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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70화 (170/380)

인조, 명군이 되다 170화

요동과 만주가 혼란해지면서-나는 더 혼란하게 만들어줄 생각까지 있지만-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된 조선이라고 혼란이 없지는 않았다.

“배가 불렀습니다.”

“…….”

최 상선은 나의 평가가 민망했던지 조용히 허리 숙였지만, 나는 달리 평할 수 없었다.

일부 유생과 선비들이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일으켰다.

사유는 자신들이 올린 연명 상소를 내가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올린 연명 상소의 내용이란, 개정한 호패법을 시행하고 천민 속오군을 집단 해방하여 존비와 귀천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대명에서 본받아 선열께서 제정한 예법을 논의 없이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올 수는 있지.’

시대의 변화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물갈이를 가져온다.

전통적인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여러 귀족이 그저 멋들어지기만 한 간판만 가진 채 몰락하는 동안 무수한 자본가가 신흥귀족의 반열에 올랐듯이.

사소한 제도의 변화도 사소한 계급의 변화를 가져온다.

지금 언성을 높이는 이들은 신분과 한평생 익힌 고루한 예법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자들이다.

내가 가져온 변화는 그들에게선 전부를 빼앗아가는 것이고.

선현의 가르침을 머리에 새기기는 하였으되 녹여내지는 못한 자들이 미련에 과욕을 부리는 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나를 폭군이라 부르면 안 되지!’

내가 주도한 변화가 조선의 국격을 오랑캐 수준으로 추락시킨단다.

질서도 예법도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동방예의지국을 자칭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장 조선에 없어진 건 어처구니뿐이다.

오리지널 인조의 역사에서는 찍소리도 못했을 놈들이 내게 폭군 타령을 하다니.

어지간히 말 같은 소리를 했다면 소통을 시도해보 았겠으나 상소의 내용이 사람의 언어보다는 엉덩이 사이로 새어 나온 방구에 더 가까웠던 관계로 상대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제는 궁궐 앞을 점거한 것이다.

정말 배가 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작 수년 전까지만 해도 도탄에 빠져 있었던 조선이다. 반정까지 일어나며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몇 년 사이 승승장구하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고 올챙이 시절 다 잊고 덤벼드는 거다.

‘……간만에 피라도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피를 보는 거라면, 마침 참고할 만한 사람이 있다.

인조라고.

아주 개망나니 같은 놈이다.

그는 치세 초반 무능력자의 찬탈이라는 데서 오는 짙은 반감을, 무수한 피를 흩뿌림으로써 억압했다.

그런 인조가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한 패가 반역 날조다.

현재의 역사에서는 잘 살아 있는, 유몽인을 상대로 한 유몽인사柳夢寅事라던가.

마찬가지로 지금은 잘 살아 있는, 북인 원로와 종친 원로를 상대로 일으킨 박홍구 및 인성군의 역모라던가.

이괄이 끝내 난을 벌인 이유도 인조와 일당들이 벌인 반역 날조 때문이다.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 이 머저리들은 또 반역을 날조한다.

덕분에 피는 제대로 흘렀다.

나라면 더 잘 해내겠지.

이미 치세 초반에 위험분자들을 잘 솎아내기도 했고.

……하지만.

퇴물들 때문에 괴물이 될 수는 없다.

퇴물들 상대한다고 그만큼 공을 들이기도 아깝다. 상대하지 않아도 알아서 도태될 자들이다.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시끄러울 뿐이지.

마침 이런 상황에서 달리 참고할 만한 인물이 있다. 인조와는 다르게 정말로 도움이 될 존재다.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한 화웅이라고.

작고하시기 전 화웅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그렇다면 닭 잡는 칼을 내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후 화웅 선생님은 닭들을 잘 잡던 와중 난입한 수염 달린 대추에게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신하 중에 마침 닭 잡는 칼이 있다.

이미 검증된 인사이기도 하다.

