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69화
요양. 동경성.
불과 한 해 전만 해도 홍태주는 후금에서 사패륵이자 실질적인 이인자였으며 전도유망한 후계자였다.
누가 보더라도 불만은 없을 듯한 자리다.
그러나 홍태주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필요했던 결단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지금의 홍태주라고 다르지 않았다.
홍태주는 찬탈과 함께 한의 지위를 발휘하여 팔기와 몽골군, 야인 여진족까지 대거 동원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동시에 몰아쳤다.
그런데도 꺾지 못한 조선이다.
이러한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라도 했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홍태주는 더 늦기 전에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서두를수록 더 작은 대가로 큰 후환을 진압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만큼 조선의 성장세가 두려웠으니까. 다만 그뿐. 패배는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목적의 달성 수준이 이상적이지 못할 경우는 우려했다.
압도적으로 승리하지는 못하여 조선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거나 조선 왕의 신병은 확보했더라도 세자 따위가 남아서 항전을 이어가는 등.
상황은 각자 다를지언정 홍태주는 이러한 경우라도 상정해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조선의 몰락.
당연했다.
대청이 대금으로 불리던 시절에도, 팔기의 전력을 맞고도 몰락을 면치 않았던 세력이 있던가?
연명은 가까스로 가능할지언정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팔기의 저력이란 그러했다. 홍태주에게는 물이 아래로 흐른다는 수준의 진리였다.
하지만…….
“용인해주신다면, 저희는 대칸을 저희의 대칸으로 받들고 모시겠습니다.”
홍태주는 자신의 용상 아래에서 충성을 제안하는 자를 노려보았다.
원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감히 자신에게 충성을 ‘제안’하다니.
만주에서 살아가는 만주인이라면 대칸인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
제멋대로 제안하고 말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 수도까지 빼앗기면서 절망적으로 몰락한 홍태주의 현실이 이러했다.
한때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쫓아내고 멸망시킨 군소한 세력들의 후계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대칸의 영토를 제멋대로 점거하고 백성을 사로잡아 자신의 영민이나 노예로 부리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듭 나갔다.
한두 놈도 아니었다.
무수한 독자 세력이 물집처럼 압록강과 두만강 근방에서 번져댔다.
그리고 현재, 기반을 갖추게 된 군소 세력들은 홍태주를 새로운 경지에서 도발하고 있었다.
“…….”
홍태주는 당장 눈앞의 사내를 처단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딴에는 눈치 보는 모습이 더욱 하찮고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고작 이런 놈을 만주의 대칸이자 대청의 황제인 자신 앞에 대령한단 말인가?
마땅히 팔기를 몰아 모조리 찢어버릴 일이거늘.
당장 몰아칠 팔기가 없다.
과반의 팔기가 압록강 너머에서 몰살했다. 퇴로가 끊긴 군대의 전멸이란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전투 불능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전멸을 의미했다.
잔존한 팔기도 홍태주의 강압적인 질서 재확립 과중에서 죽을 놈은 죽고 도망칠 놈은 도망쳐서 더 줄어들었다.
홍태주나 팔기나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규율이 잡혔으나 절대적인 숫자는 줄어들었다. 외부로 군사력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반역자들이 물집처럼 번져가는 꼴을 지켜보기만 한 연유다.
오늘날 대청제국의 지배력은 도시국가 수준으로 축소했다.
홍태주는 인고 끝에 답했다.
“……좋다.”
좌우로 시립한 신하들이 안도하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반색한 얼굴로 공허한 칭송을 쏟아내는 전령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홍태주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지금 드는 충동을 진솔하게 발산하면 군소 세력들은 모조리 도르곤과 아바타이에게 충성을 맹세할 테니까.
이미 일부 세력은 그리되었다.
마지 못해 차악을 선택한 홍태주는, 가시가 목에 걸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거칠게 말했다.
“물러나라.”
“예!”
전령이 도망치듯 물러나고.
홍태주는 울분을 식힌 뒤 신하들에게 물었다.
“오늘 봐야 할 멍청이가 몇 놈이나 남았나?”
한 신하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다음은 닝구타寧古塔의…….”
