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6화
충청도 부여현은 늦가을을 맞아 너른 금빛 들판들이 속속 정리되는 중이었다.
현감, 김경여에게는 가슴이 뿌듯한 광경이었다.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이 늘어나는군. 마음이 편해. 춘궁기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겠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김경여와 동행한 아전이 덧붙였다.
“장마 때 큰비가 몇 번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참판 영감 덕에 살았지.”
선혜법 시행을 앞두고 세곡을 실어나를 부두를 증축하며 일대 제방도 함께 손봤다.
대대적인 공역公役이 시행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반감을 드러낼 법도 했으나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들 선혜법의 시행을 한 해라도 앞당기고 싶어 했다.
“아닙니다.”
“응?”
“현감 어르신 덕입니다.”
아무리 성대하고 좋은 이유가 있어도 알지 못한 채 노역에 동원된다면 의미가 없다.
읍민들의 반발이 불평 정도로 그친 건 김경여가 백성들에게 공역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이 컸다.
그뿐인가.
김경여의 설득이 통한 건 읍민들에게 신뢰받기 때문이다.
평소 성실하게 읍민들을 대했다는 방증이다.
“현감께서 임기가 다하시면, 분명 부여현의 온 사람들이 나와 연임을 간청할 겁니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입니다.”
“연임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소문이 나라님 귀에 들어가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경여가 잠시 고민하자, 아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물론 어르신께서 현감직을 계속 맡아주실 수 있다면 말입니다.”
관리의 숙원은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다.
설사 영의정에 오르더라도 한계는 없다. 역심이라도 생긴다는 건 아니다. 배향공신配享功臣이라는 자리가 있다.
종묘 배향공신은 공신 중에서도 왕의 치세를 빛낸 소수에게만 허락된 자리다.
이따금 종친도 끼어들기에 신하의 신분으로는 많아 봐야 다섯.
배향공신이 적을 때는 단 한 명만이 한 왕의 치세에 배향공신으로 오른다.
배향공신으로 끝인가?
아니다.
다음으로는 성현聖賢으로서 기려지게 되는 문묘文廟 배향이 있다.
문묘는 역사 전체를 아우르기에 배향된 이 중에는 신라 시대의 최치원과 고려 시대의 안향 등도 있다. 과거의 인물들과도 경쟁하는 만큼 문묘의 배향은 매우 치열하다.
정점은 문인으로서의 문묘와 공신으로서의 종묘에 동시에 배향되는 것. 현재 시점에서 문묘와 종묘에 동시 배향된 인물은 단둘뿐이다.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문인이자 관리인 김경여에게 종육품 외직에 불과한 현감의 연임을 거론하는 건 무례에 가깝다.
정점까지 가는 길이 까마득하거늘, 어찌 연임으로 짧지 않은 세월 현감으로 또 묶이라고 할까.
아전은 멋쩍어 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어색한 정적을 감내하는 동안, 고민한 김경여가 끝내 입을 열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연임할지 아닐지는 내가 아니라 전하께 달렸지. 읍민들이 나를 원하는 건 고맙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전하께서 나를 다른 관직에 쓸 수도 있지 않으시겠나.”
예를 들면, 더 큰 고을이라던가.
목민관으로서 매우 유능한 인재를 수용하기엔 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단위다.
“아아…….”
아전은 현감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백성들이 연임을 간청하고 김경여가 원하더라도 정작 나라님의 생각이 다르면 별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나쁜 일도, 나쁘게 여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정론이십니다.”
“그렇지.”
아전은 김경여가 조금은 아쉬워함을 느꼈다. 임기가 남은 아직, 이른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부여현에 많은 정이 붙었다는 뜻이리라.
아전은 문득 아차했다. 현감에게 줄 선물이 있었다.
“어르신, 저어…….”
“음?”
“근래에 읍치가 꽤 소란스럽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한양의 유행이 어떻다드니 하면서.”
“그랬지. 아직 선혜법조차 시행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예전에 호패법을 시행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 이게 아니라.”
아전은 품에서 호패를 꺼냈다.
“이건…….”
