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2화
왕궁을 오갔던 김복동은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그가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나, 제 찢어진 손바닥을 봐주는 세자에게 왕궁에서 받은 과자 상자를 바쳤다가 그만 사연이 알려지고 말았다.
세간에 호패법 시행이 논의되고 있음이 알려진 계기였다.
한양 안팎으로 풍문을 접한 사람들은 호패법을 두고 어떻다, 저떻다 떠들어대었다.
개국이래 두 세기 반이 넘는 장대한 세월 시행과 철폐가 반복되었던 이 제도는 대취한 호사가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안주와 같았다.
“이만하면 호패법은 포기하는 게 맞지 않나?”
“실리가 분명하거늘, 어떻게 묻어두고만 있겠나.”
“이미 여러 열성께서 시도하고도 거듭 무산된 정책일세. 결과가 빤히 정해져 있는데 왜 거두지 못할 실리에 집착하냐는 거지.”
식자들의 여론은 각기 실리와 역사를 근거로 찬반이 팽팽했다면, 양민들은 반발과 불평 일변도였다.
이미 광해군 시절 잠시 시행된 호패법이 반감만 낳은 탓이다.
“또 호패란 말인가?”
“이번에는 아전 놈들이 호패값을 얼마나 받아 처먹을는지…….”
“이번 나라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어허.”
반발을 그나마 억누르는 게 왕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같은 호패법이라도, 광해군이 시행한 것과 금상이 시행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한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책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동안, 왕과 조정의 중신들은 여론을 유심히 주시했다.
찬반하는 의견 자체는 별 의미가 없었다. 시행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
다만 정책의 반감이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의견이라면, 응당 경청할 만했다.
특히 영의정 이원익은 정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친인척까지 동원해 여론을 취합했다.
이는 처음 호패법을 발의한 좌의정 박홍구나, 우의정 이상의 이하 의정부 당상들도 다르지 않았다.
호패법은 내실을 다지기 위한 나라의 백년대계였으므로.
그래서 논공행상을 마친 중앙군의 변화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원래 무관들의 사정은 경관들의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지만.
과거 엄살을 부리며 도원수직을 내려놓았던 장만은, 이번에도 전쟁의 뒷수습을 마친 뒤 수방사 원수직에서 사직했다.
왕은 명예직인 판중추부사를 권했으나 장만은 공손하게 사양했다.
여생은 적막하게 마치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했다. 늘그막에 고생을 너무 몰아서 한지라 공무라면 물릴 지경이라고 툴툴거렸다.
공석이 된 수방사 원수 자리는 장만의 후임을 이미 지냈던 김충선이 도맡게 되었다.
원수들의 수장으로 유사시 전군의 군권을 통솔할 수 있는 도원수에서 일개 원수로 권한이 축소된 셈이었으나, 수방사 원수라면 다르다.
수방사는 왕이 기거하는 한양을 수비하는 부대니까.
김충선이 도원수에 제수될 때 출신을 문제 삼았던 여론이 다소 있었던 데 반해, 이번에는 더 민감한 역할을 맡게 되었음에도 잡음은 없었다. 괄목할 발전이었다.
그렇게 비게 된 도원수 자리는 정충신이 맡았다.
그가 세운 군공에 비하면 진급이 다소 느리긴 했으나, 경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파격적인 속도였다.
금상이 즉위할 때만 해도 일개 첨절제사에 지나지 않았던 정충신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이견은 없었다.
명나라 해적들을 한 차례, 후금의 팔기군을 두 차례 북방에서 맞아 모조리 압승을 거둬낸 정충신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적임자일까.
아무튼,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각자 필요했던 보상을 받았다.
누군가는 은퇴를, 또 누군가는 신뢰를, 또 누군가는 영전을…….
그러나 모두가 ‘제때’ 합당한 보상을 받은 건 아니었다.
* * *
“……아버지.”
한윤은 손끝으로 비석에 음각된 한자를 훑었다.
-韓明璉(한명련)
생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분전하여 후금의 조공을 격퇴한 공로로 새로운 수식어를 받았다.
