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0화
홍태주는 아파태에게 수도를 빼앗겼다.
나아가 아파태는 전임 한의 적자인 도르곤을 추대했으니, 서자로서 찬탈을 일으킨 홍태주의 권위는 풍전등화 신세에 처해버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병이 물었다.
홍태주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만 쓸어내렸다.
정답은 분명했다. 선양을 탈환하고 도르곤과 아파태의 세력을 모조리 참살하면 된다.
하지만 패전하고 귀로에 오른 군대의 사기가 바닥이었다.
전의가 사라진 건 물론이고, 홍태주 그를 향한 지휘 능력을 향한 의구심이 퍼지면서 군율마저 흔들리는 중이었다.
이러한 마당에 수도를 상대로 공성전까지 펼치려 들었다간, 군대는 파도 맞은 모래성처럼 붕괴해버릴 터였다.
“……물러난다.”
홍태주는 입술을 씹었다.
대안이 없었다.
친병이 무언으로 눈빛을 보냈다. 어디로 물러나냐는 의미다.
홍태주는 내심 새로운 거점을 물색했다.
처음 떠오른 후보는 대금大金의 정신적 수도인 혁도아랍이었다.
그러나, 대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지 못했던 시절 수도로 돌아가는 퇴행의 천명과 같다.
중원을 잃고 대초원으로 밀려난 북원 잔당들이 호시절의 원 제국과 동일하게 여겨지던가?
아파태가 선양을 차지했기 때문에 요동을 더욱 의식할 수밖에 없다. 혁도아랍으로 물러나면 요동은 온전히 아파태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요양으로 간다.”
홍태주는 선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수도를 낙점했다.
* * *
요양은 수 년 전 명군이 지척까지 진출하여 공방전을 일으키자 주민들이 내응하여 소요사태를 일으킨 전적이 있다.
당시 후금군은 명군과 혈전을 벌인 직후여서 흥분과 분노가 가시지 않은 채로 난동을 진압해야 했다.
그러니 요양에서 대학살이 벌어진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누르하치나 진압을 맡았던 대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혼란한 와중 번진 불이 무수한 구획을 집어삼켰고, 숨어있던 주민들은 화마를 피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흥분한 후금군은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명나라인들을 굳이 폭도와 폭도가 아닌 자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요양은 항거에 대한 보복으로 몰살당한 안산보다 더욱 참혹한 지경이 되었다.
골목들이 피로 잠기고 시체들은 산을 쌓는 와중 도외시된 화재는 더욱 많은 구획을 집어삼켰다.
결국 후금군과 죽다 살아난 명나라인 모두 요양을 빠져나갔고, 한때 요동에서 가장 번화하고 인구도 많았던 대도시는 거대한 화장터가 되어 사흘 밤낮으로 잿가루를 흩날렸다.
그래서 요양으로 귀환한 홍태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음에도 요양은 그새 사람이 사는 구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전 같은 번화함은 사라졌으나 한때 폐허만이 남았던 자리에는 새로 지은 집들이 들어섰으며, 넓어진 거리에서는 행인들이 후금군의 귀환을 맞아 떨며 부복했다.
홍태주는 그들 사이로 행차하며 오래된 추억을 떠올렸다.
그의 부친이자 옛 대금의 한, 누르하치가 언젠가 지나가듯이 말했었다.
명나라인들은 해충과 같아서 빠르게 적응하고 번식한다고.
과연 그러했다.
죽여 없애야 할 때는 번거로운 습성이었으나, 가축으로서는 대단한 장점이었다. 불탄 외양간을 알아서 고쳐놓고 주인의 귀환을 맞이하는 꼴이라니.
요양이 수도로 기능하던 시절 왕궁으로서 세워진 동경성東京城은 석벽이 그을린 것을 제하고는 멀쩡한 상태였다.
홍태주는 그간 누르하치 외에는 누구도 앉아본 적 없었던 용상에 올라 신하들에게 명했다.