홍태주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었다. 하찮은 종자들의 신상명세 따위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지금 찾아오는 놈들의 정보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살생부에 기입되어야 할 것이었다.
“짧게 말하라.”
“다섯입니다.”
홍태주는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자신의 인내심이 끝까지 버텨줄지 미지수였다.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은, 일단 다 받아주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수도는 찬탈자에게 점거되었으며 복속된 차하르부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멍청하고 덜떨어진 야인여진이 대청의 질서에 여전히 귀속되어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변방에 난립하는 군소 세력들은 설상가상일 뿐이다.
자신의 ‘정체停滯’를 알게 되었을 명나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미지수였고,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리는 장본인이 확실한 조선 역시 눈치가 보였다.
화룡점정은 요동 각지로 흘러들어와 소요사태를 부추기는 조선발 격문이다.
호시탐탐 반역의 기회만을 노렸을 요동의 명나라인들은 원정이 실패하고 제국이 두 쪽이 났을 때부터 앞다투어 대청의 질서에서 이탈해 왔다.
그들이 당장 요양을 향해 창을 들이밀지 않는 건 오로지, 일부나마 팔기가 잔존하며 누구도 나서서 팔기를 먼저 상대할 생각이 없어서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발 격문이 팔기를 무적에서 상대할만한 존재로 격하하고 있다.
팔기를 상대하여 승리를 거둔 건 조선이지만, 우매한 명나라인들은 저들이 조선보다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고 대청의 발아래 깔리게 되었어도 그렇다. 이 사리 분별 안 되는 멍청한 가축들이 조만간 주인을 향해 창날을 들이밀 거라는 건 기정사실이라 보아도 좋았다.
‘내전, 내란, 내분…….’
멸망과 파탄의 기류가 총체적으로 만주를 휩쓴다.
만약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고, 만주가 끝없는 혼란과 도탄에 빠져들어 자멸만을 거듭한다면, 이 광경을 좋아하고 있을 조선의 왕에게는 장차 만주가 푹 끓인 죽처럼 보이게 되지 않을까.
그가 당장 강을 넘어오지 않은 건 현재 조선의 역량으로 지금의 만주를 흡수하기 벅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주가 스스로를 요리해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면, 조선의 왕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게 조선 왕이 가진 저의일 게 분명했다.
홍태주는 후회했다.
* * *
“그러게 왜 건드려서는…….”
시답잖은 보고를 받았다.
서궐이 아무래도 방대한 면적에 비해 정기적으로 이용되는 공간이 적다 보니, 사람들 모르는 사이에 벌집이 들어섰다.
거주자가 세자 부부밖에 없고, 모두 동궁 권역에서 살아간다지만 왕가의 거처에 벌이 붕붕거리면서 돌아다니게 둘 수 없는 노릇.
위사 몇과 병사 몇이 중무장하고 벌집 제거에 투입되었으나, 겨울철 벌은 호락호락 노숙자가 되어주지 않았다.
계절 탓에 집을 잃으면 모조리 동사에 아사다. 독기 잔뜩 오른 벌들은 방충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 내부로 파고들어 여럿을 쏘았다.
구경꾼들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몇 명이나 다친 겁니까?”
“봉방蜂房 제거를 감독하러 간 우의정 이상의와, 직접 위사들을 이끌고 봉방을 제거한 포도대장 등 11인이 쏘였습니다.”
“많이도 맞았네.”
우의정이나 되는 인간이 거긴 또 왜 있었던 거고?
말이야 감독이지, 그냥 일이 났다기에 구경 갔다가 봉침 맞았다는 소리로밖에는 안 들린다.
“위험한 사람은요?”
“없사옵니다. 봉방 역시, 제거되었사옵니다.”
“다행입니다. 혹 흩어진 벌 중에 동궁으로 날아가는 것들이 있을 수 있으니 세자에게는 각별하게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이미 비슷한 전언이 작업 전에 전해졌겠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뻔한 소리를 했다.
“예.”
최 상선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회수된 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이상의가 벌에 쏘인 복수를 해야겠다면서 가져다가 술로 담가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수 해 전 금방 죽을 팔자라고 천기누설한 이래 건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지라.
딴에는 오래오래 살아서 왕명을 보필하기 위해서라지만, 뭐.
