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7화
세자는 죄스러워했지만, 혜민서에는 대신 어의를 보냈다.
세자가 환자의 여기가 옮을 수 있다고 세자빈과 세손에게 다가가지 못했으니까.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 목욕재계沐浴齋戒한 세자는 동궁의 궁녀들을 물리고 자신이 직접 세자빈과 세손을 수발들었다.
그 와중에 색지까지 구해서는, 장차 세자가 익힐 천자문까지 직접 집필하고 엮어냈다.
원래 쓰고 있던 의서?
안중에도 없다.
혜민서 비우는 건 도대체 왜 미안해한 걸까.
이렇게 즐길 거면서.
“경사스러운 소식이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중신들 앞에서 말했다. 그는 운을 띄우는 정도로 만족했는지, 마저 말을 끝맺지 않고 곁을 돌아보았다.
“판윤.”
이원익의 부름에 한성부 판윤을 지내는 구굉이 한 발자국 나섰다.
한성부에 희소식이 생긴 걸까.
“작일부로, 호패를 신고하고 관인을 발급받은 인원의 숫자가 기존 호구대장에 기록된 총원을 능가했사옵니다.”
이원익이 곧바로 덧붙였다.
“이는 한양에서 호구에 등록하지 않고 납세와 공역을 회피해 왔던 사람들이 드러났다는 뜻이옵니다.”
“뭐요?”
병조참판 이귀가 곧장 치고 들어왔다.
“아니, 그런 못되고 사특한 자들이 있었답니까! 게다가 호패를 차기 위해서 신고라니!”
이귀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이쪽을 향해서 아뢨다.
“전하, 기존의 호구대장과 대조하여 오랫동안 토단법土斷法을 위반한 죄인들을 즉각 처벌하시옵소서!”
내가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판윤 구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판.”
소란스러워지려던 어전이 일순 진정되었다.
구굉은 왕의 외척이라는 신분을 의식하여 그간 정무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조용히 주어진 직책에만 최선을 다할 뿐.
그래서 외척이라면 학부터 떼고 보는 관리들의 경계심을 완전히 녹여버렸는데, 흔치 않게 정계의 거물인 병조참판을 상대로 나섰다.
“…말씀하시오!”
“누가 잡아다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신고하였는데 엄벌을 내린다면 등잔 아래 숨은 자들이 더 양지로 나오겠습니까.”
“그게 문제요! 진즉 잡아다가 호구에 등록하고 충군 시키든, 전가사변을 시키든 했어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군사를 풀어서! 주민들의 신원을 호구대장과 대조하면 그만이요!”
“…….”
짧은 침묵이 있었고, 이귀는 입술을 슬쩍 말았다.
“참판도 그것이 말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계시겠지요.”
한 줌에 불과한 사령使令들을 시켜 어떻게 이십만은 될 한양의 주민들을 조사한다는 말인가?
전수조사가 아닌 소수만을 불특정으로 조사한다 해도, 어느 세월에 어떻게 신원을 호구대장과 대조하겠다는 말인가.
사령들에게 호구대장의 목록을 전부 숙지시켜서?
아니면, 단지 재수없이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한성부 관아에 이박삼일쯤 가둬놓고 일일이 호구대장을 뒤적거려서?
괜히 유령인간이 창궐하는 시대가 아니다.
하물며 조선은 왜란으로 그간 쌓아놓았던 자료마저 상당수가 소실되어 버렸다. 각종 장부들은 갱신보다 아예 새로 작성하는 게 더 나은 상태다.
“…….”
이귀도 병조에서 오래 병무를 맡아보았기에 안다. 자신의 발언이 억지에 불과했다는 것 정도는.
그러나 발언의 의의마저 꺾인 건 아니었다.
“그럼 조세와 공역을 회피해 온 괘씸한 작자들을 아무런 처벌도 하지 말자는 말이외까?”
민감한 문제다.
그들이 무고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섣부른 처벌은 호패법을 개정해 어렵사리 거둔 실효를 잃게 만든다.
구굉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다른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침묵 속에서 무수한 시선이 교차하는 동안.
좌의정 박홍구가 슬쩍 나섰다. 사소한 움직임이었으나, 긴장한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박홍구가 제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르게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소이까들?”
“무슨 말입니까.”
이귀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간 호구에 등록하지 않고 조세와 공역을 회피해온 못난 사람들이, 어째서 자발적으로 신고하게 되었냐는 말이외다.”
