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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65화 (165/380)

인조, 명군이 되다 165화

“빈말로도 수수하다고는 못 하겠군요.”

이원익이 호패를 건네왔다.

소재는 평범하다. 나무니까. 지위 있는 사람은 상아나 뿔을 사용한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걸 보아 좋은 나무를 쓰기는 했다.

이름은 금으로 상감해 번쩍거렸다.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면, 전하께서 친림하시더라도 호패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이원익이 짓궂게 웃었다.

내가 호패 차는 걸 반대했던 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왕의 품위와 휘諱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겠지.

호패를 옥대에 묶어 늘어뜨리니, 마치 선비들이 향낭 찬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시험 삼아 걸어보니 호패가 흔들리며 상감한 금 이름이 번쩍였다.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을 광경이다.

“확실히 눈에 띄는군요. 차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홍보가 되겠습니다.”

이원익이 웃었다. 만족스러운 걸까.

“나는 왕이 나서서 사치를 권장하는 풍조가 생길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라면 오히려 괜찮겠습니다. 흉내 내고픈 지향점이 되겠지요.”

마침 신분에 따른 제약도 사라졌겠다.

꼭 금을 상감하지 않더라도, 음각한 홈에 안료를 바르는 식으로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다.

“어느 정도가 적정하면서도, 실리를 취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사옵니다. 전하께서 알아봐 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

“예, 영상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마음에 들어요.”

흐뭇하게 바라보니 이원익이 민망한 낯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노회한 노신으로 여겨 부끄러워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가 모셔온 왕들을 생각해보면…….

칭찬에 어색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싶다.

“영의정 덕에 나는 호패가 생겼지만, 나 한 사람만 호패를 차고 다녀서는 효과가 부족할 겁니다.”

이원익이 곧장 알아듣고서 답했다.

“신 역시 호패를 차겠사옵니다.”

“고맙습니다. 다른 두 의정도 설득해주세요. 왕이 모범을 보이고자 하는데, 재상들이 멀뚱히 보고만 있으면 볼썽사납게 됩니다.”

그럴 리는 없으니 농담 삼아서 한 말이다.

“쉽지는 않겠으나, 맡겨주시옵소서.”

쉽지 않다고? 두 사람은 말만 전해주어도 호패를 찰 텐데…….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원익이 나를 마주하고는 웃었다.

“농이었사옵니다.”

* * *

흔히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한다.

아이는 보는 대로 따라 하니 그릇된 행동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백성들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위정자가 스스로 만든 법을 지키기 싫어하고, 또 지키지 않는다면 백성들 역시 그러하기 마련이다.

호패법을 시행한다는 공표를 앞두고 나와 함께 삼의정이 모범을 보였다.

법에 이런저런 제약도 풀렸고, 내가 자처하여 호패를 찬 이유도 세 사람은 알았기에 각자 나름대로 호패를 꾸몄다.

“영상에게서는 좋은 향이 나는군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원익은 허리춤에 찬 호패를 들어 보였다. 겉보기엔 나무에 인적을 음각한, 평범하게 수수한 호패였다.

“호패에 향유를 입혔사옵니다. 향낭이나 향갑이 따로 필요하지 않지요.”

“머리를 잘 쓰셨습니다.”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영의정에 걸맞은 기품을 살려냈다. 딱 참선비 다운 호패다.

“좌상의 호패도 눈에 띄는군요.”

박홍구는 멋쩍게 헛기침하며 호패를 들었다.

아패牙牌다. 상아로 만든 호패. 사치스럽지만, 문제 될 건 없다. 기존의 법령에서도 재상급은 아패를 찬다.

“허어…….”

모두 보라고 보여준 것이기에 중신들 사이에서 감탄이 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게, 아패는 얼룩이나 갈라짐 하나 없이 표백한 것처럼 희었다. 음각한 홈에 칠한 먹이 대조적으로 눈에 띄었다.