제 몫은 하는 사람이라 본인만 가능하다면 100년이고 200년이고 더 살아도 된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만.
‘……구경하다가 벌에 쏘였다는 것도, 실은 일부러 맞은 건가? 봉침이 몸에 좋다고 해서?’
가능성 있었다.
아무튼.
의주부사가 장계를 보내왔다.
압록강 너머 정세에 대한 정탐 보고였다.
정보는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출처에 따라 이분화되어 있었다.
하나는 압록강 안팎을 오가는 여진족과 밀수업자들.
다른 하나는 아예 강 너머로 보내진 정탐들. 이들이 알아낸 정보는 현지에서 정탐을 총괄하는 한윤이 정리해서 의주로 보낸다.
그러면 의주부사는 직접 알아낸 것과 한윤이 보낸 것을 따로 내게 보내는 식이다.
만주가 한참 내란과 내전으로 혼란한 와중인지라 뜬소문과 헛소문이 팽배했다. 두 출처에서 각기 다른 소식이나 상충하는 정보를 알려올 때가 많았다.
“명나라에서 오십만 대군을 징발해 요동을 회복하려 든다고? ……참나. 질러도 적당히 질러야지.”
현지에서 확보된 소식이다. 요동의 명나라인들이 여기저기서 궐기하며 홍태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는 있다지만, 아직 독립에 성공한 건 아니다.
이 정보는 명나라인들이 본국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헛소문이라 봐야겠지.
홍태주를 압박할 의도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렸을 수도 있겠다.
한윤의 분석 역시 그러했다. 신뢰도는 지극히 낮다고.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지만, 명나라에 대해서라면 더 확실한 정보원이 있다.
여전히 귀국하지 않고 명나라에서 갖은 소식은 다 누리고 있을 예조판서 남이공이다.
이전부터 황제가 총애한다는 소식이 있었고, 이제는 조선이 후금의 군대를 무자비하게 박살내기까지 한지라 한참 떠받들여지고 있을 테지.
‘팔자도 좋아.’
그래도 제 몫은 하고 있다. 만약 명나라에서 거병했다면 내게 미리 알렸을 거다.
‘이런 사안이라면 먼저 명나라에서 함께 후금과 홍태주를 끝장내자고 사람을 보내왔을 수도 있겠다만.’
요동의 명나라인들이 기원 잔뜩 담아 퍼뜨린 헛소문이 그저 헛소문으로 그칠 이유다.
“……그런데 명나라는 진짜 탈환을 안 하려나.”
남이공이 보내오는 명나라 소식이 한결같이 안 좋긴 하다.
황도皇都에서는 무의미한 정쟁이 거듭되는 동안, 밖에서는 무능하고 무능력한 황제의 연이은 집권으로 파탄이 난 말단에서부터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
이미 섬서성 일대에서는 가뭄의 후유증으로 불온한 모습이 보인다고 하고.
보통 겨울은 늦가을 추수에 연이어 가장 풍족한 계절이라는 걸 생각하면 매우 심각하긴 하다.
하기야, 한두 해도 아니고 한 세기를 꼬박 황제들이 실정을 이어나갔으니 이제야 망하려는 것도 대단한 내구성이다.
나는 일독한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이런 판도도 괜찮네.”
국내적으로는 몰라도, 국제적으로는 명나라도 후금도 조선만 바라보고 있다.
한 놈은 조선이 무리해서라도 후금을 끝장내주기를 바라고 있을 테고, 다른 한 놈은 제발 강을 넘어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지만, 나는 당당하게 양쪽 모두에게 중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왜 조선이 무리해서 남의 땅을 찾아줘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시비가 붙은 걸 그냥 넘어가 줄 생각도 없다.
그래서 만주에 군사는 보내지 않고 분탕만 오지게 치는 중인데 보고만 받아도 재미있다. 현지에서 첩보를 총괄하고 있을 한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한풀이는 그렇게 하는 거지.
명나라도 후금도 조선이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 게 내심 꼽겠지만, 어느 쪽도 조선에 간섭할 여력도 여지도 없다.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
꼬우면 건드리지를 말았어야지. 특히 후금, 너.
“요동에 약간의 혼란을 더 추가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