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4화
“전하께서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으시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난처한 얼굴로 덧붙였다.
“더욱이 피휘避諱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이 함부로 글자를 쓸 수 없다면, 내가 직접 새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존귀한 옥체로 하잘것없는 일을 자처하시옵니까.”
“달리 내 이름을 새겨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주장하고 만류하는 게 마치 줄다리기 같았다.
내가 이원익에게 제안한 건, 왕으로서 친히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 호패의 보급을 증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원익은 반대했다.
호패는 백성을 호구단자에 구속하는 수단이다. 국가의 정점이자 초법적인 존재인 군주가 지니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관점을 다르게 봐야지요. 왕조차 호패를 차는데, 누가 감히 호패를 차지 않는단 말입니까?”
“으음…….”
“더욱이 군주가 국가의 실익을 증산하기 위해 수고로움을 감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친경례親耕禮나 친잠례親蠶禮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친경례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하는 의식인 선농제先農祭의 한 절차로, 왕이 친히 밭갈이하는 것을 의미했다.
친잠례도 비슷하다.
농사가 남자의 일을 상징한다면, 여성의 일은 길쌈이 대표한다.
친잠례는 이를 고취하는 의식으로서, 왕비가 직접 잠실蠶室로 행차하여 뽕을 따고 누에를 친다.
“법령을 시행하는 나라의 위정자들이 스스로 예외가 된다면, 백성들은 더욱 호패가 저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으음.”
이원익이 쓰게 침음했다.
듣고 보니 부득불 만류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타협하듯이 말했다.
“대신 전하의 호패는 신이 도맡아 만들겠사옵니다.”
“왕의 호패라고 너무 눈에 띄게 만드신다면 다른 쪽에서 역효과가 날 겁니다.”
개정된 호패법에서 신분에 따른 제약은 사라졌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천민일지라도 본인이 원하는 소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외에, 호패를 위조 혹 분실할 경우 양반이라고 처벌의 수위가 약해지지 않는 등의 변화도 있었으나 조정의 중신들이 집중적으로 의식한 것은 전자였다.
세간에 사치스러운 풍조를 권장하고 위계질서를 어지럽힐 위험이 있다나?
‘그럼 양반이라고 사치스러운 소재가 허용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정녕 학문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호패의 소재 따위에 연연할 거로 생각하냐 물어보니 그럴싸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
사치가 딱히 권장할만한 풍속이 아닌 건 사실이다.
왕이라고 호패에 유난을 떤다면 사람들이 다 따라 하고 싶지 않겠는가.
인간의 심리가 그렇다.
잘난 사람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흉내 내고픈 사람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살벌한 전근대 신분제 사회라도 예외는 아니다.
왕가의 태가 안치된 태봉胎峰에 자기 자식의 태도 몰래 묻으려는 인간이 잊을만하면 적발된다.
“따라 하더라도 문제 될 것 없고, 부담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애초에 그런 심리를 이용하려고 내가 직접 호패를 차는 거 아닙니까.”
“염두에 두신 소재나 양식이 있으신지요.”
“양식은 모르겠으나, 소재는 양민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잡목을 생각해두었습니다.”
이원익이 고개를 저었다.
“백성들을 위하여 때로 위엄을 내려놓으시는 것도 좋으나, 뭐든지 과유불급인 법이옵니다.”
“어째서 잡목을 쓰는 게 과하다는 말입니까?”
“첫째로, 잡목은 호패를 제작하는 데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명칭 그대로 주변에 보이는 잡다한 나무를 가져다 만드는 것이니, 자연 호패의 내구성이 약하옵니다. 과연 이것이 백성들에게 권장할 바겠사옵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굳이 내구성 약한 소재를 흔하다며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기왕이면 백성들도 적절한 소재로 호패를 만들어주는 게 이롭다.
“또한 같은 이유로, 보관상의 문제도 있사옵니다. 전하의 호패는 장기간 사용되고, 또 그보다 긴 시간 보전되어야 하온데 내구성이 약한 소재를 사용한다면 훗날 후인들이 곤란해지지 않겠사옵니까?”
“……그건 그렇군요.”
이원익은 고개를 끄덕이곤 덧붙였다.
“신에게 맡겨주신다면, 과하지 않은 선에서 호패를 만들어 바치겠사옵니다.”
왕이 거추장스럽게 호패를 차고 다니는 것을 이미 양보한 이원익이다.
그리고…….
이원익이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왕이 나처럼 권위를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간 전공과 공적으로 쌓아놓은 게 많은 나이기에 망정이지, 원 역사의 인조 같은 놈이 내시에게 존대하고 잡목 따위로 호패를 만들어 걸쳤다간 수준대로 논다며 무시당하기 딱 좋다.
그런데 내가 권위를 내려놓는 선례를 남발하면 후대의 왕에게 불리할 수 있다.
‘이런 가정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긴 하지만…….’
역사가 흐르다 보면 똥 같은 왕이 나오기 마련이다. 인조 다음에는 기어코 고종이 튀어나와 암군의 한계를 시험하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호패의 제작은 영의정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너무 과하지만은 않게 해주세요.”
조심스럽게 당부하니 이원익이 희미하게 웃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나 혼자 조용히 호패를 차고 다니면 영상께서 수고해주시는 의미가 없으니, 신민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사옵니다.”