아패는 대체로 홈에 인주印朱를 발랐다. 시인성을 위해서다. 마치 장기알에 새겨진 붉은 글자가 눈에 잘 띄는 것처럼.

흔치 않게 먹을 칠한 건 자신감의 방증이다. 소재로 쓴 상아가 너무 최상품이라, 오히려 먹을 칠하는 게 눈에 더 잘 띈다는 거다.

“크흐흠……!”

중신들의 반응에 박홍구는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했지만, 호패를 내리지는 않았다.

아패 찬 사람이 더 늘어나겠군.

나는 질색하려다, 박홍구가 중신들을 제대로 도발한 것을 참작하여 시선만 돌렸다.

“우상께서도 호패가 눈에 띄는군요.”

“별것 아니옵니다.”

이상의가 멋쩍게 웃으며 호패를 들었다.

별 것 아니라기엔 발상이 눈에 띈다. 나무 소재의 호패 테두리에 쇠를 둘렀다.

“특이하군요.”

중신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집중됐다.

호패에 복합 소재를 사용한 건, 그간 호패법이 논의된 두 세기 반 동안에도 전례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금이 홈을 대신해 상감한 나의 호패도 복합이라면 복합이지만, 금은 소재가 아니라 장식의 의미가 크다.

이상의의 호패는 의미가 큰 셈이다.

멋을 부릴 여지를 넓혔으니까. 뽐낼 구석이 있으면 그리 하는 게 사람 심성이다. 호패 확산에 도움 되겠지.

이상의는 멋쩍은 얼굴로 슬쩍 호패를 쥐었다.

“나무로 만든 호패는 닳기 쉬우니, 모서리를 쇠로 두른다면 오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였사옵니다.”

“으흠, 그렇군요. 놀라운 발상입니다.”

멋만 아니라 실효성도 대단했다.

백성들도 십중팔구는 나무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텐데 호패는 계속 차고 다녀야 하고 한평생 써야 하는 물건이니까.

쇠를 두르면 닳거나 쪼개지는 등의 손상을 예방할 수 있다.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상의가 망극하다며 허리 숙였다.

그러자 관심을 빼앗긴 박홍구가 심통이 났는지 농을 건넸다.

“우의정이 전하게 왕명을 받아 천명을 미뤘다더니, 한 삼백 년 정도 살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러자 이상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반격했다.

“전하께서 명하셨거늘 어찌 삼백 년이라고 못 살겠습니까. 원래는 쇠를 통짜로 쓰려 하였으나, 무거울 것 같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

“그럼 좌상께서는 오래 살 생각이 없으신지요?”

“……!”

날카로운 반격에 중신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병조참판 이귀는 답지 않게 쩌렁쩌렁 웃다가 찔끔 흘린 눈물까지 닦아냈다.

이상의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호패를 매만졌다.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장식으로 술 대신 초피를 걸어놓았다. 마치 호패를 감싸는 모양새다.

평소 이상의가 날씨가 조금만 선선해져도 갖은 엄살과 함께 초피 갖옷을 걸치고 다니듯이…….

누구도 거론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자, 자.”

진정된 소란을 마저 정리하고서 신하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들도 이제는 아셨겠지만, 나는 호패법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적용하는 범위는 선혜법과 같아요. 경기도와 강원도는 즉시, 충청도는 선혜법이 준비되는 대로 동시에 시행합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만, 팔도에서 동시에 시행한다면 확산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감시 감독하기 어렵다.

또한, 법에 대한 반감이 기본적으로 짙은 만큼 선혜법과 함께 도입하여 불호하는 여론을 희석하겠다는 의도도 있다.

“선혜법은 잡세 일체를 폐지하고 지세를 일원화하여 명목 세율은 높였으나, 실제 세율은 낮아져 백성들이 매우 반기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하옵니다.”

이원익이 짧게 맞장구쳤다.

조정에서는 현실적인 세입이 발생하고 만연한 부패를 척결해 좋고, 백성들은 각 읍 수령과 아전들이 자의적으로 남발한 잡세가 차단되고 실질 세율이 낮아져서 좋다.

