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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68화 (168/380)

인조, 명군이 되다 168화

조선 시대라고 비누 역할을 하던 물건이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비누라는 단어 자체가 순우리말이다.

조선 시대의 비누는 미래의 비누와는 크게 다르지만.

넉넉한 가정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겠으나 조선 시대의 여인들은 세안하고 목욕하는 과정에서 곡물 가루를 묻혀 얼굴과 몸을 닦아냈다.

이러한 행위를 비루飛陋, 더러움을 날려 보낸다는 의미로 칭하였는데 이것이 비누의 어원이다.

조선 시대의 비누란 스크럽이었던 셈이다.

향비조香肥皂는 이때 쓰는 곡물가루의 상위 호환이다.

이름에 향香이라는 이름이 들어갔듯이 침향과 백단향, 정향과 영릉향, 사향 등 좋은 향기를 내는 약재를 가루 내어 환으로 뭉친 것인데 먹지는 않았고, 물에 녹여서 세안 따위에 사용했다.

“그것을 기름과 잿물을 써서 굳혔지요.”

딴에는 친절한 설명이었으나 중전은 흐음, 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세안으로 쓴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기름과 잿물이라니, 오히려 피부가 더 번들거리거나 상하겠습니다.”

미래의 비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상선, 내가 향비누를 사용하는 법을 보이고 싶은데 물대접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그리고 잠시 후 상선은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가져왔다.

비누로 세수하는 것이야,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지라 금세 끝내고 잘 닦인 얼굴을 내밀었다.

“만져보세요.”

중전이 손끝으로 내 얼굴을 만져보더니, 입을 반쯤 열고서 감탄했다.

“……와.”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기름과 잿물을 사용했다고 그냥 그 둘을 섞어 만든 게 아닙니다. 상선은 잘 아시겠지요?”

최 상선이 피로한 얼굴을 과장한 채 끄덕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러 내시가 향비누를 완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진땀을 뺐사옵니다.”

비누 만드는 과정이야 미래에서는 반쯤 상식처럼 알려져 있지만, 지식을 함양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건 난이도가 다르다.

게다가 조선 시대니까.

정제된 오일과 순도 높은 수산화나트륨을 확보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재료의 질에 공을 들이지 않아 버리면 결과물이랍시고 나온 비누는 잿가루가 잔뜩 섞인 채 비린내나 고소한 냄새를 풍겨대겠지.

갖은 품이 들어간 향비누는 위생용품이라기보단 사치품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쌍한 궁인들을 혹사시킨 이유는…….

“세자가 워낙 세자빈과 세손에게 극진해야 말이지요. 동궁을 출입할 때마다 여기를 씻어낸다며 밤낮으로 목욕재계를 한다고 들었는데, 향비누를 쓰면 유난에 훨씬 더 도움될 겁니다.”

물로만 씻어내는 것보다야 비누까지 쓰는 게 더 위생적이니까.

“최 상선.”

“말씀하시옵소서.”

“비누를 만들 때 특히 고생했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예.”

“그들에게도 향비누 하나씩 나눠주세요. 무엇을 만들려고 고생했는지는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쓰는 방법은 직접 보셨으니 그대로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그러려고 세워놓았다.

“상선께서도 하나 가져가시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될 건 어딨답니까.”

비누가 귀물이긴 하지만, 품이 많이 들어간다뿐이지 특별한 희소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기왕 만드는 김에 잔뜩 만들었고.

재고는 충분하다.

“망극하옵나이다.”

최 상선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저는요?”

중전이었다.

“아들 부부와 손주 생각으로 만들었다니, 자식 사랑은 참으로 대단합니다만 저는 서운합니다.”

“…….”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지도 한참인데, 저는 여전히 안중에도 없으십니까?”

“비누야 더 있으니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시면…….”

“세자를 위해서 만들고, 궁인들에게 고생했다며 나눠준 다음에, 저는 남은 것에서 가져가라는 말입니까?”

“…….”

이걸 어쩌지, 하던 차에 중전이 일순 안색을 바꾸며 실소했다.

“농입니다. 어찌 그리도 놀라십니까?”

“아, 하하하…….”

그저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곧이곧대로 농으로 받아들이고 넘겼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 않을까 싶다.

처형의 유예기간으로 해석하는 게 옳지 않을까.

‘어쩌지!’

* * *

한참을 고민해 봤다.

내탕에서 귀물을 골라 선물하자니, 그저 비축해둔 물건 하나 띡 던져두는 듯하여 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나가서 중궁에게 어울릴 법한 선물을 구하자니 신하들과 궁인들이 죄 기겁할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보내어 중궁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구해봐라 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끙끙 앓는 동안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처음 며칠은 시한폭탄의 격발까지 얼마 없는 여유가 줄어드는 듯하여 불안했으나 막상 중궁은 그때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 평범하게 일상을 공유했다.

그리되어버리니 도리어 내가 더 미안해졌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신경 써주지 않고, 아비를 골방에 내버려 둔 채 저들끼리 희희낙락하는 못난 아들 부부나 챙기고 있었으니까.

생각이 달라지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서 진지하게 중전에게 필요한 선물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꼭,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만이 선물은 아니지 않을까?

선물의 사전적인 정의는 그렇긴 하다. 드릴 선膳에 만물 물物이니.