“군사부터 다시 조련해야 하니 그대들은 식량과 장정을 징발하고 군율을 엄히 단속하라.”
홍태주는 단속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군대는 패전 후 귀로에 올랐으나 선양에 다다르고도 입성하지 못한 채 옛 수도로 왔다.
군사들에게는 의문스러운 행보였다.
그러나, 참칭자에게 수도를 점거당하고도 맞서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을 공포할 수도 없는 노릇.
신하와 장수들은 입단속 하였으나 말단에서는 호기심만 더욱 증폭하여 군중에서는 갖은 추측과 의심이 난무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군법의 집행도 주저하지 말라.”
홍태주가 거듭 강조했다.
애초에 후금군은 군법의 집행을 꺼리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거론한다는 건, 일부러라도 많이 집행하라는 뜻이다.
분명,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많은 수급이 장대에 걸리리라.
* * *
노을이 저물고 요양에는 어둑하게 그늘이 내려앉았다.
구름이 많은 밤이었다.
홍태주와 후금군의 입성, 그리고 이어진 조치를 목도한 주민들은 저마다 결심한 얼굴로 거리에 나왔다.
많은 사람이 많은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으나 괜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동경성은 팔기가 성벽 안팎으로 주둔하여 내란을 일으키기란 요원한 상태였다.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힌 주민들은 대신 또 한 번 요양을 탈출하기로 했다.
요양성의 각 성문은 통금을 맞아 굳게 닫혔으나, 주변을 둘러싼 성벽까지 동경성처럼 철통같이 지켜지지는 않고 있었다.
요양성의 주민들은 마치 들춰진 성벽 아래 벌레들처럼 각자가 점지한 성벽을 향해 흩어졌다. 그러나 군중 모두가 소리소문없이 성을 탈출할 수는 없었다.
금세 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요양성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분주한 발소리가 뒤섞였고, 고함과 재촉이 여기저기서 터졌으며, 탈출하던 주민들은 각오한 얼굴로 저마다의 품에서 부엌칼과 낫을 꺼냈다.
혼돈이 재현됐다.
학대받은 자들과 착취하려는 자들이 어둠 속에서 뒤섞였다.
홍태주는 동요하는 요양의 민심을 감지하고 있었다. 팔기가 압록강에서 실추된 악명을 되찾겠다는 듯 군마를 타고 거리를 질주했다. 말발굽이 도망치는 인영들을 짓밟았다.
소동은 금세 진정됐다.
거리로 나왔던 자들은 빠르게 도망쳤거나 빠르게 죽었다.
거리에 적막이 내려앉자 팔기는 시체와 토막을 묶어 말에 매달았고 살점과 파편은 주워 자루에 담았다.
흩뿌려진 핏자국에는 모래를 뿌리고 긁어서 닦아냈다.
청소란 본디 노예의 업무에 가까웠으나 팔기는 두말없이 한의 지시를 이행했다. 팔기 중에서도 목이 매달리고 참수된 자가 많았다.
각고의 노력을 다해 팔기는 지붕마다 여명이 스며들기 전 요양을 깔끔하게 청소해냈다.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거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간밤에 벌어진 일의 흔적이 조금씩은 남았으나, 외면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외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요양은 밤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아침을 맞았다.
인구는 다소 줄어든 채였다.
뜬 눈으로 보고받던 홍태주는 민심이 진정되었다는 친병의 전언에 비척거리며 침소로 향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으나 거론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홍태주는 이러한 어색한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할지 자신할 수 없었다. 북쪽에는 참칭자와 반란군이 수도를 점거한 채로 자신을 대비하고 있을 터였다.
또한, 남쪽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한 조선이 어떤 보복을 가해올지 몰랐다.
그들이 강을 건너오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홍태주가 몇 번 마주해 본 조선의 왕은 그저 침공을 격퇴한 것으로만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동편에서는 소집했던 야인여진이 조선군의 분전으로 금세 와해되었다고 했다. 전력을 보전한 채 물러난 그들이 패전과 분열을 맞아 취약해진 대금의 변경을 가만히 내버려 둘지 의문이었다.