-贈 兵曹判書(증 병조판서)
직접 추증의 소식을 전한 남병사가 위로했다.
자네 부친의 출신으로 판서까지 오른 사람은 전례가 없다고.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관직이야 무슨 소용인가?
한윤에게 부친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면 더 큰일을 해낼 수 있었을 사람이었다.
“…….”
비석에서 손끝이 멀어지고, 한윤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통곡 끝에 지쳐 쓰러지기를 거듭하였으나, 한윤은 여전히 비석을 마주할 때마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원치 않게 부친의 전사를 알게 되었을 때 한윤은 후금의 멸망과 홍태주의 처단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하지만 조정은 역습을 꾸미지 않았다.
임시로나마 군직을 맡아 복수를 기도했던 한윤은 비통한 마음으로 갑주 대신 참최복斬衰服을 걸치고, 칼 대신 상장喪杖을 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한이 되었다.
“…….”
한윤은 문득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원색의 철릭을 걸친 사내가 헉헉거리며 등장했다.
한윤을 마주한 그는 안도한 낯으로 이마의 구슬땀을 훔쳐내곤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형원泂源이오?”
“……그렇소만.”
“어휴!”
사내는 탄식하곤 웃었다. 막 눈시울 붉히던 한윤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니었다. 참최복 입은 사람에게 소개도 없이 무턱대고 신상부터 캐묻다니.
그런 감정이 한윤의 얼굴에서 드러났는지, 불청객은 서둘러 덧붙였다.
“주상전하의 전언을 가져왔소!”
“……선전관이요?”
“그렇게 되었소이다.”
선전관은 어색하게 웃고는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한윤이 왕명을 받들기 위해 꿇은 무릎을 돌리자 선전관이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교지를 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참최복 입은 사람을 내 앞에 꿇리고 싶지도 않으니 편하게 받으시오. 편하게.”
한윤은 코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선전관이 전한 서찰을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왕의 전언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위로일까?’
확인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도 왕의 말씀을 받드는 것인 만큼, 한윤은 먼저 저 멀리 남쪽에 계실 왕에게 사배를 올렸다.
군사를 몰아 요동을 치지 않았다고 유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 시운을 책망할 뿐.
담담하게 예의를 갖춘 한윤이 봉투를 개봉하고 서찰을 꺼내 펼쳤다.
-먼저, 무탈하기를 바란다. 남병사의 장계를 받고 많이 근심했다. 무엇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 터이니 긴말은 삼가겠다.
전언이라더니 과연 서찰은 첫머리부터 범인이 보낸 편지처럼 중구난방이었다.
한윤은 그런 중구난방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왕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가벼이 위로하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운 말이 큰 위로로 다가왔다.
-사직하면서 크게 비통해했다고 들었다. 여전히 원수 갚기를 소망하느냐? 아니면 시묘살이를 다하고자 하느냐.
두말할 것 없는 질문이었다.
한윤이 시묘살이를 시작한 건 오롯이 복수가 요원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어찌 무기력하게 묘 앞에서 통곡만을 하겠나.
왕의 서찰은 이어졌다.
-조정에서는 홍적을 벌하기로 결의했다. 자네가 바란 방식은 아니겠으나, 뒤늦게 알게 된다면 회한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왕의 추측이 옳았다. 홍적을 벌하겠다는 말에, 깊게 가라앉았던 한윤의 복수심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으니까.
서찰도 어느새 마지막 구절에 다다라 있었다.
-과인은 공신에게 다해주지 못한 총애가 회한으로 남았다. 자네는 그런 회한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여 전언했다. 의향이 있으면 선전관과 함께 상경하라. 대업에 일익을 맡기겠다.
한윤은 눈을 감고서 콧바람을 크게 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에 묵었던 호흡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다시 눈을 뜬 한윤은 공손하게 서찰을 접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낯을 반사하는 비석을 마주했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 부친이 있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랐을까.
