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3화
얼굴은 퀭한 와중에도 나를 마주 보는 눈길은 형형했다.
위로를 거의 받지 못한 모습이다. 그동안 조용히, 얼마나 독기를 쌓아왔을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들게.”
“…….”
“나는 신하가 편전을 방문하면 항상 과자를 나눠주는 편이지. 병조판서도 몇 번은 얻어먹었네.”
부친 또한 그랬다는 말에 한윤이 조심스럽게 과자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입 물고는 금세 눈물이 고여,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불안해 보이는군.”
한윤은 소매로 눈가를 쓸어냈다.
“아니옵니다. 맡겨주십시오.”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지금쯤이면 홍태주도 감정적으로 아주 불안하겠지. 정예군만 아니라 화살받이로 쓸만한 병력도 모조리 잃어버렸으니까.”
“…….”
“그러나 대업을 맡으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네. 때로는 투지를 불태워야 할 때도 있지만, 과도하면 판단을 그르치게 되지. 자네는 정녕 냉정한가?”
한윤이 섣불리 답하기 전에 덧붙였다.
“나는 자네에게 홍적을 벌할 기회를 나눠주려고 부른 거야.”
그러자 한윤도 깨달은 게 있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서 답했다.
“……예. 침착하다고는 못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어느 자식이 부친의 원수를 맞아 냉정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냉정해야 한다 해도, 그러지 못하겠는가?”
“……아닙니다. 진정하겠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군. 정말로 그렇던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게.”
과자를 내밀자 한윤은 조금 멋쩍어하며 받아들였다.
나는 다시 한윤에게 기분이 좋아졌는지를 물었고, 그는 재차 확신 없이 답했다.
그래서 다시 과자를 먹여주니 한윤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예, 기분이 좋아졌사옵니다.”
“하하하……!”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이나 해, 라는 식이다.
하지만 한윤이 민망해하는 만큼 애처로운 기색도 줄어들었으니 그저 얄궂기만 한 장난은 아니었다.
나는 기분을 더 풀어주기 위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찰에서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네만, 혹 내가 홍적에게 어떤 벌을 내리려는지 알고 있으신가?”
“알지 못하옵니다. 알려주시옵소서.”
한윤이 눈을 빛냈다. 관심이 아주 많겠지.
“홍적의 죄과와 몰락을 만천하에 알리고, 변경을 어지럽히는 여진족 유민들을 무장시켜 요동으로 보낼 걸세.”
“…처벌이 다소 약한 듯하옵니다.”
“이건 품은 적게 들이면서 홍적을 지옥에 빠뜨리는 방법일세. 생각해 보게. 그는 노적을 베어가면서까지 찬탈했어.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한윤은 한참을 생각했다. 머리가 굳은 무인인 탓일까.
“정답은 복잡하지 않다네. 홍적이 찬탈한 직후 벌인 일이 있지.”
“……아조를 침략하기 위해서이옵니까.”
“그렇지. 하지만 홍적은 찬탈까지 일으켜가며 벌인 일에 실패했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뒤따르는 법이지. 실패한다면 더욱 그렇다네. 침략에 실패한 찬탈자가 오랑캐들 사이에서 인정받을까?”
“인정받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약, 오랑캐들이 저들의 주인이 무능하고 유약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행동할까.”
“……난을 일으킬 것이옵니다.”
좋아, 잘 따라오고 있군.
조정의 중신들처럼 잔머리가 뛰어나 상념을 빠르게 쫓아오지는 못해도 직접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어쩌면 이미 난이 벌어졌을 수도 있지. 오랑캐들이 자중지란이 빠지는 것일세. 내가 하려는 일은, 거기에 약간의 부채질을 해주는 것이지.”
한윤의 얼굴에 감명이 스쳤다.
“군사를 몰아 요동을 평정하는 것보다는 박력이 덜할지 몰라도……, 나는 이편이 더 마음에 든다네. 귀중한 군사들이 피 흘릴 걱정은 하지 않고 오랑캐들이 서로 죽이게 만들 수 있거든.”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덧붙였다.
“분명 자네도, 이 과업을 맡는다면 점차 내가 펼친 기교가 마음에 들 거야. 적어도 나보다는 가까이에서 강 너머 불구경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자네는 불장난을 저질러본 적 있나?”
“아주 어렸을 적에 이따금 부시를 모아 불을 놓고는 했사옵니다.”
“어떻던가? 재미가 없지는 않았을 테지.”
“……예.”
“오랑캐들에게 불을 놓는 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한윤이 함께 웃었다. 얼굴에 생기가 도니 보기 훨씬 좋았다.
“이미 의주부에서는 요동에 퍼뜨릴 포고문을 필사 중이고, 여진족 유민들 또한 모집하고 있다네.”
“신은 무엇을 하면 되겠사옵니까?”
“나의 계획은 완벽하네. 하지만 당장은, 하나의 맹점이 있지. 바로 모든 일이 강 너머에서 벌어진다는 것이야.”
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자신이 어디서 일을 하게 될지는 알아챈 듯했다.
그럼에도 두려운 모습은 없었다. 강을 넘어서라도 홍태주와 후금에 복수하리라 각오했던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한윤을 부른 이유였다.
