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1화
후금과의 결전을 앞두었던 시점에서.
경기와 충청의 천민 속오군이 수방사에 편입되며, 광주부廣州府 의곡면儀谷面 외곽의 한 백정마을에서 살아가던 사내 김복동은 한양으로 상경했다.
한양에서 수방사 초관哨官은 집결한 천민 속오군들 앞에서 공표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나라에서 소작세 없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나눠준다고 하였다.
김복동은 여느 속오군들처럼 반신반의했다.
굳이 분간하자면, 믿음보다는 불신이 더 강했다.
사람을 사지로 몰아내기로 한 마당에 고작 빈말 몇 마디인들 못 할까?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자도 있었고, 흰소리로 치부하여 뒤에서 침을 뱉는 자도 있었으나 김복동은 그러려니 하고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종군에 거부권 따위 없었으니까.
정말로 땅을 준다면야 고맙겠지만, 그보다는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민 속오군의 십중팔구가 거진 그러한 마음이었다.
그로부터 시일이 흘렀다.
거듭된 조련으로 군중에서의 생활이 그런대로 익숙해졌을 무렵 여진족 오랑캐들이 끝내 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복동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적의 기병 일부가 전장을 우회해 곧장 한양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전언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김복동은 전우들과 함께 전장에 섰다.
천민 속오군의 역할은 수방사 병사들 앞에서 일차적으로 저지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적의 기마 돌진에 취약한 선형진을 갖춤으로써, 적 기마의 돌진을 유도하고 후방의 수방사가 펼친 진형으로 돌입을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동고동락한 초관은 애써 싸우려 하지 말고, 그저 살아남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교전이 있었다.
김복동은 초관의 당부를 수행해 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질주해온 오랑캐가 지척에 이르자 김복동은 창을 내질렀다. 손끝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는 찰나, 김복동은 창대를 붙잡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일순 시야가 요란하게 급변하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순간 멍석말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충격이 몸 여기저기를 강타했다.
소동이 끝나고 혼미한 정신으로 일어서니 붙들고 있던 창은 토막 난 채였고, 오랑캐들은 수방사가 뿜어낸 연기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김복동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모두가 그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는 건 금세 깨달았다. 수많은 전우가 더는 서 있지 못했다.
김복동은 일생 최대의 위험에서 일생 최대의 행운이 발휘된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큰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 * *
현재로 돌아와서.
김복동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떨지 말게. 벌이라도 주려고 데려온 게 아닐세.”
“에, 예. 예에…….”
김복동은 꼴깍 침을 삼켰다. 정신이 혼미해 자신이 말을 더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사태의 시작은 약간의 불운이었다.
김복동은 파루罷漏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바깥의 바람이 제법 상쾌했으므로, 그는 인적 드문 새벽의 한양을 즐기고자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딱히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방황하는데 문득 마주 오는 두 무관이 있어 피했다. 그러나 두 무관은 김복동에게 똑바로 다가와 말했다.
‘시간 좀 내어주겠나?’
무관들의 인상이 매우 험악했으므로 김복동은 살기 위해서라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끌려가면서 이어질 위기를 걱정했는데…… 나라님 계시는 왕궁으로 올 줄이야!
왕은 여전히 떠는 김복동에게 웃어주었다.
“단 거라도 먹는 게 좋겠군.”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왕이 과자를 내밀었다.
김복동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게 왕이 먹는 음식인 걸까.
두려운 와중에도 치미는 호기심에 김복동은 조심스럽게 과자를 받아들였다.
“눈치 보지 말고 드시게.”
“예, 예!”
왕이 권하자, 김복동은 두 손으로 받쳐 들었던 과자를 넣었다. 고물이 바삭하게 터지더니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진한 단맛이 퍼졌다. 실로 별천지의 음식이었다.
“……!”
김복동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왕은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어, 과자 상자를 통째로 내밀었다.
“가져가시게.”
“쇠, 쇤네가 어찌 감히.”
“내가 권하는데 사양하는 건 감히가 아니란 말인가?”
왕은 하하 웃고는 상자를 더 밀어냈다.
“가져가게.”
“예, 예에…… 망극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좋은 선물을 받아서인지, 김복동은 여전히 긴장한 채였으나 두려움은 가신 뒤였다.
왕은 부담을 덜어주는 건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겼다.
“내가 그대를 부른 건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시네.”
“말씀… 말씀하시지요.”
“호패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
“……예.”
“무엇인지도 알고 있나?”
“예.”
김복동은 꼴깍 침을 삼켰고, 왕은 여전히 부드러운 낯으로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호패가 뭔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더 쉬워지겠군. 그대는 호패를 어떻게 생각하나?”
“…….”
“솔직하게 말해주게. 그래야 자네를 불러온 의미가 있으니까. 정제된 의견을 듣고 싶었다면 신하들에게 물어봐도 그만이야.”
하지만 호패법에 대한 평가야 왕도 익히 알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호패법이 매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세. 무려 이백 년도 더 전에 호패법을 시행했었다면, 믿겨지는가?”
김복동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백 년 전이란 그에게 상상조차 어려운 까마득한 과거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무려 이백 년 전부터 호패법을 시행하려 했는데, 어째서 이어지지 못하고 또 시행을 논의하는 걸까.”
과거 몇 번이고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역사가 증명하는 건, 왕과 신하들만 모여 백날을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세.”