김경여의 시선의 제 이름이 새겨진 목판으로 향했다.
“부여의 나무로 부여의 소목장이 만든 호패입니다.”
김경여가 건네받은 호패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전은 내심 걱정했다. 나무로 만들었다고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건 아닐까.
겉보기엔 평범해도 부소산扶蘇山 꼭대기에서 가져온 질 좋은 나무다. 부소산이 외부인에게는 야산에 불과할지언정 부여에서는 영산 취급이다. 부여에 한때 존재했던 백제의 수도성, 사비성의 배후산성이 자리했었으니까.
700년 가까이 존속했던 나라의 북악산인 셈이다. 조선도 북악산은 진국백鎭國伯이라 칭하며 영산으로 드높였다. 토박이들은 부소산에도 영험함이 있으리라 믿었다.
‘말씀을 드려야 하나?’
그래도 그냥 나무 아니냐면 할 말 없지만…….
김경여는 호패를 자신의 술띠에 묶어 늘어뜨렸다.
“이래서 한양의 유행을 거론하셨군?”
“예…….”
“고맙네.”
“아유, 아닙니다.”
아전이 민망해하며 손을 저었다. 그 모습에 김경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나도 하나 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네. 유지들이 죄 호패를 차고 다녀서 말이야. 볼 때마다 자랑을 하면서 이 정도면 한양에서도 먹히지 않겠느냐고 운을 띄워대는데…….”
김경여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한양에 먹힐지 안 먹힐지 제가 어떻게 알겠나? 법이 시행된 뒤에 온 것도 아니고.
자랑하고 싶다면 솔직하게 자랑하면 될 터인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며 슬쩍슬쩍 과시한다. 유지들이 몰래 모여서 회합이라도 가진 건지 모두 들먹이는 소리가 똑같다.
이제는 괘씸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호패법은커녕 선혜법도 아직 시행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게 자네 눈에도 보였나 보군.”
“다들 자랑을 어지간히 해야 말이지요.”
아전은 맞장구치면서 멋쩍게 웃었다.
사실, 아전도 호패를 하나 파 놓은 참이다.
호패를 공인하려면 관인官印을 찍어야 한다. 호패법은 시행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유지들이 자랑할 기회를 미루지는 않았다. 다들 관인을 찍어달랍시고 찾아와 아전을 속 보이는 자랑질로 괴롭혔다.
김경여가 당하기 이전부터,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이제는 아전도 맞설 수단이 생겼다. 하지만 현감도 차지 않은 호패를 자신이 먼저 찰 수는 없잖은가?
눈치 보이는데.
‘선물드리길 잘했다.’
그간 내색은 없었으나 현감도 유지들의 자랑질에 유감이 많은 상태였다. 자신이 말없이 호패를 차고 다녔다간 밉보였을지도 모르리라.
선물에 이유에는, 물론 존경심도 있었으나 이것이 진짜 이유였다.
“그나저나…….”
“아. 예!”
김경여는 아전이 화들짝 놀라자,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아전이 서둘러 둘러댔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김경여는 그러려니 여겼다.
“그나저나 조정에서 참 머리를 잘 쓴 것 같아.”
“예?”
김경여는 호패를 들어, 엄지로 쓸어내렸다. 개국이래 꾸준히 시도했으나 좌절만을 거듭 맞이한 호패법이다.
아전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에둘러 거론한 예전이란 폐위된 광해군의 치세를 뜻한 것이리라. 그때도 호패법이 잠깐 도입된 적이 있었으니까.
김경여 본인은 잘 알지 못하는 시절이다. 호패를 찰 나이가 되었을 때 법이 혁파되어 사라졌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세간의 반응이 절대 좋지는 않았다는 정도다.
‘다들 나서서 호패를 차려고 하지는 않았지.’
그것만은 분명했다.
호패를 차면 군대로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고생만 하다 죽는다는 소문만은 흉흉함 때문에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제는 다들 앞다투어서 호패를 차려고 하니.’
세월이 실로 무서울 따름이다.
심지어는 폐조 때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아전마저 자신의 눈치를 보며 호패를 차려 들지 않는가?