이원익과는 본론을 다 나누었지만, 물리기 전에 근황과 평소 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나뿐인 아들 이의전李儀傳이 관문에서 성취가 크지 않고 본인 역시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지라 혹 부족하거나 불편한 구석은 없는지 알아볼 심산이었다.
이원익은 왕에게 내색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는지 콕 집어서 물어보지 않았다고 그 역시 콕 집어서 답해주지 않았다.
‘가끔은 엄살을 부려도 좋을 텐데.’
이원익은 워낙 참선비라 그러지 않는다.
이러면 챙겨주는 게 눈치일까, 챙겨주지 않는 게 눈치일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격언을 상기했다. 영의정쯤 되는 사람이라면 힘들게 사는 것도 전략이다.
청렴으로 백관이 본받을 모습을 보이고자 할 의도도 있을 테고.
거기에다 무언가를 해주려다간 어그러진다.
* * *
이원익 다음으로 부른 건 좌의정 박홍구였다.
최근에는 별도의 호출이 없었던 만큼 박홍구는 간만의 부름에 긴장한 기색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들어서며 옷매무새를 만지던 박홍구가 무릎을 꿇었다.
편히 앉게 하니, 박홍구는 무언가 문제가 있어 불려온 게 아님을 알았는지 금세 안색이 편해졌다.
“망극하옵나이다.”
아무튼, 눈치만은 좋은 사람이다.
“호패법 시행을 처음으로 발의하셨고, 개정안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시작하였으니 마땅히 결자해지해야지 않겠사옵니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좌상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전하께서 살려주신 목숨입니다. 마땅히 도리를 다 해야지요.”
인사하듯 금칠을 주고받으니 분위기도 순식간에 환기됐다. 본론을 앞두고 과하게 띄워진 분위기를 적정히 진정시키는 건, 짧은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박홍구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진지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호패법 자체에 맹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교해주시옵소서.”
“호패는 백성들을 호구에 구속하는 수단이지요. 그리고 한 번 호구에 오르면, 거처를 옮기기도 쉽지 않거니와 세금도 꼬박 내야 하고 군역도 져야 합니다.”
“백성이 번다하게 거처를 옮길 일이 얼마나 있겠으며, 또 세금을 내고 역을 지는 건 그들의 의무 아니겠사옵니까.”
“좌상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정작 세금 나갈 때는 다르실 테지요?”
박홍구는 억지로라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하고 말뿐.
“호패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렇지요.”
공정한 과세 원칙이 확립되면 최종적으로는 백성들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거다.
당장 집계되는 인구와 토지가 실제와 비교해 크게 떨어진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정직하고 죄 없는 소수에게 불합리한 과세가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나라를 유지해야 한다. 야만적인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금이 필요하다.
나쁘게 몰아가자면 당장 호패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왕 및 문무백관의 수고와 불특정 정직한 사람들의 수고에 무임승차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다 때려잡으려고 들면 도리어 반감만 거세질 테지. 모두에게 부담과 이익이 공정하게 나눠지는 미래도 오지 않을 거다.
“유도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호패 차는 것을 마냥 손해로만 여기지 않도록 말이에요.”
여기에 박홍구가 불려온 이유가 있다.
“좌상께서는 약방 제조를 겸하고 계시지요.”
“그러하옵니다……?”
“왜란으로 유명무실해진 활인서活人署를 정상화할까 합니다. 대신, 호패를 가진 이들에게만 한정으로 말입니다.”
활인서는 의원을 고용할 여력이 없는 빈자와 오갈 데 없는 자들을 치료하고 수용하는 기관이다.
왜란과 암군의 치세를 거치면서 오늘날에는 간판만 걸어놓은 수준으로 전락한 채였다.
“물론, 활인서를 통해 미미하게 제공되는 공공의료가 호패 확신의 결정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거삼득을 노릴 수 있으니까요.”
박홍구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병자를 구휼하고, 호패의 반감을 낮추는 이익이 있음은 알겠습니다만 다른 하나는 무엇이옵니까?”
“세자가 검증된 의술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고, 보급하겠다는 가상한 마음을 품었는데 활인서가 기능한다면 그 일환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묘책이시옵니다. 세자가 직접 의술을 베푼다면 민심을 다스리고 호패를 확산하는 데도 더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박홍구는 찬동에 이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만 세자가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노출되는 건 아닐는지, 우려스러운 마음도 드옵니다.”
불특정 다수의 환자와 접촉하게 되면 물리적으로든, 건강적으로는 문제가 생길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박홍구가 그보다 더 걱정하는 건 세간의 지지가 세자에게 향할 수 있다는 거겠지.
그 점에 대해서라면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세자는 장차 나를 이어서 왕위를 이을 몸입니다. 지금 미리 백성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지요.”
나는 선조도, 인조도 아니다.
자식 상대로 열등감에 찌들기엔 내가 그렇게까지 인간이 덜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세자가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나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점은 박홍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께서 염려치 않으시니 신 역시 염려치 않고 받들겠사옵니다.”
“부탁드리지요.”
* * *
두 명의 의정을 연달아 접견한 뒤, 호패법 시행은 기정사실이 되어 한양을 다시 강타했다.
결정 난 일에 괜히 뒷북을 두드리는 사람 조금, 그리고 불안하게 향방을 주시하는 다수가 뒤섞여 한양의 분위기는 마치 폭풍전야 같았다.
나는 두 세기 반 동안 조선의 숙원이었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 세심했다.
남은 건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