홍태주는 작게는 한윤 한 사람의 원수였으며 크게는 나라의 원수였다. 놈에게 벌을 내릴 호기가 찾아왔는데 시묘살이를 다하겠다며 호기를 놓아주고 세월만 죽이는 건 부친의 방식이 아니었다.
비석에 비친 한윤의 낯이 단호한 결의로 물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한윤은 서찰을 내려놓고서, 자신의 여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씨 섞인 잿가루가 담긴 화로를 묘비 앞으로 가져왔다. 서찰을 놓으니 금세 불이 붙어 이글거리는 화염이 서찰을 검게 태워갔다.
왕이 보낸 소소한 서찰은 확인 후 태워 없애는 게 원칙이다.
한윤은 꼭 원칙을 지킬 의도만으로 서찰을 태운 건 아니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의 유품과 옷가지를 태운다. 물품을 현세에서 불사름으로써, 저승에 있을 주인에게 닿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윤은 왕이 자신을 생각해 보낸 서찰이 부친에게 닿기를 바랐다.
못난 자식이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의지를 전하기 위해서.
또한, 자신이 실패하여 부친을 뒤따르게 되어도 혼내거나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화로에 놓여 검게 탄 서찰이, 문득 바람을 맞아 비석까지 날아올랐다.
자신의 의지가 부친에게 닿은 걸까?
한윤은 물러난다는 의미로 비석 앞에서 절을 올린 뒤, 상장喪杖을 무릎으로 쳐 부러뜨렸다.
탈상脫喪의 의식을 마친 한윤이 비석을 등졌다.
“갑시다.”
* * *
“거처를 옮겼는데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으냐?”
봉림대군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있다.
나의 개입으로, 원래 역사에서는 왕이 되었던 사람이 만년 대군으로 살게 되었으니까.
“불편하지 않사옵니다.”
“그래?”
봉림대군이 품에 안기며 말했다.
“소자는 아바마마, 어마마마와 함께 살게 되어 기쁘옵니다.”
미래로 치면 초등학교 저학년인 봉림대군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멀어진 왕좌를 아쉬워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 네가 기쁘다니 나도 기쁘구나.”
찹쌀떡 같은 봉림대군의 볼을 쥐니 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미련해지지는 않기로 했다. 후계는 굳어졌고, 선심 쓴다고 왕좌에 두 명이 앉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게 가능했어도 그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버지가 그리도 좋으냐?”
중전이 인평대군을 안은 채로 묻자, 봉림대군은 그저 작게 고개만 끄덕,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반대쪽 볼도 붙잡았다.
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
너무 즐긴 탓인지 봉림대군이 고개를 돌려 피했다.
“전하.”
밖에서 최 상선이 불렀다.
중전의 안색이 굳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지는 조금 되었지만, 막상 전쟁 때문에 가족만의 살가운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쉬워하는 봉림대군을 억지로 떼어놓고 나오니, 최 상선이 평소보다 깊게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한윤이 입궐을 청했사옵니다.”
생각보다도 방문이 빨랐다. 그만큼 열의는 충분하다고 봐야겠지.
더 좋다. 중전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주 금방 돌아오지는 못할 것 같다.
“편전으로 가 있겠습니다. 반 각 뒤에 입궐시키세요.”
“예.”
먼저 편전으로 와 기다리고 있으니 곧 한윤이 매서운 기세로 등장했다.
생각보다 마른 사람이었다.
“서찰은 읽어보셨는가.”
“신에게 일익을 맡겨주신다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아니면, 살이 많이 빠졌을 뿐인가.
얼굴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 독기가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너무 날카로운 물건은 보기만 해도 섬찟하게 마련이다.
한윤의 기세가 그랬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네.’
대비가 처음에는 꼭 저랬지.
그랬던 대비도, 광해군과 폐세자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정명공주가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달라졌다.
그것이 대비가 변화한 계기다.
한윤에게 필요한 것 역시 그러했다.
나는 분전해준 한명련을 위한 보상으로, 아들인 한윤에게 미련을 떨칠 기회를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