과거를 기억하는 늙은이들마저 꾀어 스스로 호패를 차게 만드는 걸 보니 조정의 술수가 대단했다.
‘……하지만 술수가 아무리 대단해도 전하를 향한 지지와 간적 노추와 홍적을 상대로 거듭 거둔 압승이 없었더라면 지금 같은 호응 역시 없었겠지.’
호패의 등록은 납세와 공역으로 직결된다.
백성들이 하등 좋아하지 않는 것들임에도, 다들 꺼리지 않고 호패를 찬다는 건 그간 납세와 공역을 공정하게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온 왕의 행보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호패로 부당한 손해를 보지는 않을 거라고.
설마 폐주 때 이렇게 호패법을 시행했다고 다들 알아서 호패를 찼을까? 눈에 띄는대로 수탈하고 착취했던 시절이다. 절대로 차지 않았을 테지.
“성대한 시절이야.”
김경여가 감상을 짧게 드러냈다.
그의 상념을 알지 못하는 아전은 한 박자 늦게 맞장구쳤다.
“암요. 성대한 시절입지요. 앞으로도 지금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간 고생이 워낙 많았어가지고…….”
아전은 주절주절 떠들다가 속이 너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말끝을 뭉개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연배만 보면, 폐조를 포함해 선조의 치세도 상당기간 겪어보았을 아전이다.
그리고 선조 치세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화평과는 거리가 다소 멀었다.
김경여는 아전의 발언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지금 같았으면 한다는 건 나 역시 동감일세.”
그 부분만은 누구라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테지.
두 사람이 발길을 돌릴 즈음, 부여현의 금빛 너른 들판은 전보다 조금 더 정리되어 있었다.
* * *
한양.
서궐에서.
세자는 흔치 않게 불안해했다. 그간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은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세자다.
무작정 만류할 수도 없었다.
전각 안에서는 세자빈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연신 마당까지 전해졌으니까.
나는 아이가 탄생하는 와중의 감정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세자가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나 역시도 매우 불안했으니까. 만약의 만약을 대비하여 세자에게 의술까지 익히게 했던 나다. 당사자는 얼마나 불안할까.
그저 말없이 세자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세자는 손톱 물어뜯는 것을 멈추고 제 어깨를 감싼 아비의 팔을 당겨 끌어안았다.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세자는 무척 안절부절못하였으나 입실하지는 않았다.
한양에서 가장 유능한 매파에게서 아이 받는 과정을 배웠던 세자다.
그러나 동시에 세자는 환자가 여기에 취약하며 또 여기를 옮기고 다닌다는 것 역시 익혔다.
중상자만큼이나 여기에 취약할 세자빈에게 많은 환자와 집중적으로 접촉해온 세자가 다가가는 건 세자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만행이었다.
세자는 그 이성과 불안 사이에서 시달리며 식은땀을 비 맞는 사람처럼 흘려댔다.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점차 강해졌다.
방문 너머에서 신음이 커졌다가 가라앉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일순 세상이 조용해졌다.
세자가 눈을 번쩍 뜨고는 팔을 빠지도록 잡아당겼다.
일각이 여삼추 같은 침묵이 흐르고.
불안했던 적막은 아이 울음소리로 깨져나갔다.
그러나 세자도 나도 곧장 안도하지는 못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차 잦아들수록 세자의 호흡은 반대로 거칠어졌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세자가 사사한 매파와 함께 입실한 의녀들이 마당으로 나왔다.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표정에서 읽어낸 세자는 안도한 얼굴로 힘없이 늘어졌다.
“하아아…….”
나는 어깨를 감싼 그대로 흘러내리는 세자를 끌어안았다. 그간 세자에게 혹사당한 팔이 거의 감각이 없어져 다른 팔로 받쳐야 했다.
제가 아이를 낳기라도 한 양 심신이 지쳐 버린 세자를 대신해 매파가 내게 전해왔다.
“건강한 아기씨이옵니다. 산모 역시 건강합니다.”
귀는 열려 있었던 세자가 핼쑥해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