“그야 신설한 호패법 때문이지요.”
이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신 호패법의 시행에 일관적으로 비판적이었다.
법령이 수정된 의의와 그로 인해 창출될 실리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범인의 천박한 심리를 이용한다는 술책이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기강과 풍속을 저해한다는 논리에서였다.
합리적인 지적이다.
그러나 실질 인구의 반의 반의 반 밖에 파악하지 못한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기품을 갖추겠다고 고루한 원칙을 준수하겠는가.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 수준의 행정력은 반쯤 망한 나라에서나 나타날 법한 지경이다.
원래 역사에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연타석 홈런을 맞고 그리 되었고.
선비도 사흘 굶주리면 담을 넘는다고 했다.
주려 혼미한 정신 앞에서는 공맹의 고루한 말씀도 옆집 잡종 강아지 멍순이가 짖는 소리에 불과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나만 아니라, 중신 누구도 망한 나라가 체면을 차렸다는 소리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들어본 적이 없다. 이귀의 우려가 깔끔하게 무시된 이유다.
이제는 쌀이 익어 밥이 되었으나 이귀는 여전히 입장을 철회하지 않은 투였다.
중신의 여론은 과거와 달랐다.
그들이 생각해도 세인들의 만연했던 탈세와 피역이 괘씸했으니까.
“참판은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네.”
“관점을 달리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이외까?”
“달라지지. 한 사물이라도 보는 방향에 따라서 눈에 들어오는 형상이 달라지지 않는가?”
이귀의 자세가 조금 삐딱해졌다.
폐조 치열했던 정쟁 당시의 적대감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던 우의정 이상의를 제외하고는 북인 거물이었던 박홍구를 좋아하지 않는 이귀다.
불손한 태도가 역력하였으나 박홍구는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하루 이틀 본 광경이 아니다.
“호패법은 계기에 불과하네.”
이귀가 코웃음쳤다.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폐조 때 호패법을 이같이 시행했다고 지금 같은 호응이 있었겠는가?”
“…….”
박홍구는 이쪽을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
“오롯이 전하께서 성대한 시대를 펼치셨기 때문이옵니다.”
코웃음이나 쳤던 이귀의 안색이 굳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타고나신 선견지명으로 위기에 빠진 종사를 바로 세우시고, 정예한 군사를 조련하여 전쟁에 대비하셨으며, 해도를 강탈한 해적들과 여진족 도적떼들을 모조리 처단하셨습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도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는 열심히 물갈퀴질을 하듯이 갖은 고생을 했는데, 먼저 거론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신민의 눈에는 군사적인 업적이 더 눈에 띈다는 거겠지. 내심 아쉬웠다.
“바다와 땅의 도적들은 명나라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는데, 감내하지 못하였던 것을 아조가 나서 처단하였으니 이는 곧 왜란 때 입은 은혜를 갚고도 남음입니다. 나아가 역으로 은혜를 입히고 있으니, 작금의 질서는 조선이 유지하고 있다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금칠이 대단했으나 어전의 제신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박홍구를 못마땅히 여기는 이귀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좌우에 시립한 중신 십중팔구는 선조의 치세와 왜란을 모두 경험해 보았으니까.
진창에 처박혔던 국격이, 회복을 능가하여 새로운 지경에 다다랐으니 당금을 살아가는 신하들로서는 뿌듯할 수밖에 없다.
왕의 업적을 아무리 노골적으로 칭송하여도, 그 저변에는 왕업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수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정 부분은 맞는 말이다.
모두가 유능한 인재들은 아니지만, 이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제 몫을 위해 분전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은 없었을 터였다.
없느니만 못한 것들은 내가 이미 다 삼도천 너머로 보내놔서.
박홍구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폐주의 거듭된 실정과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여 많은 백성이 바위 이래 응달로 숨어들었는데, 태평성대를 맞아 다시 볕으로 나와 전하께 충성하고 아조에 헌신하기를 자처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즐거워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홍구가 처음 거론한 관점의 차이였다.
그간 피역하였던 백성들의 못남을 어떻게 실리를 잃지 않고 꾸짖을까 고민하는 대신, 더 멀리서 현상의 긍정적인 모습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황제가 유능하여 태평성대를 일으키면 중외의 만국이 알아서 귀부하듯, 소산消散한 백성들이 응달에서 나와 다시 아조의 신민이 되기로 한 것은 성상께서 덕과 도리로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대를 일으켰다는 방증이옵니다.”