금상은 같은 절차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변화를 주었다. 도입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왕과 신하들이 가진 정책에 대한 이해도란 어디까지나 적용하는 입장에서다.
만약, 정책이 적용되는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런 취지로 왕은 위사들을 시켜 거리에서 ‘아무나’ 양해를 구해 데려오도록 했다. 백성으로서 호패법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서였다.
김복동이 그 아무나에 우연히 걸려든 것이다.
“그러니 말해주게. 위정자의 몰이해로 불필요하게 정책을 남발하고 취소하거나, 민생에 폐만 끼치는 실정을 벌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왕의 말에 김복동은 잠시 고민했다.
웃전을 상대할 때, 솔직함이라는 미덕은 보통 해악처럼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다들 솔직하게 말해보라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김복동은 입 안에 남은 은은한 단맛을 느끼며 어쩌면 나라님이라면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십여 년 전에 동리가 호패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사온데…….”
과연 광해군 즉위 초반에 3년 정도 호패법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왕은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끄덕였다.
“동네 노인들의 불만이 많았사옵니다. 값을 내고서 발급받은 호패를 읍치의 양민들이 헐값에 팔기를 강요한다거나…….”
“호패를 사고 팔았다는 말인가.”
“피역하기 위해 천민의 호패를 사거나 위조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왕의 미간이 일순 일그러졌다가, 금세 펴졌다.
“계속 말해 보게.”
“절도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쓰거나, 팔기 위해서겠군.”
“예. 그러면 호패를 다시 발급 받아야 하는데, 동헌의 아전들이 귀찮게 군다며 호패 값을 배로 불러대었습니다.”
호패를 제작하는 데는 재료와 품이 들어가므로 그 비용을 청구할 수는 있다.
미래에서도 무언가를 발급 받으려면 잔돈을 내니까.
그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아전이 제멋대로 값을 매긴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그런 행동을 보아 평소 호패 값도 적정하게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가 심각했군.”
“예…….”
김복동은 침을 삼키고는 마저 말했다.
“그런 문제들이 없더라도 외출할 때는 호패를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는데 매우 번거로웠고, 혹여 깜빡 잊었다가 적발당하면 벌금을 내거나 매를 맞아야 했는데 어느 쪽도 고역이었습니다.”
“그랬겠군.”
“게다가 천민들은 잡목으로만 호패를 만들게 해서, 동리 어른들이 재산을 쌓아도 하등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요.”
가까스로 말을 매듭지은 김복동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신분은 민감한 문제니까. 천민이 어딜 건방지게 재산을 과시하려 드냐고 한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조금만 깔끔한 옷을 입고 외출해도 듣는 소리였으니까.
“그랬군.”
김복동은 나라님의 입이 열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윤음은 너그러웠다.
“자네와 동리 어른들이 마음고생이 많았겠어. 장차 같은 대우를 받게 될 어린 것들을 보아도 기분이 편치 않았을 테고.”
김복동은 일순 울컥했다가, 나라님 앞에서 엉엉 울 수는 없어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예에.”
“양민들이 못되게 굴었겠지만 그들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게. 다 양반들이 배움이 부족했던 탓이니.”
“…?”
“양민들이 누구를 보고 배워서 자네들에게 못되게 굴었겠나. 아이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워 따라하듯이, 모범이 되어야 했을 자들이 도리어 못된 모습을 보여주었겠지. 아닌가?”
“맞습니다요.”
복동은 왜 왕이 양반들을 책망하나 싶었지만,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
양민들은 평소 양반들에게 얼마나 당했겠는가.
그게 억울하다고 저들보다 신분이 낮은 천민들에게 똑같이 못되게 구는 것이었다.
“내가 진즉 자네들의 고충을 알았어야 했는데 오랑캐들이 개지랄을 떨어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네.”
김복동은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왕은 물어볼 기회를 주지 않고 마저 일렀다.
“많이 놀랐을 텐데 솔직하게 답해주어서 고맙네.”
“아, 아닙니다요.”
“호패법의 시행을 관두지는 못할 거야. 나라가 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말일세. 하지만 모두가 좋자고 시행하는 정책인데 도리어 억울해지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 내, 최대한 고충이 덜하도록 애써보겠네.”
“가, 감사합니다요…….”
복동은 그저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나라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하셨네. 이만 돌아가보시게.”
“예….”
다시 정신이 없어진 김복동은 물러나려다, 왕이 챙겨준 과자상자를 감사히 받아들고서 물러났다.
그가 밖에서 내시와 위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퇴궐할 동안 왕은 아무도 없을 자리에서 가만히 일렀다.
“영상.”
그러자, 꾹 닫혀 있던 문간 너머에서 이원익이 답했다.
“예, 전하.”
“잘 들으셨습니까.”
“뼈에 새겨두었사옵니다.”
“내가 보아하니 백성들이 호패를 싫어하는 건 법이 엄격하고 아전이 멋대로 정한 비싼 값을 내야하며, 절도와 위조가 빈번한 데다 역을 지게 되기 때문인 듯합니다.”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어떤 문제는 어쩔 수 없겠지만, 또 어떤 문제는 마당히 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참작하여 기존의 법령을 정비해 올리세요. 내가 살펴본 다음 합당하다면 시행하겠습니다.”
“받들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