“필사된 포고문이 올바르게 살포되는지, 강 너머로 보내진 여진족 유민들이 혹 상류를 통해 몰래 다시 들어오지는 않는지 현황을 파악해줄 사람이 필요하네. 사실상 나의 계획에 온점과도 같은 역할이지. 어긋나는 순간 서둘러서 교정하지 않으면 이 계획도 어디까지 샐지 나도 종잡을 수 없거든.”
“맡겨만 주신다면, 분골쇄신의 각오로 임하겠사옵니다.”
“그만한 각오로 임하겠다는 뜻이라는 건 알지만, 정말로 분골쇄신할 필요는 없네.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정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해주시게. 자네는 대체 불가능한 적임자거든.”
“……황송하옵나이다.”
한윤이 꾸벅 엎드려 감격을 표했다.
대체 불가능하다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당장 내가 아는 인물 중에서 한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상태가 약간 이상한 병조참판 이귀를 제하고는 없었다.
나머지는 기교를 갖추어도 체력이 부족하거나, 체력이 있어도 기교가 부족하다. 애초에 대부분은 강 너머에서 장기적으로 활동할 담이 없기도 하고, 모든 요건을 충족하는 인물들은 이미 요직을 맡고 있었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도 자네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있네. 누구인지 아는가?”
“……송구하옵니다.”
“도원수일세.”
“아……!”
“폐주 시절에 혈혈단신으로 적의 수도까지 침투하여 노추의 면상을 보고,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했지.”
“괜히 도원수에 오른 게 아닌 듯하옵니다.”
“그렇지. ……만약 병조판서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일을 맡겼을 터인데, 매우 안타깝게 되었군. 병조판서의 전사는 국가적으로만이 아니라 나 한 사람으로서도 매우 큰 손실이었다네.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어.”
한윤이 푹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한윤에게 나아가, 흠칫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가 병조판서의 빈자리를 메워주었으면 좋겠군. 병조판서는 충신이었으니, 자네가 그리 해주기를 바랄 거야.”
“예. 부친께서도 바라셨을 것이옵니다. ……소인에게 대업을 맡겨주셔서 거듭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절대로…,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나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용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영의정에게 자세히 일러두었으니, 내일 아침이 되면 찾아가게. 영의정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거야. 그 역시 자네가 흔한 인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거든.”
이미 누구를 보내 적지나 다름없는 강 너머를 정탐하게 할 것이냐로 왈가왈부가 있었다.
“예.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다시 보세.”
“왕명을 완수하고 금의환향하겠사옵니다.”
한윤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뒷걸음으로 어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편전이 휑해지자 나 역시 채비하고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금 기다린 뒤 나섰다.
중전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조한지라 서둘러 귀환할 생각이었다.
* * *
“한윤이 의주부로 출발했사옵니다.”
이원익이 보고했다.
“상태는 어땠습니까?”
“중임을 맡았다는 사실에 다소 고양되어 있긴 하였으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차질이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위험한 일을 맡았으니 그만한 자신감은 가지는 게 좋지요.”
“그러하옵니다.”
이제는 한윤이 직임을 잘 수행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부친을 무고하여 죽인 조선에 앙심을 품어 호란을 일으키고, 후금에서 공신까지 지냈던 인물이 반대로 후금과 홍태주의 파멸을 바라게 되었으니 운명이 이렇게나 변덕스럽다.
조선이 예정되었던 호란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입지를 다진 것도 그 변덕의 일환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변덕이라면, 고맙다.
누군가는 배신자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됐고 한 나라는 역사에 짙은 오점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호패법의 구상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요?”
“법령의 초안은 거의 완성되었사옵니다. 금일 해가 지기 전에 승정원을 통해 올리겠사옵니다.”
“기대되는군요.”
“기존에 시행되었던 호패법에서 무언가를 더하기보다는, 군더더기를 배제하여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었사옵니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결과물은 직접 봐야 알겠지만, 그동안 시행되었던 호패법에는 불필요한 곁가지가 많았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소재와 기재 내용의 종류가 달라진다던가.
호패를 분실, 혹은 위조할 경우 가해지는 처벌도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다르다던가.
‘안 그래도 호패가 과세의 근거로 사용되어서 반감이 심한 편인데 차별까지 하면 더 싫어하지. 그게 무슨 짓거리냐고.’
법은 최대한 깔끔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갖은 변수가 각종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발생하니 과도한 축약은 역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법이 지저분해서 벌어지는 부작용이 더욱 크다.
법을 집행할 말단에서 익혀야 할 법령이 한두 개도 아닌데, 숙지해야 할 조건과 예외사항이 많아지면 배워야 할 것도 많아진다.
그만큼 엄격한 집행이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더욱이 법이 지저분할수록 경계도 흐릿해져 판결에 자의가 개입할 여지도 늘어난다.
법 집행이 규율에 따라 이뤄지지 않고 누군가의 의향이 반영된다는 건, 판결이 일관성을 잃고 불합리해지거나 집행 과정이 부패하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 법을 누가 존중하고, 준수하고 싶을까?
지키는 사람만 바보 되는 법이라면 만들어서도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간의 호패법은 이러한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영상.”
이원익이 왕이 지향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을 터다. 어지간하면 손댈 구석은 없겠지. 법의 설계라면 나보다는 그가 더 전문가다.
대신 나는 화룡점정을 생각해두고 있다.
호패법은 인식이 나쁘다. 호패 자체도 과세의 근거가 되어 백성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다. 반전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