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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71화 (171/380)

인조, 명군이 되다 171화

요동 땅에 소문이 돌았다.

-우리가 먼저 봉기하면 명군이 와서 구원해 줄 것이다!

혼란을 틈타 번진 많고 많은 소문 중 하나로 그쳤을 수도 있었다.

비슷한 소문 역시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명나라에서 오십만 대군을 꾸려 요동을 구원한다는 소문이 그러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실현될 수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압제와 서로에게 시달리던 요동의 명나라인들은 소문의 신뢰성을 진지하게 고찰하지 않았다.

대신 더 많은 희망을 품고서 실현되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뿐.

먼저 봉기를 일으켜야 명군이 돕는다는 소문 역시 그러한 축에 속했다.

병부상서가 어전에서 그렇게 말했다더라, 실제로 있었던 발언인 양 말이 돌았다.

근거는 나름 존재하였으니, 먼저 홍태주의 이목을 붙들어놓아야 명군의 출병과 안팎에서의 협공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버려진 요동의 명나라인들은 생각했다.

‘그런가?’

일말의 합리성이 소문에 불을 붙였다. 그간 요동을 어지러이 휩쓸어댄 풍문들은 그러한 합리성조차 없었던 탓이다.

헛된 희망이 하나의 기치 아래 모여들자 무수한 풍문이 다 사그라들고 단 하나의 폭풍만이 요동을 휩쓸었다.

많은 사람이 소문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나아가 적지 않은 인물들은 마땅히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들이 후금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적극적으로 내응한다는 증명으로서 서둘러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조선인의 입에서 시작한 헛소문이 요동 명나라인들의 신앙이 되었다.

* * *

누군가에게는 그마저도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했다.

“하늘 같은 폐하의 군사들에게 먹일 식량을 징발하겠다는데 감히 저항하겠다는 것이냐!”

민가에 난입한 장정들이 외쳤다.

그들 앞에서는 잔뜩 매를 맞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가장이 피를 흘렸고, 다른 가족들은 마당 구석에 모여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장정 하나가 피 묻은 몽둥이를 들고서 외쳤다.

“샅샅이 뒤져라!”

“예!”

부하들이 당차게 답하며 흩어졌다. 저마다 얼굴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장정들이 하는 행동은 마치 명군이 강제로 재산을 징발하는 모양새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차림은 껄렁한 무뢰배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실체 역시도 그러했다.

혼란을 틈타 요동에는 무수한 군벌이 난립했다.

각자가 저들이 황제와 명 조정의 정당한 대행자라며 들고 일어선 이들은, 양립 불가한 거창한 명분과는 정반대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가는 건 평범한 양민들이었다.

“안 되오! 안 되오!”

군벌을 등에 업은 무뢰배가 곡식 주머니를 끌고 나오자, 피떡이 되었던 가장이 일어나 하소연했다.

“아직 겨울인데 양식을 다 가져가면 가족들은 무얼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닥쳐! 황제의 군대를 거역하는 거냐!”

“세상 천지에 이런 황제의 군대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가장은 절규를 내지르며 곡식 자루를 부둥켜 안았다.

뒤에서는 가족들이 그런 가장을 만류했지만, 가장은 당장 여기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오늘 저녁부터 가족이 굶는 꼴을 봐야 했다.

그러나 무뢰배는 무자비했다.

“여기 있다!”

일갈과 함께 휘두른 몽둥이가 가장의 정수리에 작렬했다.

무언가 박살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 풀린 가장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즉사한 걸까?

무뢰배는 일순 흠칫하였으나, 일일이 연연하기엔 수없이 손을 더럽혀왔다. 그는 그저 침만 탁 뱉고 마저 곡식자루를 끌고 가는 것으로 찝찝한 기분을 마무리했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

자칭 황군이 한바탕 뒤엎은 뒤 빠져나가자, 아이들의 절규와 어미의 통곡이 마당을 메웠다.

그러한 와중에도 자칭 황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먹이를 물색했다.

* * *

도적과 탈주병, 전직 문무관과 몰락해 버린 유지들만 군벌을 세운 건 아니었다.

후금이 분열하기 이전 누르하치와 홍태주를 대신해 각지를 다스렸던 관리와 한간漢奸 앞잡이들, 어느 쪽에도 충성하지 않기로 한 이탈 팔기군도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근방에서는 몰락 부족의 후계자들이 귀환하여 부활을 천명했다.

그야말로 대혼란의 요동이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어떠한 세력가는 요동 명나라인들의 염원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홍태주에게 대항해 맞서다 보면 명군이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소문이 그간 요동을 휩쓸어온 여느 헛소문들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실현을 염원하고 기대하는 한 힘과 명분이 깃들게 된다.

십중팔구의 군소한 군벌들이 그럴싸한 명목을 내세워 양민들을 약탈하지만 기교도 모양새도 좋지 않은 그들은 언제까지고 약탈자들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장차 질서가 확립된다면 모조리 쓸어 없어질.

그러나, 양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홍태주까지 거꾸러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단순한 약탈자로는 끝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상황만 받쳐준다면, 한때 요동총병 이성량은 미처 다다르지 못했던, 진정한 요동의 주인으로서 거듭날지도 몰랐다.

명나라도 예전 같지 않으니.

“자고로 폭풍이 몰아칠 때는 숙이고 있어야 하는 법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폭풍이 되었으니, 몰아쳐야지.”

이영방李永芳이 요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거 요동에서 반쯤 왕처럼 군림했던 영원백寧遠伯 이성량의 아들이자, 명나라에서는 유격을 지냈으며, 금나라에서는 총병을 맡았던 그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를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홍태주와 더 수월히 대적하기 위해 장인인 아파태에게 붙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영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동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으니까.

