土官이라고.
토착 세력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예직이다.
세종대왕께서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던 시기 현지의 여진족 권력자들을 회유하고자 특히 양산되었지만, 토관 자체는 조선이 개국하던 시기부터 존재해 왔다.
이들 토관 세력이 축소되는 건 무려 개국 후 300여 년은 지난 영조의 치세로, 그마저도 절반은 남겨졌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유지有志들이 터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이들의 협조 없이는 영토의 안정적인 경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동의 상황은 어떤가?
후금이 강압적인 정책을 강요하며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학살하니, 위아래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자들은 태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오랑캐와 결탁한 앞잡이가 됐다.
후자인 한간漢奸들은 요동의 주인이 바뀌면 살아남을 수 없다.
조선이 요동을 차지한다면 행정단위 이하에서 집단을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토관도 없고…… 아전도 없지.’
당장 군, 현에서 토관과 아전을 배제하면 나랏일 하는 사람은 수령 하나뿐이다.
그런 상태로 개판인 요동을 다스릴 수 있을까?
그냥, 불가능하다.
‘하다 못해 문화권이라도 같았으면 억지를 부릴 만한 구석이 있었을 텐데…….’
문화권도 다르다.
“과연, 이 한계들을 도외시하고 불리한 싸움을 강행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
그러나 이귀는 좌절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무언의 지지를 보내는 중신들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이귀의 호전적이고 충동적인 발언은 뭇매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다들 현실성을 떠나 아쉬운 거다.
전쟁에서 이기고도 마저 몰아붙이지 못하니까.
“요동을 정복해야, 오랑캐 무리를 섬멸할 수 있사옵니다!”
“그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또 무엇이 문제여서 머뭇거리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이귀가 황당하다는 듯이 따졌다.
이렇게 들이밀어도 안 된다, 저렇게 들이밀어도 안 된다 하면서 야욕의 실현을 사방으로 틀어막으니 답답할 만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는가.
“후금을 멸망시켜 우리에게 득될 게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 후금은 아조의 강토를 거듭 침범하였고 이번에는 감히 옥체의 안위마저 노렸사옵니다!”
“그럴 일이 더는 없습니다.”
홍태주가 처한 상황은 이미 말해주었다.
“시일이 흘러 홍태주가 정국을 수습해 내어도, 조선을 다시 노리지는 못할 테지요.”
조선이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간 자신의 권력과 목숨을 유지하는 데만도 벅찼을 홍태주가 이전보다 더욱 강성해졌을 조선을 노릴 수는 없다.
이미 후금의 대조선 위협은 장기적으로도 상실된 상태다.
“반대로, 측간을 다녀온 다음에는 기고만장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 법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이귀가 의문을 표하자 영의정 이원익이 짧게 답해주었다.
“전하께서는 명나라를 거론하셨네.”
그랬다.
고개를 끄덕여 이원익의 첨언을 긍정한 다음, 이귀를 앞세워 여전히 미련을 품은 중신들에게 말했다.
“과연 명나라가 후금이라는 일대의 위협이 해소된 다음에는, 어떤 세력을 위협으로 여기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급부상하여 후금마저 찍어누른 조선이지.
임진왜란 때도 선조가 살려달라며 빌빌대자 조선이 왜와 연합하여 쳐들어오는 게 아닐까 의심부터 했던 명나라다.
두 세기 반이나 이어진 동맹도 못 믿는데, 설마 후금을 물리쳤다고 맹신할까.
“예조판서가 전해온 바로는, 명이 당장 내홍에 부닥쳐 당쟁과 반란으로 온상이 되었다는데 후금마저 꺾은 아조를 상대로 감히 강짜를 놓을 수 있겠사옵니까!”
감히, 라.
이귀가 제법 기고만장한 발언을 했는데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다들 후금을 꺾은 일로 물올랐다는 방증이겠지.
그게 문제였다.
“명나라는 그래도 큰소리칠 놈들입니다. 원래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명나라는 국초부터 조선을 두고 갖은 견제를 해왔다. 그런 과거야 중신으로서 모르는 이는 없을 테고, 미래는 미래에서 온 내가 보장한다.
그때는 명나라가 망한 지 오래였지만, 그 땅 위에 세워진 나라가 사방팔방 얼마나 깝을 치고 다녔던가.
당쟁에 농민반란?
그때 중국도 정치적으로 혼잡해서 계파가 다른 인물들은 마구잡이로 숙청했고, 14억 인구 중 6억 명이 월 17만 원 이하로 살아가는 초극빈층이었다.
당장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것을 중국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부적으로는 잔혹한 인권유린을 펼쳤지만, 그러는 와중이라고 주변국을 향한 폭거가 조금이라도 주춤했던 적은 없다.
원래 이러고 사는 놈들이라는 방증이다.
그래서 이놈들이 깝을 칠 때마다 주제 파악을 시켜주는 존재가 국제적으로 필요했는데, 지금은 후금이 그런 존재다.
“처음에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려야겠습니다. 후금이 격퇴된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은 진화하였으나 아직 우리의 가장 강대한 적은 건재합니다.”
“후금보다 더 위험한 적이 있다는 말이옵니까?”
이귀는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치부하다가, 떠오른 후보가 있었는지 조금 진지해져서 물었다.
“설마 왜矮를 이르시옵니까?”
“그치들도 강대한 적이기는 하지요.”
나쁜 추측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강대한 적은 따로 있습니다.”
“……?”
“불리한 싸움을 쉬이 각오하지 못하고, 요동을 정복하지 못하며, 정복하더라도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불가능하고, 또 명나라가 반환을 요청한다면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도 다 그 강대한 적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용상에 가까이 선 경험 많고 품계 높은 대신들은 내가 말한 ‘가장 강대한 적’의 실체를 가늠한 듯 보였다.
“모르시겠습니까? 이 나라의 빈약한 내실이, 나와 그대들의 가장 강대한 적입니다.”
어찌하여 조선에서 실질적으로 전투력을 갖춘 부대의 정원이 도합하여 3만에 불과한가.
왜 요동을 점령한 다음에는 유지하기 어렵고, 명나라의 억지를 거부하기 어려운가?
다 내실이 부족해서다.
대단한 후금의 대단한 침공을 저지해 낸 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지 한 단락에 불과하다.
내가 숙원을 달성하고 후금이 찌그러졌다고 해서 나의 왕업이 그치거나 이 나라의 경영이 종결되지는 않았으니까.
이원익을 영입하면서 천명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야망은 내가 만족할 만큼 성취되지 않았다. 성취되었다면, 진즉 요동을 평정하고 홍태주를 용상 앞에 꿇려 발받침으로 쓰고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