닳겠다, 이 양반아.
이제는 박홍구의 찬양도 부담스러울 지경이 되었고, 그건 제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다들 짧게 헛기침하거나 침음을 흘렸다.
잘 알겠으니까 이쯤하라는 뜻.
박홍구는 여유로운 낯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대열로 돌아갔다.
다시 ‘괜히’ 백성들의 처벌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귀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다간 이어질 상황이 너무나도 분명했으니까. 박홍구가 다시 앞으로 나오겠지.
“……좌상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판윤의 자체적인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구굉이 말없이 끄덕였고 우리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호패를 등록하는 과정에서 확보된 신원들이 있을 텐데, 이 자료들을 취합하여 새로운 호구대장을 만들고 미비한 부분은 기존의 호구대장과 대조하여 보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의 제안에 고을들의 실상을 아는 중신들이 이론은 없이 살을 붙여나갔다.
어차피 기존의 호구대장은 오래되었다, 사라진 고을도 많다…….
전쟁 중 발생한 무수한 유민이 타지에 정착해서 쓸모가 없어졌다, 이러한 이동의 동향은 파악하기 위해 대조할 가치는 있다…….
뭐, 이런 논의들.
나는 조용히 앉아 신하들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깎아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호패법에 이어서 또 굵직한 일감을 떠안게 된 목민관들의 고생에 유감을 품었다.
* * *
세자가 죄스러워할 정도로 미안해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세자빈과 세손을 돌본답시고 동궁에 칩거 수준으로 틀어박힌지라 다시 혜민서로 보낼 수가 없었다.
이게 세간에서는 괜한 잡음까지 만들어냈다.
그간 세자가 환자들을 워낙 친절하게 대했던지 고지식한 어의들에 대한 불평이 이따금 나왔다.
‘그런데 어쩌냐.’
쉬게 해 주었으면 충분히 쉬게 해주어야지.
잡음 좀 있다고 갓난아이 아빠를 다시 일터로 보내면 안 된다.
혹여 그랬다간, 십 년쯤 지나서 세자가 나를 지게에 태울 수도 있으니까.
처신을 잘해야 한다.
“전하.”
밖에서 최 상선이 불렀다.
중전은 정무의 귀한 소강기에도 어김없이 왕을 찾는 내시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이게 왕의 일인 걸 어떡하겠는가.
다만 눈치를 보아서 들이지는 않았다.
“말씀하세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향비누가 완성되어, 가져다 드리러 왔사옵니다.”
“그래요?”
상선을 들이지 않기로 한 것을 철회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마침 중전도 궁금한 기색이었다.
“향비누가 무엇입니까?”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최 상선? 들어오세요.”
“예에.”
좌우로 미닫이문이 열리며 최 상선이 등장했다. 그는 나와 중전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올린 뒤, 받쳐들었던 함을 내려놓았다.
“분부하신 대로 만들었으나, 기대하셨던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어디 한 번 봅시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봉림대군이 다가와 함의 뚜껑을 먼저 열었다.
비단보로 포장된 내부에는 반투명한 사각형 고체가 담겨 있었다.
“과자이옵니까?”
“아니다!”
봉림대군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나는 일단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먹는 게 아니다. 냄새만 맡아보거라.”
“네.”
봉림대군이 조막만한 손으로 향비누를 들어다 코로 가져갔다. 그러자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는 조금 더 냄새를 맡았다.
“어떻느냐?”
“좋은 향기가 나옵니다.”
“그래. 그래서 향비누다. 어머니도 한 번 맡아보게 전해드려라. 그래.”
봉림대군이 두 손으로 받쳐 향비누를 내밀자, 중전은 조심스러웠는지 엄지와 검지로 잡아서는 슬쩍 코로 가져갔다.
“으음!”
중전의 품에 안긴 인평대군이 손을 뻗기에, 중전이 대신 코로 가져다주었다.
인평대군이 아직은 핏덩이 같은 녀석인지라, 향비누를 붙잡아 입으로 가져가기에 중전이 서둘러서 거뒀다.
“전하. 기대하신 대로 완성되었사옵니까?”
“예. 마음에 듭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옵니다.”
최 상선이 물러나려 하기에 나는 잠시 붙들어놓고서, 중전에게 말했다.
“향비조香肥皂를 아십니까?”
“…예, 비노처럼 쓰는 약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조금 개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