청나라에 굴종했던 시절이 그리 즐겁지만도 않았고.

“복잡하게 말하지 않으리다. 홍태주의 수급에 요동의 안녕이 걸렸소!”

또, 그것이 자신이 요동의 왕이 될 열쇠이기도 했고.

“놈이 이미 천운이 다하여 아비를 배반하고 군사도 모조리 잃었으니, 많은 공적을 하찮은 조선에 빼앗기기는 하였으나 마무리는 마땅히 황상을 모시고 어심을 대변하는 우리가 취해야지 않겠소이까!”

제장이 일제히 찬동했다.

대장으로 군림하는 이영방의 행적을 돌아본다면 그의 발언이 웃기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나 알았지만, 어차피 잿밥에나 관심이 있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시대의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니, 그대들은 나와 뜻을 합쳐 대업을 이루시오!”

일장연설이 끝나자 제장이 환호했고, 그들 각자의 점령지에서 끌려온 병사들은 마지못해서 호응했다.

요양 지척에서 이토록 소란을 일으키니 홍태주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저들의 선공을 허용한다면, 경도된 요양의 명인들이 내응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

홍태주는 군사 일부에게 엄중한 통제와 함께 이를 실천할 권한을 허용하고서 자신에게 남은 팔기군을 이끌고 요양을 빠져나갔다.

요양의 주민들은 홍태주와 이영방이 서로 싸워 함께 멸망하기만을 기원했다.

* * *

“대청의 황제, 몽골의 대칸께서 이르신다!”

이영방군 앞으로 말을 몰아 달려온 전령이 외쳤다.

“이영방, 이 미천한 한족 노예놈아! 무릎과 눈물로 충성을 맹세하고 밤낮으로 나의 발가락을 핥던 추억은 모두 망각하였느냐! 지금이라도 다시 옷을 벗고 두 손을 묶어 나의 앞으로 기어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전령은 한간漢奸인 듯 중국어에 능통했다.

이영방은 제장과 군사들 앞에서 흑역사가 공공연히 거론되자, 면상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채 활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퉁!

파공과 함께 화살이 날았으나 전령을 맞추지는 못했다.

일순 바닥에 꽂힌 화살을 확인한 전령이 고삐를 돌리고서 외쳤다.

“병신같은 놈!”

그리고는 저만치 달아나니, 몇몇 사람이 더 화살을 쏘았으나 전령은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영방은 군중에 도는 불온한 기류를 느꼈다.

행보야 어떻건, 명에서도 금에서도 군사지휘관을 맡았던 이영방이었다. 이게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병사들의 관심사를 빨리 돌려야 했다.

“진군하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영방은 군사들을 곧장 전장으로 밀어넣었다.

생사가 걸린 이들은 더는 이영방의 역사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저 살아남가만을 거듭 기원하면서 떨리는 다리로 애써 진군했다.

먼저 접전한 것은 기병대였다.

양익에서 서로의 측면과 후방을 노리고 뛰쳐나간 기병대들은 서로 화살부터 주고받으며 어지러이 엉켰다.

“크악!”

이영방군의 기수 하나가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전신을 후려치는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섞이는 말발굽이 사람을 짓이겼다.

창과 칼이 섞였다. 모든 방위에서 흉기가 날아들었다. 말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피와 욕설이 튀겼다.

“돌격!”

양익의 혼전을 확인한 이영방이 외쳤다.

급조한 기병대가 팔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교전은 일방적이었다. 팔기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에 승기를 가져와야 했다.

탕! 타타탕!

교차하는 화살비 아래에서 쇠의 우박이 서로의 전열을 강타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쓰러지는 병사 너머에서, 더 많은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쳐라!”

“죽여!”

본능적인 외침들.

이질적인 복장의 두 무리가 격돌했다. 앞으로는 적군, 뒤로는 아군과 맞댄 채 병사들은 어렵사리 병장기를 놀렸다. 칼은 배를 찌르고 창은 목을 찔렀다.

이영방은 혈전을 앞에 두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쳐라! 몰아붙여라! 물러서지 마라! 요양만 함락시키면 너희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된다!”

보병들은 싸우고, 또 싸우고, 그저 싸웠다. 적아에 포위된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모두가 정신이 팔린 사이.

이영방군의 기마대를 꺾은 후금군 팔기가 기수를 돌렸다.

갑주와 말을 피로 적신 철기들은 달려들기 전부터 위압감을 쏟아냈다.

보병대 양익에서 장창으로 무장한 예비대가 제 몫을 하기 위해 등장했다.

철기는 돌진을 그치지 않았다.

조선의 것과 비교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방진이다.

이마저도 뚫지 못한다면 철기대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지척에 다다른 철기대가 대지를 북처럼 울려댔다.

두두두두두두두!

이영방군 장창병들마다 안구에 달려드는 철기가 맺혔다. 땅을 딛고 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창병들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콰과과광!

철기대가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장창이 휘고 꺾였고 사람도 휘고 꺾였다. 뭉개진 장창병대의 전열은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철기대는 쏘아지는 창을 걷어내며 곡도를 휘둘렀다. 창날이 날고 사람 손도 날았다.

철기대는 난전을 펼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두 번째 돌격을 위해서였다.

장창대를 통솔하는 장교들이 대오의 재구성을 채근했다.

“정신 차리고 대오를 갖춰라!”

“대오를 갖춰!”

“적이 오기 전에 방진을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돌진을 정면으로 받은 징집병들의 전의는 흩어진 지 오래.

독전에도 끝까지 어수선했던 장창대 전열로 또 한 번 철기의 돌진이 작렬했다.

“또, 또 온다!”

“피해!”

콰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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