“공조판서에게 입시하라고 하세요.”

* * *

김류는 부름의 연유를 쉽게 추측했다.

“전하!”

궐문 앞에 엎드린 선비가 외쳤다.

“날개가 있다고 하여 모두 백로가 아니고, 두 다리가 달렸다고 하여 모두 사람이 아니듯이, 사람 사이에도 존귀가 있고 귀천이 있거늘 어찌하여 혼란스러운 법을 제정하여 하늘이 정한 법도를 어지럽히시옵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좌장座長의 선창에 여타 선비들과 단령을 걸친 유생들이 후창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구경꾼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떠벌였으나 김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더 들어보지 않아도 뻔한 헛소리다.

분명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왕이 자신을 부른 이유도 뻔했다. 이 시끄러운 작자들이 떠벌리는 뻔한 헛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다.

‘흐음.’

김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거듭하며 집무실 앞에 이르렀다.

문앞을 지키는 내시가 말했다.

“전하. 공조판서 김류 입시했사옵니다.”

“들라 하라.”

윤허와 함께 좌우에 선 내시들이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서 왕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안과 바닥에는 책과 권자들이 켜켜이 쌓인 채였다. 볼 때마다 양상이 달라지는 걸 보아 확실히 장식 삼아 가져다 놓은 건 아니다. 그런데도 궐 밖에서 무지한 작자들이 소란을 벌이니 설상가상일 수밖에 없다.

“부르셨사옵니까.”

김류는 손을 모으고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왕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만큼이나 만족스러운 일도 없다.

최근에는 호출이 적어서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겠거니 여겨왔다. 전쟁 때문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내치에 돌입한 지금.

시건방진 작자들이 설쳐대는 와중 자신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앉으시지요.”

“예.”

김류는 짧게 응답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서안 앞에 놓인 방석을 깔고 앉았다.

“편하게 앉으셔도 됩니다.”

“망극하옵니다.”

김류는 사양하지 않았다. 방문 때마다 거듭 배려가 있었지만, 일단 무릎을 꿇은 것으로 예의는 다했다고 여겼다.

서인의 영수인데 이 정도의 당당함은 있어야지.

왕이 입을 열었다.

“방문하시는 중에 궐 앞에서 벌어진 소란을 보셨겠지요.”

“그러하옵니다.”

왕의 저의가 곧장 모습을 드러냈지만, 김류는 서두르지 않았다.

“못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요.”

궐 앞에서 농성이라니,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을 소란이다.

그러나 우매한 작자들이 사흘 밤낮으로 시끄럽게 떠벌이느냐, 혹은 늦지 않게 치워지느냐는 주는 느낌이 다르다.

왕은 유약하게 정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김자점을 멸구해 버린 김류이기에 잘 알았다.

“맡겨주시옵소서.”

김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계책을 말했다.

복잡한 수법은 아니었다.

단순하지만, 야만적인 방법은 더욱 아니었다.

“경의 뜻대로 하세요.”

윤허와 함께 김류가 웃었다.

* * *

“태조께서 창건하신 이래! 열성과 선현들이 이백 년 넘게 동방예의지국으로 가꿔온 이 나라 조선을! 어찌 오랑캐들의 것과 진배없는!”

좌장의 일장연설도 거기까지였다.

촤악!

궁궐 앞에서 농성하던 선비, 유생들에게 찬물이 쏟아졌다. 한겨울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된 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추워!”

“얼어 죽는다!”

한바탕 물바가지를 휘두른 김류는 눈앞의 자칭 식자들이 꼴사나운 염병을 떨어댄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만, 김류는 바가지에 다시 물을 채워 뿌렸다.

촤아악!

“아악!”

물이 사람과 바닥을 맞고 사방으로 튀었고, 구경꾼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거듭 찬물 맞은 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나거나 만신창이가 된 채로 진창에서 허우적거렸다.