이원익이 덧붙였다.

“오죽하면 전라도의 감사가 호소하기를, 백성들이 충청도로 유출되는 것이 심각하다고 할 정도였사옵니다.”

마찬가지로 황해도 역시 주변의 경기도, 강원도로 백성이 유출되는 실정이다.

따지자면 전라도보다 더욱 심하다.

비교적 북쪽 지방인데도 왜란 때 병화를 직격으로 맞아, 인접한 평안도에서 세 차례 외침이 발생하는 동안 백성들의 불안이 가중된 탓이다.

“그러한 실태에 법을 신설하거나 군사를 풀어 단속하기보단 확정된 정책을 이용해 백성들의 호오를 맞추는 게 더 자연스럽고 반발도 적지요.”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아무튼, 법령의 시행은 이쯤 논하고 경들에게 엄명을 내리겠습니다.”

제신이 일제히 긴장했다.

“다음부터는 경들도 호패를 차고 오셔야 합니다. 하지만…….”

중신이 일제히 긴장했다.

“멋있지 않은 호패는 무효입니다.”

“……?!”

“호패법은 시행보다 확산이 더 중요합니다. 확산을 어떻게 촉진할지는, 삼공이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잘 알리라 믿습니다.”

“……!”

국가의 풍조상 꾸미는 건 옳지 않은 행태로 여겨왔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란 불변이라 위정자들은 신분에 따라 복식과 장식에 차등을 두어 권력과 재력을 과시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도 제약이 되었다.

정해진 틀을 탈피하여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역시 사람의 본성이니까.

그러한 본성의 표출을,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호패에서 허락한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물며 이를 정책 확산을 위한 옳은 일로 정당화하였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경들 역시 세간에 모범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마치 백성들이 선혜법을 찾아 이주까지 하는 만큼…….

“호패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호패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중신들이 알아서들 분전해주리라 믿는다.

* * *

백성들은 법령의 세목에 별 관심이 없다.

평범한 일상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드는 천하의 악법이 아니고서야, 논란이 되었던 법도 금세 일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과거의 호패법은 천하의 악법에 가까웠던지라 시행 직전 여염의 여론은 부정과 불안 일변도였으나 막상 신 호패법이 시행되자 논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관리들부터 대수롭지 않게 호패를 차고 다닌 덕이다.

“뭐야, 백단향白檀香인가?”

“그렇습니다.”

육조 거리에서 당상관이 하관에게 물어본다.

하관은 호패를 건네고, 당상관은 슬쩍 냄새를 맡아보고는 돌려주었다.

“영상 대감께서 호패에 향유를 입히셨다기에, 소관이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괜찮은데.”

“영감께서는 상아를 쓰셨습니까.”

“이거? 하, 이렇게라도 안 하면 입궐을 안 시켜준다니까. 정말 마지못해서 상아로 팠지. 크흠.”

당상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매끈한 아패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렇게 관리들부터 호패를 멋들어지게 꾸미고서 비교하고 자랑하며 다니니, 백신白身일지라도 꿀리고 싶지 않았던 선비들도 뒤따라 호패를 파서 차고 다녔다.

그러자 육의전 상인들이 저들도 따라 하지 못할 게 무어냐며 화려한 호패를 찼다.

신분에 따른 제약도 없어졌겠다.

양반과 비교해 유일하게 신분만이 떨어지는 그들이 양반들에게 공공연히 부귀를 과시할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몇몇 양반은 천한 상인이 유세를 부린다며 시비를 붙이기도 하였으나, 부유한 육의전 상인들에게 저들의 호패를 흉내 낼 수 없는 몰락 잔반殘班의 시기심이란 포상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광경이 시전市廛 거리에서 몇 번 벌어지자 여느 상인들도 뒤따라 호패를 찼다.

그러자 한양의 주민들도 하나둘, 나아가 한양에서 호패가 대단히 유행한다는 소문에 중외의 백성들까지도 점차 호패를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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