나아가 서편에서도 전쟁의 경과를 접한 명나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미지수였다. 그들은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다.
대금이 처한 상황을 의식한 홍태주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는 한참을 뒤척이며 답답한 호흡을 몰아쉰 다음에야 지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조선이 승전과 함께 홍태주의 몰락을 각지에 포고하고 여진족 유민들을 의주부에서 규합하던 와중이었다.
* * *
승전의 기쁨도 잦아들고 일상으로 돌아온 한양에서는 논쟁이 조금씩 일어났다.
관리와 유생들의 화제는 단연 나라의 내실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였다.
논의는 위나 아래를 구분하지 않아 아래에서는 얼큰하게 취한 호사가들이 갓을 삐딱하게 쓴 채 저 좋을 대로 국정을 토론하고 평가했으나, 기실 조정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에서도 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내실이 무엇입니까.”
좌의정 박홍구가 새삼스러운 질문으로 의논을 시작했다.
“내실은 곧 기반입니다. 나라의 기반은 곧 세입이지요. 즉, 나라의 내실을 든든히 다진다고 함은 세입을 든든히 확보하는 것입니다.”
뻔한 소리였으므로 영의정 이원익과 우의정 이상의는 침묵으로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박홍구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물리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민생이 황폐해지면, 장차 세입은 더 줄어들 것이니 밑돌을 빼서 윗돌을 괴겠다는 발상이지요.”
이원익이 작게 끄덕였다.
조선은 백성들이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물론, 국가의 운영이란 미덕만 지킨다고 잘 풀리는 건 아니어서 그간 갖은 잡세가 양산되어왔다.
그것을 금상의 즉위와 함께 선혜법으로 통일해 확대하는 중이었으므로, 조세를 강화하여 세수를 벌충하는 건 미덕에도 부합하지 않거니와 나랏일까지 복잡해진다.
그야말로 하책.
“상책은 무엇이겠소?”
이원익의 물음에 밑밥만을 깔아온 박홍구가 본론을 꺼냈다.
“호패號牌입니다.”
“……허어어.”
이상의가 반사적으로 탄식했다.
호패는 조선 시대의 주민등록증이다.
역사상 호패가 거론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재차 시행이 논의되는 건 그간 무수히 좌절되었다는 뜻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호패다.
그러한 사정은 박홍구도 알고 있다는 듯, 달리 반응하지 않고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고을의 호구단자戶口單子가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은 단자들도 태반은 갱신이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음.”
“그런데 왜란 와중에는 무수한 피난민이 발생했고, 각지에 다시 정착했지요. 기존에 작성한 호구단자도 땔감 외에는 쓸모가 없는 지경입니다.”
여러 사람이 끄덕였다. 의정부 관리 중 수령 한 번 지내보지 못한 이는 없었다.
“과세도 인적이 파악되어야 가능한데 각 고을에서는 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연 과세가 올바르게 이행될 리 없지요.”
“그러니 호패법을 시행하여 현황을 파악하자는 말씀이구려.”
“백성들에게 호패를 지참하게 하면, 호패를 발급하면서 완성도 높은 호구조사를 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좌상의 말씀은 합당하나 호패법은 그간 몇 번이고 시행되었으나 금세 혁파되었소이다.”
모두가 예견했던 지적에 박홍구가 답했다.
“그래서, 호패법 시행 안 하실 겁니까?”
“…….”
이익이 많은 호패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럼에도 거듭해서 시행을 논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올바른 과세 외에도, 인적을 파악하는 건 군역의 부과나 여타 정책의 시행에서도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국초부터 시행을 시도해왔고, 거듭된 좌절에도 재차 거론되는 게 아니겠는가.
설사 이번에도 또 좌절되어도 또 시행이 논의될 호패법이다.
박홍구가 느긋하게 말했다.
“이견이 없다면, 전하께 상주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