시끄럽게 떠들었던 좌장은 소란 사이 온데간데없어졌고, 그가 대표로서 떠받들었던 상소문은 주인 떠나간 자리에 흠뻑 젖은 채로 버려졌다.

김류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바가지를 내던졌다.

“하찮은 농지거리는 끝났느냐?!”

물벼락은 그쳤으나,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선비와 유생들은 참상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려는 자는 없었다.

지금은 겨울이었고, 그 겨우내 살얼음까지 낀 우물물을 맞았다.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한양 한복판에서 동사하는 수가 있었다.

“꺼져라! 이 하찮은 놈들. 관직 하나 얻지 못한 신세로 감히 궐 앞에서 소란을 벌이느냐?!”

흠뻑 젖은 사내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를 빠져나갔다.

때 아닌 냉수 마찰에 누군가는 정신을 놓아버린 듯, 부축을 받으며 멀어지는 자도 있었다.

김류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유생 하나가 버티는 중이다. 머릿속이 한참 반항심으로 가득할 나이다.

“대감은 이 나라가 진정으로 오랑캐들과 같은 수준이 되기를 바라시옵니까!”

유생이 언성을 높였다.

김류는 생각했다.

기백이라 쳐주기엔 생각이 짧으니, 그저 독기가 대단하다고만 보는 게 옳겠다고.

유생은 추위에 독기가 더해져서 얼굴은 물론 눈까지 벌겋게 물든 채였다.

“네 녀석이 오랑캐의 노예가 되지 않은 것이 전적으로 전하께서 세우신 공로거늘, 어찌 감히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의론을 내느냐!”

“성업은 성업이고, 실책은 실책입니다!”

“미친놈……!”

“소관들은 전하의 성세를 더욱 빛내고자 진심어린 간언을 올리고 있었거늘, 대감은 맹종하여 언로를 허물었으니 훗날 이 일이 역사에 어떻게 거론되겠습니까?!”

김류의 얼굴이 점차 노기로 물들었다.

자신은 폐조 때 목숨을 걸고 의기한 사람이다. 금상을 옹립한 공신 중에서도 공신이요, 오늘날 성세에 지분이 없다고도 못할 터이거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댄다.

“네놈이 정녕……!”

아무리 기고만장한 자라도 막상 죽음이 닥치면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애송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김류는 눈앞의 철부지에게 죽어서 철이 들 기회를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결론이 내려지기 전에 다른 선비가 끼어들었다.

젖지 않은 걸 보니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김류에게 연신 굽신대면서, 억지로 버티는 젊은 유생을 붙들어 멀어졌다.

가족이나 지인일 것이다. 아니면 단지 애송이가 저 죽을 짓을 해대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었던지.

“……흥!”

김류는 거칠게 콧방귀를 뀌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왕이 맡긴 일은 완수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소란을 일으켰던 궐 앞은 이제 조용하다.

대신 그 소란이 자신에게 옮겨붙을 것은 자명하였으나 김류는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은 바깥이 평화로운 시기.

내정에 힘쓰다 보면 안이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지금 같은 공연한 소란은 끝도 없이 벌어진다. 이런 걸 잘 다스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적임자가 누구겠나?

“흠, 흠.”

김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바깥이 소란스럽건, 소란스럽지 않건 내부의 잡음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만 전쟁처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가 벌어지면 소소한 문제들은 뒷전이 되고 모두가 공존을 위해 힘을 합치게 된다.

그간 거론되지 않았던 정책의 반발이 뒤늦게 불거지는 건 존립의 위기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가 심대하게 분열하여, 내부에서부터 적아敵我의 구분이 생겨난다면 외부의 위협도 타협의 이유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저 각자도생만을 추구할 뿐.

저 멀리 북쪽 강 너머에서, 홍태주는 조선발 격문에 경도된 요동인 반란군을 맞이했다.

찬물 뿌려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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