하지만 나나 중궁이나 조선에서 군림하는 사람들인지라 물품이 부족한 일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덜어내는 게 더 절실한 사람들이다. 예법에 따라 규정된 옷과 장식만 해도 책 한 권은 나오기 때문이다.

중전은 특히 그게 더 심했다.

큰 행사 때 중전은 동시에 옷 여러 벌을 걸쳤고, 거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장식을 달았다. 그러고 잠깐도 아닌 반나절을 꼬박 자리 지켜야 한다.

세간의 방만한 인식과 달리 왕비 노릇도 체력 없이는 불가능한 셈이다.

그것이 내가 중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선물의 여지가 되어주었다.

“중전.”

“예?”

중전이 서안에서 눈을 떼고서 물었다. 급작스러운 부름이긴 했다. 함께 인평대군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던 중이었으니.

“머리가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아니요. 평소와 같습니다.”

중전은 내가 두통이나 어지러움 따위를 걱정한다고 여겼는지 오히려 그렇게 보였냐며 되물어보았다.

나는 시선을 올리고서 답했다.

“가체加髢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선 초, 중기 여인들이 머리에 얹고 다녔던 초대형 가발.

시대상 실제 사람의 머리칼을 일일이 엮고, 각종 진귀한 소재로 탈색하고 염색하는 가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와집마저 능가하는 기상천외한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가체의 진정한 대가는 호주머니 사정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목 건강이다.

머리카락도 모이면 꽤 무게가 나가거늘, 거기에 이런저런 재료를 더하고 각종 장식까지 더한 완성품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

모某 반가에 시집온 처자가 한껏 사치부린 가체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잊을 만하면 번지는 흉흉한 풍문은 단순히 괴담만이 아니다.

“무겁긴 하지요.”

중전은 대답과 함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는 투다.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한두 해 쓴 것도 아닌데요.”

“그 무게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쓰고 계시는 동안 계속 목에 부담이 가지 않겠습니까?”

중전은 나의 새삼스러운 걱정이 낯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가례 때 쓰는 칠적관七翟冠은 꽤 부담되긴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건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그래도…….”

“진정 무방하니 염려치 마시지요. 신경 써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중전이 슬쩍 웃었다.

반가의 규수로 태어나, 혼례를 올린 이래로 가체를 신체 일부처럼 여기고 살아왔을 중전이다.

또한, 여인들의 미에 대한 추구는 살벌하기까지 하다.

조선 후대에 이르러 영조가 가체를 금지하였으나, 대용으로 쓰게 된 족두리를 가체처럼 크고 무겁고 화려하게 꾸미게 되어 단속을 철폐할 수밖에 없었다.

후대의 왕은 정조가 다시 가체를 단속하였으나, 실효를 거둔 건 또 한 번 왕이 바뀌어 순조의 치세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미를 추구하는 건 미래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목을 희생하는 게 유행이 아니게 된 미래에서 여성들은 대신 영양 상태와 발목을 희생했다. 본능에 가까운 추구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내가 만류하는 것이 배려보다는 간섭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니옵니다.”

중전이 얼굴을 붉힌 채로 덧붙였다.

“전하께서 저의 안부를 걱정하여 하는 말인데, 어찌 간섭으로 여기겠습니까.”

나는 슬쩍 손을 뻗어 중전의 손을 잡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는 말이어서 그럽니다. 나는 중전께서 가체를 더는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법이 문제라면 내가 고치겠습니다.”

중전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일생의 반려가 미를 추구하다 못해 건강마저 혹사한다면, 만류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너무 늦었습니다.”

저 역시 3대 500을 치겠다며 관절을 깎는 이심전심의 별종이 아닌 한에야 반려의 자기 학대를 용인할 사람은 없지 싶다.

“중전께서도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분명 있으실 테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의 미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중전은 뺨은 붉히고 표정은 놀란 그대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너무 급작스러운 당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장수는 하지 못했던 중전이다. 미리 신경 써주는 게 맞았는데 못난 세자 부부만 챙겨주느라 너무 무관심해 왔다. 그래서 더 필사적인 감도 없잖아 있었다.

“…….”

몇 번 눈을 끔뻑이던 중전은, 눈을 감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앞으로 향했다.

달라진 분위기에 중전의 품에 안긴 인평대군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인평대군을 괜히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아,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인평대군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와 중전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천자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중전이 눈을 뜨고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로 말했다.

“전하께서 그렇게 간절히 걱정해 주시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인평대군을 품에 파묻고, 가체를 머리에서 들어냈다. 중전의 손짓에 따라 가체의 무수한 장신구가 파들파들 흔들렸다.

머리에 인 짐을 덜어낸 중전은 했던 말과는 달리 살겠다는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령 가체가 익숙해져 그 무게가 아무렇지 않았더라도, 가체를 떨쳐낸 지금이 훨씬 더 편안할 테지. 그것이 눈에 보여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너무 억지를 부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전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저는 오히려, 가체를 쓰지 않았다고 전하께 폐가 가지는 않을지가 걱정이옵니다.”

나는 결연하게 답했다.

“내가 나라를 살리기까지 한 왕으로서 당당히 예법을 고치겠다는데, 감히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탕에서 가장 무거운 가체를 가져다가 쓰고 다니게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그간 중전의 고생이 녹록지 않았음을 깨닫고 얌전해지겠지요.”

그 모습이 그려졌던지, 중전이 입을 가리고서 후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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